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셍크, 하멜 이후 100년만의 네덜란드 손님 - 8
그림을 보면 천주는 어린아이이고 천모라 하는 부인이 안고 있다. 이 그림은 동판화 위에 그림물감을 칠한 것인데 그 용모는 살아 있고 동체나 팔과 손은 마치 화면에서 쑥 내밀 것만 같다. 정면을 보고 있는 얼굴은 요철이 있고 진짜 인간과 다를 바 없다. - 고기원 <객좌췌어>
마태오 리치는 문을 열었다. 2층에 위치한 자신의 사저에서 그는 북경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북경의 날씨는 으레 그렇듯이 덥고 건조했다. 흙먼지가 잔뜩 낀 북경의 하늘은 자신이 처음 중국 땅을 밟았던 그때와는 전혀 다른 풍경을 연출했다. 처음 그가 발을 딛은 광주 지역의 습하고 청명한 날씨가 여기에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날씨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사실 이런 환경은 하느님이 신심 깊은 전도사에게 내려준 수난과 같은 것이었으니 되려 좋은 징조로 볼 수 있었다. 담장 너머에 자신을 만나려고 옹기종기 모여있는 사람들이 그 증거다. 복장을 보건데 과거를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과거철만 되면 마태오 리치의 집 주변에는 그의 놀라운 기억술을 배우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세간에는 이미 그를 한번에 글자 수백자를 외워버리는 기이한 능력의 소유자로 알려졌다. 이런 소문은 마태오 리치 본인이 의도적으로 퍼트린 감도 없지 않아 있었다. 처음에 마태오 리치는 이 과도한 소문에 당황했지만 얼마안가 이것을 자신의 포교에 이용하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다. 이렇게 인식이 바뀐 이후에는 다소 과장된 소문이 북경 지식인 계층 사이에 떠돌아도 그걸 막기는 커녕 방조했다. 아침부터 대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중국인들은 바로 그런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평소 같으면 그는 자신의 기억술을 넌지시 알려주며 그리스도교의 진귀한 물건을 같이 소개시켜 주었을 것이다. 서양에서 온 프리즘이라던가 성화같은 것들이 바로 그런 것인데 이런 물건들은 거의 예외 없이 지식인들의 관심을 샀다.
하지만 오늘 그의 몸 상태는 예전과 같지 않았다. 오랜 해외 생활로 다져진 몸이었지만 세월은 이 강건한 전교사를 초로의 노인으로 바꾸어 놓았다. 난창에 있었을 시절 다쳤던 다리가 욱씬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날 오전 불안한 느낌이 현실이 되었다. 마태오 리치가 몸져 누운 것이다. 사경을 헤매는 늙은 전도사 주위로 그가 개종시킨 중국인 수사들, 저 멀리 유럽에서 온 마태오 리치의 예수회 동료들이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이미 유언을 남기기에는 훨씬 늦어버린 시간. 마태오 리치의 머리 속에는 중국에서의 30여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는 자신의 기억술을 중국인들에게 소개하면서 항상 궁전의 비유를 빼놓지 않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기억한다는 것은 머리 속에 크기가 가늠이 안될 정도로 거대한 궁전 하나를 짓고 그 안에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 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배치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오래 전부터 기독교 세계에 내려오던 기억술의 일종으로 오늘날로 치자면 이미지 연상법과 비슷한 것이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마태오 리치는 죽기 전 마지막으로 그 궁전의 문을 열었다.
선교사답게 이미지로 변한 그의 기억은 대부분 성경에 관련된 지식들이었다 . 좌측 회랑 끝에 여인과 천사의 모습이 보인다. 수태고지라고 부르는 이 장면은 마태오 리치의 기억 한 켠에서 중국인들과의 첫 만남을 기억할 때 쓰는 이미지였다. 하지만 이 이미지는 일반적인 수태고지의 이미지와는 달랐다. 중국에 온 마태오 리치는 효과적인 포교 활동을 위해 성경 내용을 담은 그림 책을 몇 점 가져왔다. 이후 그가 중국에서 어느 정도 정착에 성공하자 이런 그림들을 지식인들에게 소개시켰다. 하지만 유럽에서 통용되는 문화적인 지식이 없이 성화를 소개시켜주었다가는 쉽게 반발할 것이 뻔했다. 때문에 마태오 리치는 성경에 중국적인 색채를 입혀 이질적인 문화에 대한 적대감을 최대한 줄여보려고 했다.
