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셍크, 하멜 이후 100년만의 네덜란드 손님 - 3
뒤러가 이 지역을 거쳐간 이후 경제의 주도권은 점차 북유럽의 여러 도시, 국가들이 가져가게 되었다. 미술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으나 다만 양식적인 부분에서는 여전히 이탈리아가 그 경향을 선도했다는 점이 차이였다. 하지만 양식과 다르게 미술 시장 경향을 대표하는 것은 오늘날 네덜란드라 불리는 국가의 여러 도시들이었다. 17세기는 바야흐로 거장들의 시대라 할만 했다. 르네상스의 빛이 일련의 정치, 종교적인 혼란으로 잠시 꺼지는듯 했으나 상업적인 부를 바탕으로 북유럽에서 다시 살아난 것이다. 루벤스, 베르메르, 렘브란트, 할스 등 오늘날까지 이름이 알려진 거장들은 모두 17세기 그것도 북유럽 등지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었다. 특히 네덜란드는 당시 미술계의 거장들이라면 꼭 들러야 할 장소에 속했다. 식민지 사업의 결과로 말미암아 여러 이국적인 물품들이 암스테르담을 위시로 하는 네덜란드 인근 도시들로 집산되었고 이렇게 모인 물품들은 하역하기가 무섭게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다. 비단 이국적인 물품이 아니더라도 사치품 또한 네덜란드를 거쳐가지 않고서는 유통되기가 힘들었다. 네덜란드의 이러한 상황은 의문의 그림이 어디서 제작되었는지를 말해주는 단서가 된다. 미술품의 중심지이자 동양, 신대륙으로 들어오는 여러 이국적인 물품의 중심지. 유럽 내 경제의 선두를 달리고 있던 이곳에서부터 작품이 처음 제작되었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측이었다.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은 뒤러가 살았던 시대보다 더욱 더 경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작품은 이제 사치품일 뿐만 아니라 생활 필수품의 영역에 가깝게 자리잡았다. 비록 작품의 크기에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가난한 농부의 집에도, 도시의 일용 노동자들도 조그마한 소품 하나씩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네덜란드에서 미술가 길드에 가입되어 있었던 화가는 650명 내지 750명으로 추산된다. 이 수치는 인구 2~3천명당 한명 꼴로 화가가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뒤러가 활동했던 시기 이탈리아의 미술가가 310명에 불과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 수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놀라운 통계치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많은 화가들이 모두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들이라고 보는 것은 이 지역의 국제성을 지나치게 낮추어 평가하는 것이다. 물론 당시 네덜란드의 미술시장의 공급를 뒷받침 하는 많은 화가들은 네덜란드 출신이었다. 당장 위에서 언급된 17세기의 대가들이 대부분은 네덜란드 인근의 저지대 지방 출신인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비율은 절반을 조금 넘는 수치에 해당한다. 물론 절반 이상이 네덜란드 인이었다는 것은 이 시장을 떠받치는 주체가 네덜란드인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기에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이 조금 안되는 인원들 또한 당시 미술 시장의 큰 축이었다. 미리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선에서 온 의문의 그림을 그린 피터 셍크 또한 비네덜란드인이었다. 다만 그가 작품을 유통시키고 그것을 소비하는 중심지가 네덜란드, 정확히는 암스테르담을 포함한 북부 네덜란드의 도시들이였을 따름이다.
미술시장으로서의 네덜란드에 대한 의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의문의 그림에 대한 정체가 어느 정도 풀려 간 21세기초, 네덜란드 미술 시장에 대한 연구 또한 국내에 유입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미술의 주된 소비층이 누구인가에 대한 점이 논쟁사항으로 떠올랐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17세기 미술 시장은 위로는 부유한 자본가에서부터 아래로는 가난한 농민까지 모두 미술품을 사고 팔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사항이다. 이것은 관련 분야의 고전 중 하나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도 적시되어 있는 사항이었다. 하지만 실제 연구가 진행되면서 주된 소비층은 도시의 시민들이라는 연구결과가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 농민의 미술 수요를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양상을 살펴볼 때 미술시장은 80% 이상을 도시의 중산계급에 의존하고 있었다. 또한 이것은 여타 유럽의 다른 미술 시장과 비교해서도 큰 차이가 있었다.
17세기는 바야흐로 절대주의의 시기였다. 일찍이 절대주의를 종식시키고 입헌군주제로 나아갔던 영국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국가는 강력한 군주가 절대권을 행사하고 있는 시기였다. 18세기까지 이어지는 절대주의의 경향은 미술 시장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유럽의 미술 수요는 많은 경우 궁정이나 유력 귀족들의 요구로 채워지고 있었다. 바로크와 로코코 시기의 화려한 궁정 문화는 그러한 미술 수요를 대변해주는 한 예다. 하지만 이러한 수요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특히나 세기가 넘어갈수록 시민 계급이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하자 미술 시장은 활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은 자신의 후원자를 버리고 시장의 영역에서 시민들을 상대해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17세기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아직 그러한 위험이 표면화되지 않았다. 하지만 17세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많은 화가들이 자신의 경제적인 안전을 위해 선택을 해야할 시기가 오게된다. 이 선택의 순간에서 올바른 선택을 한 화가들은 오늘날까지도 회계장부를 비롯한 각종 문서에 남아 역사 속에 생존하였다. 하지만 궁정 취향에 부합하고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켰던 화가들은 다음 세기 말 혁명과 함께 동반된 거대한 변혁의 물결에 살아남지 못하게 된다.
조선으로 들어온 이 의문의 그림을 그렸던 피터 셍크란 사람도 이러한 17세기의 바람을 탄 미술가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오늘날조차도 미술품을 구매한다는 것이 꽤나 부담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생각할 때 당시를 살았던 이 화가는 꽤나 행운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가 살았던 시기는 동양으로의 창이 막열려 블루오션으로 남아있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 화가 또한 머나먼 동쪽 끝, 자신이 살던 나라보다 훨씬 거대한 미지의 동방 제국에 대해서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마르코 폴로가 원 제국을 다녀간지 수 백년이 흐른 시점, 대청으로 알려진 동아시아의 국가가 성장하는 네덜란드의 미술 시장의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 주목한 화가들은 한 둘이 아니었다. 이 화가들은 자신이 의도하던 의도하지 않던 유럽이라는 '신세계'를 동양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작품을 제작했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매년 7만점 정도의 작품이 시장에 쏟아져 나왔다. 그 중에서 원양 항해를 거쳐 동양에 도달하게 되는 작품은 아주 극소수 일것이다. 또 그렇게 도착한 소수의 작품들 중에서 중국보다 더 베일에 가려진 조선에까지 들어온 작품은 몇 작품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된다. 그렇다면 피터 셍크는 왜 이 작품을 만들었으며 어떻게 조선에까지 들어오게 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