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미술/나폴레옹 전쟁과 미술

아일라우 전투, 1807년

공식 2025. 5. 12. 12:17

앙투안 장 그로, <아일라우 전장을 방문한 나폴레옹>, 1808, 루브르 박물관.

 

아일라우 전투는 프랑스 제국에게 있어 불길한 징조였다. 러시아군의 후퇴과정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나폴레옹이 치렀던 과거의 전투와는 그 양상이 달랐다. 시야를 가리는 눈보라와 맞물려 프랑스 대육군은 막대한 출혈을 강요받았다. 비록 프랑스는 이 전투에서 적들을 물러나게 했지만 승리를 자축하기 힘들 만큼 큰 피해를 보았다. 사실 원정의 결과 자체는 나폴레옹으로서는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아일라우 전투 이후 계속된 원정에서 프랑스군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프로이센-러시아 동맹을 분쇄했다. 이후 체결된 틸지트 조약은 유럽의 평화와 동시에 패권국으로서 프랑스의 지위를 재확인해주었다. 분명 이 시기는 프랑스 제국에게 있어 영광의 순간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역사는 이것이 참혹한 유혈극의 전조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아일라우 전투에 대한 소식은 대육군의 공식 회보를 통해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회보는 전투가 종료되고 3일 뒤인 1807년 2월 9일에 작성되었고 2월 28일에 출판되었다. 문제는 그 짧은 기간 동안 국내에서 전투에 대한 온갖 안좋은 소문들이 떠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정부의 입장에서 전투의 결과만큼이나 끔찍한 것이었다. 당시 나폴레옹 정권은 경찰장관 푸셰의 지휘 하에서 프랑스 국내로 들어오는 정보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했다. 통제의 방법은 매우 다양했다. 단순하게는 정권에 반대하는 신문을 강제 폐간시키는 방법부터 보다 더 정교하게는 정부에 호의적인 편집부를 밀어주는 한편 반대 언론에는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는 등의 다양한 검열이 시행되었다. 아일라우 전투 직전 프랑스 정부는 직접적 통제보다는 각 신문사들을 감시하고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해 정보를 통제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런 방식은 적어도 겉으로는 정부의 직접적인 개입이 드러나지 않았기에 대중들 반발을 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또한 정복 전쟁으로 제국 영토가 비대해진 상황에서 새로 편입된 지역에 대한 효과적인 관리가 가능했다. 하지만 아일라우 전투 직후 프랑스, 특히 파리는 그러한 검열 정책이 전혀 먹혀들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출처를 통해 러시아군이 승리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정보는 승리 소식을 알리는 공식 회보가 발간되자 거짓 정보임이 드러났다. 하지만 논란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아일라우에서 프랑스 군이 입은 피해는 나폴레옹 정권을 뒷받침하던 군사적 업적을 의문시하기에 충분했다. 정부는 이러한 여론을 되돌리고자 이미지를 이용한 대규모의 프로파간다 행사들을 계획한다. 이전 글들에서 언급했듯이 나폴레옹은 이미지가 프로파간다의 효과적인 수단임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잘 이용하면 국내의 여러 현안들에 대한 여론을 정부 입맛에 맞게 돌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일라우 전투에 대한 논란이 한참이던 3월 25일 나폴레옹은 캉바세레에게 편지를 보내 아일라우 전투의 '승리'를 홍보할 전단지, 판화 등을 파리 전역에 대규모로 배포할 것을 명령한다. 그와 더불어 아일라우 전투를 기념할 대규모 회화 제작에도 착수하는데 앙투안 장 그로의 <아일라우 전장을 방문한 나폴레옹>는 이러한 배경 하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로베르 르페브르, <도미니크 비방 드농의 초상>, 1809, 드농 미술관.

 

과거 나자렛 전투의 전쟁화를 주문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일라우 전투 전쟁화는 특정 화가에게 주문을 맡기는 것이 아닌 공모전의 형식으로 작품을 수주했다. 이 업무는 프랑스 정부 내에서 미술 관련 업무를 전담하던 비방 드농의 주도 하에 진행되었다. 그는 당시 프랑스에서 논란의 중심이었던 아일라우 전투를 프랑스 제국의 승리로 홍보하고 싶어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작업 요구서에 작품에 들어가야 할 세부적인 디테일과 장면들을 세세하게 추가해 그림이 정부의 의도에 맞게 제작되도록 했다. 가령 드농은 자신이 직접 작품에 대한 드로잉을 제작해 그 드로잉의 구성에 맞춰 작품을 제작할 것을 요구했다. 장면 선택에 있어 나폴레옹이 전장을 방문해 부상자들을 돌보는 장면으로 제한했다. 또한 이때 나폴레옹은 병사들을 위무하는 자애로운 모습으로 그려져야 했다. 여기에 더해 그는 몇 가지 디테일을 추가했는데 죽은 말들과 대포의 잔해들 사이로 쌓여 있는 시체 더미들이 묘사되어야 하며 나폴레옹을 카이사르라고 부르며 충성을 맹세하는 리투아니아 병사의 모습을 작품 속에 담아야 했다.

