동양 미술/조선시대 미술

17세기 조선시대 어진 제작 전통의 부활

공식 2024. 7. 26. 08:40

 

 

조선시대 어진의 역사에서 17세기는 중요한 분기점입니다. 100여 년가량 중단되어 소멸직전에 놓였던 어진 제작 전통이 이때 부활하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이끈 장본인은 조선의 19대 왕 숙종이었습니다. 즉위 내내 숙종은 선대왕들의 어진과 전각을 개수하는 한편 살아있는 왕의 어진을 그려 봉안(신주나 초상화를 받들어 모시는 행위)한다는 옛 관행을 다시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새롭게 정립된 진전(어진을 모시는 제향 장소) 체제는 큰 틀에서 볼 때 대한제국 시기까지 이어집니다.

숙종은 즉위 초부터 어진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강화도에 있는 남별전 증축은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1677년 숙종은 세조 어진과 원종 어진이 봉안된 남별전을 수리하고 규모 또한 1실에서 3실로 증축합니다. 숙종 14년인 1688년에는 그렇게 증축된 남별전을 영희전이라 고쳐 부르고 그 자리에 태조 어진을 봉안했는데 이 모든 과정을 숙종이 직접 감독해 진행했습니다. 이때 전주 경기전에 있는 태조의 어진을 모사해 봉안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중요한 메시지를 함축합니다.

1차적으로 태조 어진 봉안은 숙종이 가진 정통성을 강조한다는 정치적 의미를 지닙니다. 경기전에 있던 태조의 어진을 강화도로 환봉(還奉)한 것은 숙종의 정통성이 개인의 위상이 아닌 왕조의 창업자에서부터 내려져온 무엇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문제는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동원된 의례로 다름 아닌 어진 봉안 의례를 거행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숙종의 재위 이전 어진은 조선 초와 다르게 의례용 기물로서의 위상이 크게 위축된 상태였습니다. 태조 진전이 차례로 혁파되거나 훼손된 이후 고쳐지지 않았다는 점은 이를 보여주는 방증입니다. 조선 초 태조의 어진은 궐내에 있었던 진전인 문소전과 영흥(이후 함흥), 개성, 전주, 경주, 평양에 있던 외방 진전으로 나누어 봉안되었습니다. 이 중 영흥과 개성의 진전은 각각 태조의 탄생지와 잠저라는 역사성이 더해져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들이 직접 관리, 감독하였고 그곳에서의 의례를 종묘에서 행하는 의례와 동일한 격으로 맞춰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국조오례의가 정착하면서 태조 어진의 위상은 크게 변화합니다. 외방 진전의 경우 왕이 친향하거나 사신으로 하여금 향과 축을 전달하던 것이 각 지방의 관찰사가 제를 주관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또한 궐내에 위치한 문소전의 경우 영정이 아닌 신주를 모시는 공간으로 전환되어 진전으로의 문소전은 철폐되었습니다. 이러한 위상 변화는 양란 이후 경기전, 준원전을 제외한 모든 진전이 전소되었음에도 복구 작업을 시행하지 않았다는 점이나 문소전에 걸려있던 태조 어진이 궤에 넣어져 선원전에 보관한 뒤 제의적 목적으로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을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그렇기에 숙종의 태조 어진 봉안은 정치적 측면 이외에도 문화적, 사상적 측면에서 큰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숙종의 조치는 조선 후기 초상화가 통치의 수단으로 적극적으로 사용된 대표적 사례로 이해되었습니다. 나아가 숙종이 단행한 여러 조치들이 이후 왕들에게서 동일한 목적으로 자주 사용되는 바, 조선 후기 이미지 정치의 전거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숙종의 조치에 대해 신하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당대인들의 눈에도 숙종의 조치는 100년 넘게 단절되었던 진전체제의 회복과 그에 맞춰 변화될 왕실 예법의 변화를 예고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변화를 바라보는 신하들의 입장이 왕과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흔히들 조선을 초상화의 나라라고 할 정도로 초상화 제작이 성행한 나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입지가 언제나 공고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중반까지의 약 100년 동안 초상화는 조선 초 누렸던 위상을 누리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잦은 전란으로 인해 문화 예술이 이전만큼 활성화되기 어려웠고 유교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어 감에 따라 초상을 그리는 것이 우상을 만드는 것과 동일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이 싹트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호불사 편시타인(一毫不似 便時他人)이라는 문구는 이러한 의심 속에서 초상화의 제의적 기능에 회의적 의견을 내비칠 때 자주 인용되었습니다. 터럭 한 올이라도 닮지 않으면 그 사람이 아니다라는 뜻을 지닌 이 문구는 본래의 뜻만 보면 사실성을 강조하는 문구이지만 조선 중기에 들어서는 초상화를 모시는 것이 그 자체로 예법이 아니라는 생각의 근거가 되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실제에 있어 터럭 한 올을 완벽하게 똑같이 그리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그렇게 그리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신주를 이용해 제를 지내는 것이 낫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왕실에서 진전이 아닌 종묘를 중심으로 한 제례를 확립하고 사림의 주요 인물들이 초상화를 그리지 않은 것도 이런 논리의 연장선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16세기의 기록에는 사가에서 초상화에 제를 올린 사례가 급격히 감소하고 서원, 영당에 걸어놓은 초상화들이 다양한 이유로 궤에 넣어 보관되거나 신주로 교체되는 사례가 등장합니다. 이렇듯 초상화의 제의적 기능이 억압되는 와중에도 서원, 영당에 초상화를 모시고 제를 올리는 사람들 또한 분명 존재했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어디까지나 신주를 사용할 수 없을 때 이용하게 된 차선책에 불과했지 그것이 예법에 맞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비슷한 시기 허균(許筠, 1569-1618)이 남긴 기록은 이 시기 초상화가 가진 위상을 다시금 확인해줍니다. 허균은 성순조(成順祖, 1418-1473)의 초상화를 보고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깁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화상을 좋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초상을 그린 것이 매우 드물다. 오직 공신의 대열에 끼인 사람이라야 화상이 있는데, 관에서 그려 준 것이다. 또한 그 집안에서 초상화를 그리지 않으니 그 엉성하고 보잘것없음은 가히 알 수 있다.중국 사람들은 명인과 아사(雅士)라면 곧 화상이 있어서 영구히 전하므로 후인들이 존경하며 마치 그 분을 뵙는 듯이 한다. 심지어 자손들 역시 자기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초상을 그려 걸어 놓고 아침저녁으로 섬기되 마치 몸소 말씀을 받들듯이 한다. 그럼으로써 그를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온전히 품는다. 후대의 자손들도 비록 친히 얼굴은 뵙진 못하지만 화상을 통해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볼 것이니 마치 그가 살아 있을 때와 다름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찌 유쾌하지 않겠는가? 우리나라가 화상을 숭상하지 않는 것은 진실로 개탄할 만한 일이다

