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셍크, 하멜 이후 100년만의 네덜란드 손님 - 5
독일 서부의 한 도시, 본디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였던 엘버펠트는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서쪽의 외곽에 존재하는 도시에 불과하다. 그 위치를 보았을 때 서부의 주요 도시인 쾰른의 북쪽에 있었고 북부 해안지대의 한자동맹 도시들과 가까웠다는 점을 빼면 특별할 것이 없는 도시였다. 게다가 신성로마제국의 입장에서 서부의 도시들은 여러모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힘든 곳 중 하나였다. 플랑드르를 포함하는 저지대에서는 끊임없이 소요가 일어났고 프랑스는 호시탐탐 이 지역을 노리려 하고 있었다. 특히 15,16세기를 전후하여 독일 서부와 북부의 도시들은 그야말로 혼돈의 연속이었다. 외부의 위협과 제국 내부의 위협이 병존해 문제는 산더미처럼 불어났고 거기에 더해진 신대륙의 통치 문제는 서부의 문제를 처리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심지어 이런 위기가 지나치게 오랫동안 지속된 나머지 도시의 주요 계층인 가난한 도시노동자들과 이단주의자들이 결합하는 문제가 하찮은 것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신성로마제국에게 있어 독일 서부의 입지란 이렇게 불안하고 또 빈약했다.
하지만 유럽 전체의 입장에서 독일 서부의 도시는 여러모로 의미 있는 역사적인 변동을 만들어 나갔다. 유럽 전체의 지리적 위치를 보았을 때 엘버펠트를 포함한 이 지역의 도시들은 시대를 앞서갈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17세기에 들어서는 네덜란드의 강한 영향으로 말미암아 이 지역에 상업적인 부가 흘러들어왔고 그 결과는 독일 재정 가문들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문화적인 영역에서 이 지역에서 일어났던 강력한 이단 운동은 결국 16세기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나타났다. 물론 이런 운동도 곧 진압되고 오직 비텐베르크의 한 수도사가 개창한 새로운 이단 운동만이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독일 서부의 경제적인 측면이다. 특히 경제 활동과 관련한 인적 이동은 이 지역 사람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오늘날에는 그렇지 않지만 17세기 독일 서부에 태어났던 도시인이라면 네덜란드로 가서 일하는 것을 선택지 중 하나로 여겼다. 그곳에는 세계의 모든 상품이 들어오고 나갔으며 크레딧과 현금의 유입 또한 다른 도시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부에 이끌린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네덜란드로 이주했고 그렇게 17세기의 황금세기가 완성되었다. 네덜란드로 향하는 대열의 한 가운데 속에 피터 솅크 또한 있었다. 그는 엘버펠트 출신의 독일인이었다. 1660년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 부터 출판과 미술시장에 몸을 담으며 기술을 익혔다. 미술과 출판은 일찍이 네덜란드에서 많이 발달했고 그것은 이 나라가 쇠락의 길을 걷고 있던 17세기 후반에도 그러했다. 피터 솅크에게 있어 네덜란드 행을 마다할 이유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여느 네덜란드 인들 몫지 않게 성공을 거두며 독일에도 제작소를 확장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당시 조합에 등록된 미술 관련 종사자의 50퍼센트가 네덜란드와 저지대 출신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아주 이례적인 경우에 해당했다.