그가 처음으로 활용했던 그림은 예수회 본부의 영성신학자였던 제롬 나달이 총괄 제작한 <Evagelicae Historiae Imagines>라는 화보집이었다. 이탈리아의 화가인 베르나르디노 파세리와 벨기에의 화가 마르텐 드 보스가 그림을 그렸으며 해설은 나달 본인이 직접 추가하였다. 비록 화보집 자체는 나달이 죽은 뒤인 1593년에 출판되었지만 성경에 대한 해설은 전적으로 그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었다. 이 화보집은 애초에 묵상을 위한 목적으로 제작되었고 이를 위해서 그림과 해설을 함께 곁들였다.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초기에는 수사들의 수련을 위해 제작되었으나 예수의 생애와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모두 집대성한 화집이었기에 중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그리스도교 포교를 위해 널리 사용되었다. 1605년 마태오 리치는 처음 이 그림을 접하자마자 바로 번역 작업에 돌입했다. 그 결과 1605년 말경에는 이미 남경 등지에서 이 그림이 유포되었다. 이후 그림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중국 판화집인 <정씨묵원>에 소개되면서부터다. 마태오 리치는 1606년 일본에서 건너온 목판화 1점과 유럽에서 건너온 판화를 묶어 정대약(桯大約)이라는 인물에게 주었는데 이 인물이 다름아닌 <정씨묵원>의 편집자였던 것이다. 성화가 중국인의 판화집에 실렸다는 것은 여러모로 큰 의미가 있다. 우선 서양인이 아닌 중국인이 성화를 유포했다는 점에서 성화가 중국 사회 내로 확산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실제로 명말청초에 있었던 서양화 경향의 회화들은 으레 이런 판화집을 통해서 유포되었다. 그리고 이런 성화의 유포는 자연스럽게 그리스도교의 확산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번째 요소의 경우 18세기에 들어서면 그 의미가 퇴색한다. 청나라의 의도적인 기독교 박해와 문화적인 이질감이 그리스도교 확산에 큰 장애물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첫 번째 요소는 중국 사회에 계속 영향을 끼쳤고 중국인 지식인뿐만 아니라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성화가 전해지는데 큰 역할을 했다. 당장 중국의 판화집을 통해서 그림을 배웠던 사대부들은 그 안에 삽입되어 있었던 성화를 통해 처음으로 서양과 마주하게 되었다. 물론 이런 간접적인 전파 이외에도 직접적으로 서양의 물건이 조선인에게 전해진 경우도 있었다. 시기는 다소 늦지만 연암 박지원이 대표적인 예인데, 그의 경우 청나라 연행길 와중에 서양의 성화를 접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런 것이 천주교당을 보고 남긴 기록과 양화(洋畵)편에 짧막하게 전하고 있다.
서방의 모든 나라가 이 교를 믿은 지 천여년이 되었으므로 나라가 아주 편안해졌답니다. 그러나 그 말이 너무 과장스럽고 황당한 편이이서 중국 사람은 믿는 이가 없답니다. - 박지원 <열하일기> 야소교(耶蘇敎)항목에서 일부 편집해 인용
성화의 기법들과 생경한 모티프는 마태오 리치가 죽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번안되어 유포되었다. 특히 이후 들어온 선교사들은 이미지를 통한 포교 전략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그 결과 청나라 궁정에까지 들어가 궁정화가로 활약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한다. 또한 마태오 리치가 들여온 성화는 궁정뿐만 아니라 중국의 예술계에도 큰 파장을 미쳤다. 당장 명나라 말기, 청나라 초기에 활동했던 화가들 중 서양화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특히 강소성 일대에서 활약했던 강남 출신 화가들의 경우 서양화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명암법이나 원근법 표현이 곳곳에서 나타나게 된다.
