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미술/피터 셍크, 하멜 이후 100년만의 네덜란드 손님

피터 셍크, 하멜 이후 100년만의 네덜란드 손님 - 4

공식 2021. 12. 4. 18:59

요하네스 베르메르, <잠든 여인>, 1656~1657,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평화로운 어느 날 한 여인이 식탁에 팔을 기대고 앉아 있다. 여인은 졸고 있었다. 얼굴에서 느껴지는 평온함은 그녀가 살던 도시의 시끌벅적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치 주변의 시간이 정지된듯 잠든 여인의 모습은 일상적인 한 때를 그린 장르화에서 느끼기 힘든 초월적인 힘이 있다. 이 그림을 그린 베르메르는 네덜란드의 도시 델프트에서 활동하던 화가였다. 그림 속 잠들어 있는 여인 또한 델프트, 그가 살던 집 근처에서 살고 있던 평범한 아낙이었을 것이다. 수로가 여기저기 엉켜 형성된 이 아름다운 도시가 의문의 그림을 추적하는데 중요한 이유는 그의 그림이 피터 셍크의 동판화가 떠난 여정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17세기 당시 델프트는 인구 천명당 1.6명 정도의 비율로 화가가 존재하고 있었다. 사실 이 수치는 주변의 인근도시들과 비슷한 수준이며 암스테르담보다는 약간 떨어지는 수준이다. 따라서 위의 사실만을 놓고 보았을 때 델프트라는 도시는 베르메르라는 이름을 빼면 이 여정의 기착지로서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작품 속 유난히 눈에 띄는 집기 하나를 본다면 그런 생각은 180도로 바뀔지 모른다. 

 

사실 이 그림은 실내를 배경으로 그린 수 많은 베르메르의 그림 중 하나일 뿐이다. 여타 다른 그림과 마찬가지로 이 그림도 다른 그림과 동일한 공간에서 제작되었을 것이다. 흰점을 찍어 하이라이트 시킨 표현법은 이 작품이 반론의 여지 없이 그의 작품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의문의 그림을 추적하는 여정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표현의 측면이 아닌 식탁에 올려진 접시다. 수줍은듯 다른 정물 사이에 빼꼼 모습을 드러낸 접시 하나는 분명 명청 시대 유행했던 청화백자였다. 코발트빛의 푸른색에 하얀색 바탕의 도자기는 동아시아의 백자 양식의 전형적인 특징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도자사의 전문가들은 이 그림을 유심히 관찰하고는 해당 도자기가 중국 장시성 북동부의 경덕진이라는 가마에서 제작된 도자기라는 것까지 알아맞췄다. 이미 당시에 도자사 분야에서는 해외로 수출되는 도자기들에 대한 연구가 어느 정도 진척되었고 이에 따라 학자들의 도자교류사에 대한 인식은 어느 정도 수준까지 올라와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전혀 다른 환경에서 생뚱맞은 위치에 도자기가 있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원생산지를 알아맞출 수 있었던 것이다. 

 

네덜란드에서 의문의 작품을 풀어가는 다음 단추는 여기에서부터 맞춰진다. 서양의 도시에 청화자기가 들어왔다면 동양의 도시에 서양의 동판화가 들어오는게 전혀 이상할게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청화자기가 들어온 루트를 통해서 동판화가 들어온 것이 아닐까? 17세기 델프트에는 동서 무역을 장악하던 동인도회사의 지부가 있었다. 동인도회사는 오늘날에는 그 경영방식이 구시대적이고 비효율적이라는 지적을 받지만 당시로서는 해외 무역의 선점 효과로 말미암아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동양에서 들어오는 자기를 비롯하여 은과 향신료등이 동인도회사의 손을 거쳐서 네덜란드로 모여들었다. 일종의 중개무역이라고 할 수 있는 동인도회사의 사업 방식은 네덜란드가 영국에게 자리를 내어주기까지 네덜란드의 재정적인 원천이 되었다. 그들이 내는 세금이 사실상 네덜란드의 세입에 중요한 한 축을 담당했으며 이들이 무너지자 네덜란드 연방 또한 휘청거렸다. 이것은 비단 국가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 화가들에게도 해당하는 것이었다. 17세기말 동인도회사가 영국 회사와 상사들과의 경쟁에서 사실상 도태되자 경제의 전반적인 침체가 일어났다. 이러한 연유로 미술시장 또한 얼어붙기 시작했고 미술가들 또한 일거리가 줄어들었다. 아무리 거장이라 하더라도 일 자체가 들어오면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위의 그림을 그린 베르메르를 포함하여 말년의 렘브란트, 프란츠 할스와 같은 거장들 또한 불행한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이것이 이 국가의 즉각적인 쇠퇴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네덜란드는 18세기까지 세계 경제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다만 그 때의 영향력은 영국의 보조를 맞추는 정도의 수준에 불과했을 따름이다. 미술의 경우에는 그래도 꾸준히 동방으로 수출 활로를 열어갔다. 애초에 미술품 자체가 동방으로 수출되는 일은 거의 없었기에 경제가 침체된다 하더라도 이 쪽 분야의 수요와 공급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미술 시장에 투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내수시장과 유럽 내 시장에만 해당되는 사항이었다. 미술품, 특히 회화 작품이 동양으로 가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선교 목적으로 성경의 구절을 그림으로 그린 삽화도가 이에 해당했다. 다른 하나는 순전히 이국 취향을 충족시켜주기 위한 목적으로 조선에 온 의문의 그림이 바로 이것이 해당했다.