 

예술가들의 입장에서 이런 조건들은 지나치게 가혹한 것이었다. 화가들이 보기에 드농이 제시한 사안들은 역사화 제작을 포기하라는 간접적인 압박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역사화는 사건에 대한 세부적인 장면을 마치 사진처럼 하나하나 기록하는 장르가 아닌 사건의 특정 장면을 통일성 있게 구성해 제시하는 장르였기 때문이다. 만약 드농의 요구사항을 모두 작품 속에 넣으면 그 작품은 결코 통일성 있는 역사화라고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화가들의 당혹감은 단지 드농의 세세한 요구사항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근본적인 문제는 드농이 이러한 요구사항을 통해 보는 작품이 아닌 읽는 작품을 그릴 것을 요구했다는 점이었다.

 

회화적 재현이 당연시되던 시대에 그림을 본다는 것은 작품이 내포한 서사를 유추하는 것과 동일한 행위였다. 살롱을 찾은 관객들은 작품을 감상할 때 그 속에 담긴 역사, 신화, 성경 속 이야기를 기대하고 작품을 '독해'한다. 하지만 이때 작품, 특히 역사화의 독해라고 하는 것은 해당 사건을 다루고 있는 역사서처럼 특정 사건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읽는 것이 아니고 아닌 화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특정한 사건을 바라보고 전체 이야기를 유추해내는 것이 가까웠다. 이것은 바꿔 말하면 소설책 한 권에 하나의 중심 이야기만이 들어가 있듯이 회화 작품 한 점에는 하나의 중심 이야기만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예를 들어 화가가 예수의 수난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면 그는 자신의 의도한 작품의 교훈적 주제에 걸맞게 예수의 수난에 관한 여러 에피소드 중 하나를 선택해 통일성 있게 보여주어야 했다. 만약 중세 예술 속 삽화에서 그러하듯이 한 화폭 속에 여러 중심 이야기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묘사될 경우 관객들은 작품을 독해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결론적으로 역사화는 그것이 이야기를 묘사함에 있어서 이야기를 하나하나 빠짐없이 기록하는 것이 아닌 이야기의 특정 부분을 시각화하는 것에 중점을 둔 장르였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 역사화, 특히 전쟁화 분야에 새로운 경향이 불어닥쳤다. 일전에 언급한 르죈의 작품 <마렝고 전투>처럼 작품의 현장감을 중요시하며 그 당시의 여러 사실들을 빠짐없이 기록하는 작품들이 등장한 것이다. 이렇듯 르포르타주의 성격에 가까운 전쟁화 제작은 물론 그가 처음 시도한 것은 아니었으며 이미 17-18세기의 전쟁화에서도 동일한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혁명 직후 동시대 사건을 역사화의 방식으로 담아내는 방식이 유행하기 시작하자 이러한 표현 방식들이 프랑스 예술계에 다시금 부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전쟁화를 그리는 두 가지 방식은 나폴레옹 정권 내내 양립하며 정권의 시각적 홍보물 제작에 동원되었다. 하지만 둘 사이의 균형은 1810년대를 전후로 하여 깨지게 된다. 원인은 정부의 지나친 검열에 있었다. 아일라우 전투를 기점으로 프랑스 정부의 검열은 간접적인 방식의 통제에서 강제적인 행정력의 집행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변화는 대대적인 신문사의 통폐합으로 이어졌는데 그 결과 1811년 말 파리에는 단 4개의 신문만이 유통되고 있을 정도였으며 이 신문들 조차도 정부가 운영하는 신문이거나 정부가 임명한 요인들이 편집권을 쥐고 있는 상태였다. 엄격한 통제는 예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났다. 나폴레옹이 군사적으로 점차 실패를 맛보자 정부가 주문하는 회화 작품에 대한 세세한 통제들이 점차 강화되기 시작했다. 아일라우 전투 전쟁화를 위한 공모전에서 드농의 요구서는 검열로 인해 예술가들이 사소한 디테일 하나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었던 상황을 예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프랑스 사회와 예술의 여러 제반조건들로 인해 역사화에 주력화던 화가들은 자신들이 탐탁해 마지않는 기록화 형식의 전쟁화를 그려야 했다. 그리고 그러한 요구는 드농의 부탁으로 마지못해 공모전에 참여했던 앙투안 장 그로의 작업에까지도 영향을 주었다.

 