<성소부부고>

 

이러한 상황에서 신료들이 어진을 바라보는 태도 또한 정확히 초상화를 바라보는 태도와 일치했습니다. 태조의 영정 모사와 봉안이 안건에 올라온 그 해 민정중은 효종 대의 전례를 들어 영정 모사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내비칩니다. 

 

일찍이 효종조에 옥당(玉堂)으로 입시(入侍)하였는데, 그 때 이 논의가 있었으나 모사할 때 전신(傳神, 여기서는 외양뿐만 아니라 내면까지 묘사하는 것을 말함)하기 어려워 만일 조금이라도 실상과 다른 것이 있다면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는 뜻으로 이미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의견도 전과 다르지 않습니다. 

<영정모사도감의궤>

 

민정중은 효종대에 이미 비슷한 일을 시도하려 했지만 전신을 지키지 못할 것을 염려해 이를 반대했다는 점을 들어 영정 모사에 반대했습니다. 당시 조정에서는 "왕이 하고자 한다면" 찬성한다는 원론적 입장이 중론이었기 때문에 민정중의 의견은 얼핏 보기에 소수의견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경신환국 이후 왕이 강력한 정국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시기 신하들의 조건부 찬성은 그 자체로 영정 모사에 대한 불편한 시선을 보여주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숙종 6년 태조의 시호를 새로 올리는 일에는 적극적인 찬성 의사를 내비친적 있던 신료들이 비슷한 이유로 어진을 모사하려 할 때는 그때와 사뭇 다른 태도를 보여준다는 것도 기류 변화가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여기에 더해 적극적 반대 의사를 표명한 민정중은 효종 7년 홍문관 교리에 임명된 이후 오랜 기간 관직생활을 이어온 서인계 중진이었기 때문에 한 개인의 의견이라기보다는 그와 뜻을 같이하는 여러 중진들의 의견을 대변해 말했을 가능성도 농후합니다. 이처럼 분위기가 미묘하게 흘러가자 숙종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남구만(南九萬, 1629-1711)에게 의견을 물었습니다. 남구만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다만 모사할 때 전신(傳神)이 지극히 어렵습니다. 옛 유학자가 말한 바 “터럭 한 올(一毛一髮)이 조금이라도 다르면 이것은 다른 사람이다”라는 것이니, 진실로 바꿀 수 없는 의논입니다. 평범한 사람도 오히려 이런 우려가 있는데, 하물며 임금의 얼굴은 어떻겠습니까? 그러므로 지금 화공의 솜씨가 매우 용렬한데 모사할 때 만약 만에 하나라도 서로 똑같지 않은 곳이 있기라도 하면 사체가 진실로 심히 미안할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 이것은 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영정모사도감의궤>