그가 동판화 업계에 뛰어들도록 지도했던 제라드 발렉은 일찌감치 그의 능력을 알아보았던것 같다. 그의 공방에서 도제로 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출판사의 공동 운영을 하는 위치로 올라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발렉은 그의 누이동생과 피터 솅크를 이어주기도 했다. 이렇게 끈끈한 관계 속에서 그는 동판화가이자 출판업자로 명성을 쌓아갔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동판화 제작에 뛰어든 것은 아니다. 그가 처음에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출판과 인쇄 관련 분야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인쇄업은 아직 15세기의 기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수준이었다. 뒤러가 누렸던 출판 시장의 호사는 17세기에 가서도 그대로였던 것이다. 200년이 훨씬 넘은 시점에도 인쇄업은 장인의 영역이었다. 그것은 아직까지 예술가와는 한참 떨어진 기술의 영역 속에 존재했다. 하지만 이 시기 출판업자는 으레 동판화 작업에 관여를 할 수 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다. 우선 기본적인 공정 자체가 서로 비슷했고 책을 찍는 과정에서도 삽화를 포함하는 경우가 많아 동판화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했다. 또 당시 네덜란드에서 크게 유행하던 지도제작술이 그의 동판화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본격적으로 동판화 분야에 손대개 된것은 한 출판사에 일하면서부터다. 이 시기 인쇄업자들은 으레 자신의 공방을 따로 운영하면서 다른 상사나 회사에 취직을 하기도 했기에 이런 그의 행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일찍히 출판업 분야의 일을 하면서 동판화에 관심을 가졌던 피터 솅크는 출판사에서 일하게 된 이후로 동판화 작업에 열을 올리게 된다. 그가 당시에 제작했던 동판화의 분야는 다양했다. 단순한 인물풍속도부터 시작하여 초상화, 신화화, 기독교화 등 다양한 장르의 동판화를 생산했다. 이렇게 제작한 작품들 중에는 당연히 17세기 유행이었던 풍경화도 있었다. 조선에 온 의문의 그림은 그렇게 제작된 수 많은 풍경화 중 하나다.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들은 초기에는 귀족들의 수요를 맞추어 제작되었다. 시간이 오래걸리고 보관이 불편했던 유화 대신 귀족들은 값싸고 빠르게 제작할 수 있는 동판화를 선호했던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수 많은 동판화들은 오늘날까지도 보존되어 있는데 그 필치가 당대 최고의 동판 초상화가라는 명성이 부끄럽지 않은 정도로 섬세하다.
동판초상화의 성공이후 그는 성공에 안주하기보다 새로운 도전을 시도 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7세기의 수요에 맞추어 그는 동업자인 발렉과 함께 풍경화와 지도 제작에도 관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풍경화와 지도제작 작업은 1680년대부터 1710년대까지 피터 셍크를 유력 가문으로 만드는데 일조했다. 사실상 이 시기 출판, 삽화 분야에서 그를 따라올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당대의 지식인들이 그에게 의뢰를 맡겼을 뿐만아니라 국가에서도 일을 수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제작된 풍경화 709점, 초상화 428점을 포함한 3천여점의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보존되어 당시 문화를 알려주는 귀중한 사료로 연구되고 있다.
하지만 단지 여기서 그의 커리어가 끝났다면 의문의 그림은 조선에까지 당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지도제작 작업을 하면서 새로운 '시장'인 중국에 대해서 눈 뜨게 되었다. 그가 이렇게 중국에 대해 인식하게 된것은 어찌보면 큰 행운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동판화를 자신의 작품 판매에 효과적으로 활용했던 15세기의 뒤러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업 확장이지 않는가? 암스테르담을 비롯한 서유럽 곳곳에서 운영되는 공방을 통해 피터 솅크는 저 멀리 미지의 땅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물론 그가 중국에 작품을 판다는 것은 결코 손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살았던 17세기 후반에 가면 대중국무역은 더 이상 네덜란드의 영역이 아니었다.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네덜란드인들은 마닐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여러 창구를 이용할 수 없었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네덜란드가 동남아시아 무역 비중을 확대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품 자체에는 국경이 없다는 사실은 그 시절에도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굳이 네덜란드 상선이 아니더라도 다른 나라, 예컨대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의 상선에 물건을 싣고 대금만 치르면 그만이었다. 마침 암스테르담은 당시로서는 네덜란드의 고유한 도시라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국제화된 상태였다. 그가 필요한 것은 단지 선장에게 쥐어줄 은화 몇덩이와 독한 술뿐이었다. 물론 그가 정확히 중국의 고객들을 노리고 작품을 제작했을 턱이 없다. 그 시기만 하더라도 아직 아메리카 대륙의 오대호가 중국까지 이어졌을 거리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던 시대였다. 그만큼 정보는 부족했고 따라서 상업적 활로를 트기는 더더욱 힘들었다. 게다가 피터 셍크가 한참 활동하던 시기는 중국에 대혼란이 찾아온 시기였다. 1644년 명나라가 망한 이후 청나라가 들어섰지만 이 신생국가는 금방 안정을 찾지 못했다. 특히 유럽인들의 주된 교역 무대였던 남중국지역은 연이어 들어선 한족 망명 정부와 군부의 반란으로 혼란이 가중되던 시기였다. 또한 이 시기와 맞물려 중국과 가장 가까운 유럽인의 피난처인 마카오와 마닐라도 이주해온 중국인들의 소요로 치안이 불안해진 상태였다.