<아일라우 전장을 방문한 나폴레옹>은 공개 당시 많은 논란을 낳았다. 작품을 관람한 관객들은 이 작품이 나폴레옹의 위대함을 보여주고자 하는 작품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했다. 부상자들과 의료진 사이를 가로지르는 나폴레옹의 모습은 그들을 손짓으로 치료하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으며 위로 치켜뜬 눈으로 인해 그가 천상에 있는 어떤 신성한 존재와 교감하고 있다는 인상까지 주었다. 또한 전경에 주로 나타나 있는 세부사항들도 드농의 요구를 충실하게 화폭으로 재현하고 있다. 중앙에 보이는 시체더미들과 오른쪽에 보이는 대포의 잔해 그리고 나폴레옹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리투아니아 병사의 모습까지 모두 화폭 속에서 적절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의 이런 디테일들이 관객들의 눈에는 무엇보다 거슬렸다. 과거 <1799년 3월 11일 역병이 유행한 자파를 방문한 보나파르트>를 그렸을 당시 비평가들이 지적했던 적나라한 부상자들의 묘사가 이번에도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과거의 작품보다 훨씬 더 격렬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한 비평가는 당시 전시장의 모습을 회상하며 "그 누구도 눈밭에 나뒹굴고 있는 시체들의 모습을 오랫동안 쳐다볼 수 없었다"라고 회고했다. 또 어떤 비평가는 "전시를 보러 온 한 여인이 작품을 봤다가 큰 충격에 휩싸여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라는 일화를 전했다. 비평가들은 이번에도 그로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과도한 폭력성을 지적했다. 특히나 전경에 위치한 시체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크고 과장되게 그려져 있어서 그러한 점이 더욱더 부각된다고 보았다. 심지어 어떤 비평가들은 그들의 모습이 "공포스럽고 부자연스럽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좌) <아일라우 전장을 방문한 나폴레옹> / (우) <1799년 3월 11일 역병이 유행한 자파를 방문한 보나파르트>

 

 

 

이러한 비평을 보았을 때 혹자는 그로의 작품이 과거에도 유사한 지적을 받았다는 점을 상기하며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시체들의 표현을 그것의 연장선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분석은 타당하지만 여기에 더해 당시 그로가 기록화적인 성격의 전쟁화를 그려야 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1799년 3월 11일 역병이 유행한 자파를 방문한 보나파르트>를 출품했을 당시 역병에 걸린 병사들의 모습은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으며 중심 주제를 희석시키는데 일조했다. 하지만 그것이 화면 중앙에 위치한 나폴레옹의 손짓을 완전히 잠식하지는 못했다. 더군다나 나폴레옹을 강조하는 빛의 처리와 건물을 이용한 시야의 제한은 명백히 나폴레옹을 중심 인물로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아일라우 전장을 방문한 나폴레옹>에서 이러한 세심한 처리는 사건의 세세한 기록이라는 요구서의 명령에 묵살되어 사라져 버렸다. 게다가 후경에 묘사되고 있는 여러 가지 사건들과 지형적인 특징, 랜드마크들(이러한 점들은 드농의 요구서에 모두 포함된 사안들이었다)은 자파를 그린 전작과 비교할 때 너무나도 많은 정보들을 담고 있어서 관객들에게 작품의 중심 주제에 대한 혼란을 초래할 우려가 있었다. 문제는 그가 근본적으로 역사화가였다는 점이다. 그것은 나폴레옹과 그 주변인물들이 명백히 역사화의 형식을 준수하고 있다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그로의 표현은 관객들의 입장에서 역사화와 기록화의 혼재라는 전례 없는 작품을 독해해야 한다는 문제로 이어졌다. 관객들은 나폴레옹의 모습을 통해 아일라우 전투 당시 나폴레옹의 자애로운 모습을 연상하며 작품의 주제를 이끌어냈을 것이다. 하지만 곧이어 충격적인 크기와 적나라한 표정으로 전경을 지배하고 있는 시체들의 모습과 화면의 절반을 차지하는 후경의 세세한 디테일의 홍수에 떠밀려 기록화의 관점에서 작품을 다시 읽어야 하는 모순을 맞닥트리게 된다. 이것은 마치 서예 작품의 획을 감상하는 동시에 그것의 기의를 동시에 독해해야 하는 일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결합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 전쟁화의 최종적인 국면에 해당한다. 비단 그로뿐만이 아니라 역사화가들은 정보의 지나친 통제로 자신들이 기록화를 그려야 함을 알았다. 하지만 실제 작업 과정에서 기존에 해왔던 역사화적인 문법, 관례들은 부지불식간에 화폭에 들어왔고 그 과정에서 여러 부자연스러운 결합을 낳았다.

 

이런 혼란은 어쩌면 나폴레옹 정권이 가진 숙명적인 운명을 암시하는 것일수도 있다. 1810년을 기점으로 예술가들은 그들이 봉사하고 있던 정권이 오랜 전쟁으로 혼란에 빠진 것과 마찬가지로 혼란의 도가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혼란은 황제의 위업을 찬양하는 국가적 예술 사업의 변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일례로 1800년 프랑스 정부는 소장품 구매에 110,000프랑을 사용했는데 1810년의 시점에는 그 5배에 해당하는 520,729프랑을 예술품 구매에 사용했다. 이러한 증가세가 결코 프랑스 제국의 부유함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것은 오히려 예술품이 프랑스 제국의 사정을 감추기 위한 겉치레로 이용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간접적인 지표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혼란은 결코 잠들지 않았다. 이런 혼란은 도리어 뒤따라오는 허무, 절망, 공포의 전령이 되었다. 그것은 1812년 한 젊은 작가가 출품한 작품을 통해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먼 훗날 정신착란에 걸린 노인을 그렸던 테오도르 제리코는 이러한 상황 하에서 예술가로의 첫 발을 내딛은 것이다.

 

테오도르 제리코, <돌격하는 황제근위대 엽기병>, 1812, 루브르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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