 

여기서 남구만이 제시한 옛 유학자의 말은 일호불사 편시타인을 인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문구는 조선 왕실에서 초상을 이용한 제의 행위나 어진 개수 작업을 단행하려 할 때 신하들이 주장하던 주요 반대 논리였는데 남구만 역시 이 논리를 꺼내 영정 모사를 반대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남구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숙종은 태조 어진 봉안이라는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남구만의 답에 대해 숙종은 다음과 같이 응수하는 것으로 어진 봉안을 단행할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선대왕(여기서는 효종을 말함)이 재가했으나 아직 행하지 못한 일이다. 남별전은 단지 이성(二聖)의 화상만을 받들고 있고 태조의 화상만 홀로 봉안하지 못했으니 참으로 심한 흠결이다.

<영정모사도감의궤>

 

다시 말해 태조 어진을 봉안하는 것은 이미 효종대에 정해진 것이니 따를 수 밖에 없고 또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3실로 증축된 남별전에 단지 2명의 선조(세조, 원종)만이 모셔져 있어 그 자체로 크나큰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숙종이 효종대에 이미 재가한 일이니 따를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폈다는 점입니다. 추정컨대 이 말은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서인 세력을 겨냥한 발언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잘 알려져 있듯 현종대 갑인예송 과정에서 당시 서인들은 기년복이 아닌 대공복을 입을 것을 주장했는데 그 자체가 효종의 정통성 문제와 결부되어 큰 논란에 휩싸였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한 논란은 숙종 즉위 이후 송시열이 효종을 불천지주(정전에서 신주를 옮기지 않는 것)로 삼을 것을 건의하는 등 선왕의 정통성을 높이는 논리를 계속해서 주장함으로써 무마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숙종은 다시 한번 효종대의 사례를 들어 신하들의 반대를 제압하려 했던 것입니다.

 

숙종이 준비한 논리는 꽤나 효과적으로 먹혀든 것으로 보입니다. 몇몇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숙종은 계속해서 태조 어진 봉안 사업을 진행할 수 있었고 마침내 1688년에 경기전에서 모사된 태조 어진이 영희전에 봉안됩니다. 그리고 이에 맞춰 숙종은 직접 진전에 행차해 잔을 올리는 작헌례를 3년에 한 번으로 정례화해 그것이 이후 조선 왕실의 의례에서 중요한 부분이 될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렇게 태조의 어진이 봉안되며 이 사건은 어느 정도 일단락 된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후 발생할 더 큰 논란의 시작점에 불과했습니다. 왕의 이미지를 통치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던 숙종이 가진 최종 목표는 누가봐도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695년 숙종은 자신이 고대했던 바를 이루기 위한 포석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임금이 중관(中官) 두 사람에게 명하여 어용을 뫼시어 받들고 강화부로 내려가게 하였으니, 외조(外朝)에서는 알지 못하였다

<숙종실록> 

 

숙종은 신료들과의 논의 없이 독단으로 살아있는 왕의 어진을 봉안한다는 조선에서 잊혀진 전통을 다시 부활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1695년 여름, 숙종은 일찍이 태조 어진을 모사했던 조세걸을 불러 초상 2점을 그리게 하고 한 점은 선원전에 한 점은 강화도에 봉안하도록 합니다. 문제는 이것이 신료들이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비밀리에 진행되었으며 그들이 사태의 전모를 파악하게 되었을 때는 이미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일이 상당 부분 진척된 뒤였다는 점입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그 해 6월 숙종은 막 강화유수로 임명된 김구에게 비밀리 명을 내려 어진을 봉안할 전각 건설을 명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영전 건축 공사는 건축을 위한 목재가 다듬어지고 기초공사가 시작되었을즈음 신하들에게 알려지게 됩니다. 8월 5일 병조판서 서문중과 좌의정 유상운이 흉년을 이유로 공사를 연기할 것을 건의합니다. 숙종은 이를 받아들여 공사를 연기하려 했으나 8월 6일 강화도에서 진전 공사를 감독하던 김구로부터 애써 다듬은 목재가 썩어버릴 우려가 있으니 기와를 올리는 작업까지 진행한 후 목재를 그곳에 보관해야 한다는 장계가 올라옵니다. 그리고 다음날인 8월 7일 숙종은 다시 마음을 바꾸어 비밀리에 어진을 강화도로 내려보내 진전 공사를 완료하라는 명을 김구에게 전합니다. 