결론적으로, 피터 솅크는 단지 막연하게 동방의 먼나라에 작품을 팔 생각으로 무엇을 만들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작품이 들어온 경로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이 부분은 아직까지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가 정말로 중국에 작품을 팔 생각이었을까? 물론 충분히 가능한 생각이다. 이미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서양의 기법으로 그려진 성화를 소개해준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한 기록에 따르면 17세기 중반 예수회를 포함한 기타 서양 문물의 영향으로 말이암아 서학을 연구하는 진사들의 수가 500명에 육박했다고 한다. 이 수치가 단지 마테오 리치와 서광계의 문하에서 있었던 지식인들의 숫자를 단순 합산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실제 서학에 관심을 가지고 서양의 미술에 관심을 가졌던 수는 그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인구가 많은 중국에서 그 정도면 충분히 시장이 형성될 수 있을터였다. 때마침 명말의 상업 상황은 그 어떤 한족왕조보다 확장되어 있는 상태였다. 특히 출판 분야의 성장은 괄목할 정도였는데 몇몇 학자들은 이 시기가 잡지와 같은 출판물의 보급으로 대중문화망이 형성된 시기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피터 솅크가 해야할 일은 단지 이국적인 서양의 물품을 상해나 광동의 시장 한 가운데에 던져놓기만 하면 되는것이었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시기 교류 양상에서 미술품이라는 것이 선교 목적하에 넘어간 것이 많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중국의 서양화 수용에 영향을 준 많은 작품들은 종교화이거나 종교에 관여한 사람들이 제작한 그림들이다. 마테오 리치, 페르비스트, 아담 샬, 카스틸리오네 모두가 선교사였고 이후에도 이들 선교사가 중국의 서양화 수용을 주도했다. 눈치빠른 장사꾼이기도 했던 피터 솅크가 이점을 몰랐을리 없다. 또한 그는 유년시절을 가톨릭의 영향이 강한 신성로마제국에서 살았던 사람이다. 성화라는 것이 자신이 제작하던 풍경화와 전혀 다른 성격의 작품임을 몰랐을리 없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에 온 의문의 작품을 단지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곤란하다. 피터 셍크의 작품이 이곳에 오게 된 것은 미술을 대하는 마지막 요소인 이국 취향이라는 것이 결정적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당시 중국을 비롯해 동아시아 3국에서는 유럽에서 컬렉터라 불리는 수장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 수집가들은 다양한 신분이었지만 주로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거가 진사시험만 합격해 중앙정계로 진출하지 못한 독서인 계층, 부유한 상인들이나 전문직 계층인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진귀한 미술품과 골동품들을 열정적으로 사모았고 그것을 주변 지식인들과 공유하며 작품을 감상하고 평가했다. 그리고 이런 양상은 중국, 특히 그 중에서도 양자강 하류의 도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피터 셍크의 동판화는 이런 수집욕에 의해 중국으로 간 소수의 서양화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소수라는 것은 17세기 네덜란드의 조합에서 생산했던 900만점의 동판화와 비교했을 때 소수였다는 것이다.
중국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 피터 솅크의 동판화는 새로운 고객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고객이 누가 될지는 피터 솅크도 알 수 없었다. 사실 그가 이 동판화를 중요하게 생각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이미 대금을 치뤘고 그에 마땅한 가격 협상도 끝난 상태였다. 그에게 있어 이 동판화는 그의 일생 동안 찍었던 수 많은 동판화 중 한 점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금방 잊혀졌을 것이다. 심지어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피터 솅크의 작품 목록에는 조선에 온 의문의 그림이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그렇게 찍어낸 동판화가 역으로 역사 속에 잊혀진 예술가 한 명을 동서교류사의 무대 한가운데로 끄집어냈다. 그리고 이 발견은 피터 솅크 본인의 세계관에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중국보다 더 먼 동쪽의 나라 조선으로부터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