활동지역 | 인물화 | 산수화 |
남경(南京) | 정운붕(1547 ~ 1628) 증경(1564 ~ 1647)과 파신파 화가들 오빈(1573 ~ 1620) |
오빈(좌측의 오빈과 동일인물) |
송강(松江) | 동기창(1555 ~ 1636) 과 화정파 화가들 남영(1585 ~ 16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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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흥(嘉興) | 항성모(1597 ~ 1658) | |
소주(蘇州) | 장굉(1577 ~ 1652) 소미(1592 ~ 1642) 성무엽(1594 ~ 16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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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법을 활용한 중국 화가들 일람. 박효은, <17세기 중국 회화에 미친 서양의 영향>, <<동아시아 회화교류사>>, 사회평론, 2011. p.60 인용. 주로 마태오 리치가 다녀갔던 중국 강남 지역 출신 화가들이 대다수를 이룬다. 인물화에서는 <정씨묵원>의 삽화를 담당하게 될 정운붕이 있고 파신파 화가들 또한 인물 묘사에 있어 서양화법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산수화 분야에 있어서도 소주성 출신들의 화가들과 송강파로 분류되는 송강 지역의 화가들이 서양화법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증경의 서양화법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으나 송강파 화가들, 특히 동기창의 서양화법의 영향과 관련해서는 영향을 받았다는 서구권의 시각과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중국학계의 시각이 대립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연구자들마다 의견 차이가 존재하는데 서양 회화의 적극적인 영향을 강조하는 연구자보다는 동양화 양식과 서양화 양식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의견과 서양화의 영향을 부정하는 의견이 많다. |
물론 이것이 전적으로 마태오 리치의 공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의 사후에도 꾸준히 서양화법의 그림을 수용했던 중국인의 공일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라면 이후 중국으로 들어온 선교사들의 공일수도 있다. 하지만 후대의 사람들이 뿌리 내릴 수 있는 터전을 제공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가 전해준 서양화법의 충격은 오늘날까지도 광범위하게 연구되는 동서교류사의 한 맥을 형성했다. 특히 의문의 그림을 추적하는 과정 속에서 마태오 리치의 존재는 일종의 등대와도 같은 역할을 했다. 그가 처음 성화를 중국인에게 전파하지 않았더라면 피터 셍크의 그림은 중국 지식인 계층 사이를 이리저리 떠돌다 소리소문 없이 사라질 그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이 의문의 그림에게 기회를 주었고 그 기회의 바람을 타고 한 조선인에게 전해지게 된 것이다. 조선인은 추측컨대 청나라의 수도 연경에서 이 그림을 입수했을 가능성이 크다. 청나라가 인조를 굴복시킨 이후 조선은 주기적으로 청나라에 사행단을 꾸려 보내야 했고 이 과정에서 단순히 사신단만 가는 것이 아니라 상인들과 통역관들이 동행했다. 이렇게 조용한 은자의 나라 조선에 뚫린 작은 창구로 피터 셍크의 그림이 들어온 것이다.
마태오 리치는 자신의 궁전에 담긴 온갖 이질적인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그 중에는 자신이 아직까지 이해하지 못한 것들도 많고 또 이해는 했지만 심정적으로 도저히 공감이 가지 않는 요컨대 불교와 같은 것들도 있다. 하지만 죽음이 목전에 와있는 지금 이 모든것을 두고 떠나가야 한다. 그의 머리 속에 갑자기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이란 개념이 떠오른다. 중국에 온 이후 그가 가장 경계했던 것이 불교의 우상숭배였건만 생애의 마지막에 갑자기 불교의 개념이 떠오른 것이다. 하지만 결국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그리스도교나 불교 매한가지 아니던가! 중요한 것은 이제 그가 생애의 마지막이고 모든 것을 내려 놓은 채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 뿐이다. 물론 미련이 없을리가 없다. 그가 마음 속에 품었던 꿈, 만력제를 개종시키겠다는 꿈을 이루지는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온 이후 그리스도교를 전파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기에 자신이 걸어온 길에 후회는 없었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궁전에 빛이 들어온다. 마태오 리치는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