 

어진이 벌써 강화도로 내려갔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한 신하들은 이 시점에 왕의 의지를 꺾을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이후 영전 공사는 빠르게 마무리되어 8월말과 9월 초에 완공되었고 숙종은 전각에 장녕전이라 명하고 직접 쓴 편액을 하사했습니다. 이후 9월, 객사에 모셔져 있던 숙종의 어진이 왕실의 예법을 거쳐 장녕전에 봉안됨으로써 몇 달간 조정을 떠들썩하게 했던 어진 봉안 사건은 마무리됩니다. 수백 년간 맥이 끊겼던 살아있는 왕의 어진 봉안 사업은 이렇게 전광석화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좌) 작자미상, <남구만 초상>, 견본채색, 개인소장 // (우) <고후관>, 1712년

 

 

1695년 숙종 어진 봉안 사건은 어진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고 사건의 성격 자체도 독특해서 많은 학자들이 주목을 했습니다. 하지만 사건의 거의 모든 흐름들이 비밀리에 진행된 탓에 조선왕조실록에도 관련 기록이 소략하고 승정원일기에도 해당 년도가 존재하지 않아 전말을 알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어진의 모습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것은 후대의 사람들에게 큰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하지만 몇몇 기록들을 통해서 강화도에 봉안된 어진의 모습을 대강이나마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이형상이라는 사람의 기록에 따르면 숙종 어진은 학창의를 입었고 머리에는 역괘고후관(易卦高後冠)을 발에는 당혜를 착용했다고 나와있습니다. 이렇듯 일상복을 입은 왕의 어진은 이전의 왕실 어진에서 전거가 없는 것이었는데 추정컨대 매우 비밀리에 진행된 탓에 곤룡포를 입지 않은 채 어진 제작이 이뤄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편 학창의와 역괘고후관은 당시 사대부들이 일상생활에서 입었던 의복이기 때문에 그 외양을 어느 정도 유추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우선 학창의의 경우 비슷한 시기 남구만의 초상을 통해 숙종의 어진 또한 비슷한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또 역괘고후관의 경우 맞배지붕 모양의 관모로 당시에는 편복과 함께 착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종합해보면 1695년에 봉안된 숙종 어진은 그 상황적 특수성으로 인해 기존에 있던 어진들과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그려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숙종이 신료들의 반발을 의식해 비밀리에 일을 진행했다는 것을 암시함과 동시에 기존의 도상을 따르지 않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미지를 자신의 중요한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하겠다는 왕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숙종 시기 어진을 둘러싼 논란은 조선 사회에서 초상화가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입니다. 유교적 제약에 묶여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만 기능하고 있던 초상화가 이제는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초상화는 이제 제의적인 목적 이외에도 옛사람의 모습을 기억하기 위한 수기적인 목적, 특정학 학맥이나 가문들끼리 결속력을 다지기 위한 정치적 목적 혹은 단순히 감상과 교우의 상징으로 주고 받는 일종의 선물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경향들이 이전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 들어 그 경향이 보다 심화되고 심지어는 권할만한 무엇으로 간주되었다는 점에서 17세기는 초상화의 역사에서 새로운 이정표를 형성한 시기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참고문헌

 

김세은, 「조선시대 眞殿 의례의 변화」, 진단학보 118, 2013

이성훈, 「조선 후기 사대부 초상화의 제작 및 봉안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9.

이종숙, 「숙종대 장녕전(長寧殿) 건립과 어진 봉안」, 미술사와 시각문화 27, 2021.

유재빈, 「조선 후기 어진 관계 의례 연구 : 의례를 통해 본 어진의 기능」, 미술사와 시각문화 10, 2011.

윤정, 「숙종 14년 太祖 影幀 模寫의 경위와 政界의 인식」, 한국사연구 141,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