 

따라서 네덜란드에서 의문의 그림에 대한 단서를 얻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동인도회사의 미술품 거래 품목을 모두 뒤져서 해당하는 그림의 운송, 거래 기록을 찾는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이 시기 거래 기록은 후대의 학자들이 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많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자료가 많다는 것은 역으로 자료들의 전체적인 흐름을 재구성하는 것이 꽤나 어렵다는 뜻이기도 했다. 실제로 같은 숫자를 다룬 회계장부라 하더라도 21세기의 그것과 17세기의 그것은 방식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다. 상인들은 보안의 이유이던 익숙함의 이유이던 자신의 방식대로 장부를 작성했고 이런 장부는 본인이나 관련된 사업 파트너가 아니면 도저히 독해가 불가능한 것들도 많았다. 문서보관고에 저장되어서 학자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수 많은 문서들이 바로 이러한 경우에 해당했다. 아날 학파의 역사학자였던 페르낭 브로델의 경우에도 이에 관한 언급을 한 적 있는데 심지어 그는 "이 시기의 회계 장부와 거래 내역을 온전히 독해해내고 자신의 연구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세대에 한 두명 정도에 불과하다"라고 했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을 비추어볼 때 아무리 문서가 많더라도 그것을 통해서 의미있는 결론을 이끌어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불행중 다행으로 시각문화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작품이 어떤 것이었는지만을 아는것으로도 충분했다. 다시 말해 그들의 관심사는 돈의 흐름이 아니라 작품이 어디로 갔는지, 그리고 누가 제작했는지의 여부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얼마에 거래되었고 수수료는 얼마를 받아갔는지는 이후의 학자들이 해야할 몫이었다.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학자들은 동판화의 제작자 이름을 알아냈는데 그것이 바로 피터 셍크(Pieter Schenk)였다. 물론 학자들이 조선에 온 동판화의 제작자가 피터 셍크라는 것을 알아낸 것은 네덜란드가 아닌 독일에서였다. 후술하겠지만 피터 셍크의 작품들은 네덜란드 일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독일 영토 내의 도시들에서도 유통되고 있었다. 다만 그는 비단 독일 내에서만 활동에서 멈추지 않고 저지대 국가에서도 광범위하게 주문을 받아서 활동했던 사람이었다. 당시의 동판화가들은 으레 출판과 동판화 작업을 병행했기에 여러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주문을 받고 일에 착수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암스테르담과 같은 북부 도시들에서 그의 판화를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피터 셍크가 제작한 동판화. 그는 당대에 유명한 동판화가였지만 17세기의 거장들 앞에서 그의 명성은 미명에 불과했다

천신만고 끝에 피터 셍크라는 이름을 찾아내었지만 난관은 또 있었다. 피터 셍크? 많은 학자들은 이 이름을 동판화의 정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처음 들었을 공산이 컷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유럽의 미술사에서도 2류, 3류 작가군 속에 있어 그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그마저도 언급되지 않거나 참고자료 속에 짧막하게 들어가 있을 뿐이었다.

 

한국에서 한국미술사를 전공하는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생소해 하는 것은 당연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17세기는 엄연히 렘브란트의 시대고 루벤스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조금 더 공부를 한다면 풍속화로 유명한 페터 데 호흐나 풍경화의 거장 얀 반 호이헨, 포르첼리스 정도의 작가들이 알려졌을 뿐 명단 어디에도 피터 셍크는 없었다. 하지만 이 작가는 갑자기 20세기에 쾌쾌한 고서점에서(동판화의 작가가 피터 셍크라는 것 알아낸 연구자는 이 사실을 독일의 한 고서점에서 알아냈다) 툭 튀어나와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다. 한 마디로 말해 이 작가는 당대의 연구자들에게 지식 범위 바깥의 인물이었다. 하지만 당대인들이 그를 잘 모른다고 해서 그것이 당대에도 유효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17세기의 천재들에 가려져서 빛을 보지 못한 또 다른 천재는 아니었다. 그 또한 당대에는 유명한 화가였고 심지어 많은 동판화들을 궁정과 시청 심지어 동양에 수출하기까지 했다. 피터 셍크는 단지 오늘날의 역사학자들이 발견하지 못한 원석일 뿐이었다. 그만큼 피터 솅크는 미지의 인물이었고 따라서 밝혀야할 점이 많은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