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셍크, 하멜 이후 100년만의 네덜란드 손님 - 9


조선에 본격적으로 서양화라는 것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중국보다 약 한 세기가 늦은 17세기 초반이었다. 중국에서는 이미 한바탕 서양화법에 대한 논의가 끝나고 몇몇 지식인들에게는 나름 익숙한 무엇으로 자리잡은 그 때 조선인들에게 서양화가 전해진 것이다. 가장 이른 시기 기록은 아마도 소현세자의 기록일 것이다. 비공식적으로는 아마 중국을 다녀갔던 많은 지식인들이 서양의 문물에 대해서 알고 있었겠지만 1645년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돌아갈 때 당시 선교사로 있던 아담 샬로부터 <천주상> 한폭을 받아왔다는 것이 최초의 공식 기록인 것은 변함이 없다. 물론 이 최초의 접촉은 소현세자가 정확히 3개월 뒤 급사하면서 물거품이 되고만다. 이후 서양화가 조선에 유입되기 시작한 것은 청나라의 수도 연경에 사행단을 보내면서부터 였다. 이 시기 중국 내에서는 이미 한역된 서양의 책들이 유통되고 있었기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 책들을 통해 처음 서양의 문물을 접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출판물의 유포는 서양화의 발자취를 추적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후 중국과 조선간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출판물의 유통도 활발해지고 그로 인해 굳이 사행단으로 청나라에 가지 않아도 서양의 문물을 접할 수 있는 창구가 열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성호 이익이나 다산 정약용 같은 인물들도 바로 이 경로를 통해서 서양화에 대한 정보를 접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실 사행단으로 가는 인원은 매우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조선의 지식인이 일반적으로 해외의 문물을 접할 수 있는 기회는 출판물을 통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어떤 경로로 서양화를 접했든 그 반응은 일관된 모습이었다. 경이로움과 기괴함. 후대의 역사학자들이 실학이라는 이름 아래 분류하는 지식인이나 사행단으로 따라가 서양화를 직접 보았던 사람들의 기록 모두가 이 점에 대해서 한결같았다. 그것은 중국의 지식인들이 처음 마태오 리치가 가져온 성화를 보았을 때 했던 반응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성호 이익(李瀷 1681 ~ 1763)의 경우 자신의 책 <성호사설>에서
처음에 한 눈을 감고 다른 한 눈으로 오랫동안 주시하면 궁전의 지붕의 모퉁이와 담이 모두 실제 형태대로 튀어나온다.
성호사설 <화상요돌> 중 일부 발췌
라고 적었다. 이익의 화상요돌에는 당대인들의 서양화에 인식의 단면을 보여주어 흥미로운 점들이 많다. 이익의 경우에만 한정해서 말하면 그는 명암법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지만 기하학적 지식이 요구되는 원근법에 대해서는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기하원본>의 서문을 보니 "여기에 눈으로 원근, 정사(正邪- 바르고 기울어짐), 고하의 차이를 살펴, 물상에 빛을 쬐어 평평한 판 위에 원통이나 모난 기둥의 부피를 표현하고 ...(중략)... 원을 그려 공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은 상의 오목하게 들어간 곳과 튀어나온 곳을 표현하고 집의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을 표현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근데 크게 보고 멀리 본다는 것이 무슨 방법으로 하는지 모르겠다.
성호사설 <화상요돌> 중 일부 발췌
이익은 서양화 그 자체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논평을 하지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그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부분이 성호사설 <논화형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글에서 이익은 소동파의 화평을 논하면서 사실적 표현의 여부가 곧 정신의 표현 여부와 결부된다는 '이형사신(以形寫神)'을 주장하는데 당대 서양화가 사실적 묘사로 지식인들의 이목을 끌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서양화에 대한 이익의 생각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닐까 생각한다.
정신은 형체 안에 있으니 형체가 닮게 되지 않으면 그 정신이 어떻게 전달될 수 있겠는가? (소식이) 이와 같이 말한 것은 대개 형체는 닮었지만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거나 바로 앞의 사물을 광채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나라면 "형체가 닮지 않았는데 어찌 정신이 전달되며 다른 사물이 어찌 그 사물의 광채를 얻겠는가라고 말하겠다.
성호사설 <논화형사> 중 일부 발췌
또한 이기지(李器之 1690 ~ 1722)의 경우 서인의 영수이자 자신의 아버지였던 이이명(李頤命 1658 ~ 1722)을 따라 연경을 다녀온후 서양화법의 형태를 묘사하며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필치와 색을 가한 것이 극히 정세하지 않으나 가까이 보니 그림이었다. 그러나 열발자국쯤 떨어져 서서 보니 그것은 분명 살아 있는 개였다. 문짝의 안이 무적 깊고 멀게 보여 마치 벽이 비쳐 보이는 듯 하기도 하며 매우 경이롭게 보였다.
<서양화기> 중 일부 발췌
이처럼 서양화를 처음 접한 조선인들의 반응은 중국인들이 서양화를 처음 접했을 때의 그것과 거의 비슷했다. 이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서양화의 영향이 적어도 17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런 서양화에 대해서 처음에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새로운 문물에 대한 경계심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서양의 충격이라 불리는 17세기의 모습은 적어도 이러했다. 이후 19세기에 들어와서 굳건히 문을 닫아버린 동아시아의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당시에는 어느정도 서양화가 동아시아 문화의 흐름 속으로 유입될 수 있었던 것이다. 피터 셍크의 그림이 조선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예상컨대 바로 이러한 순풍을 제대로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이 그림은 지독히도 운을 타고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17세기의 시대적인 상황을 만났고 그 와중에 또 동아시아 세계가 그나마 서양 문화에 우호적인 상황에서 동양에 유입되었다. 조금만 시기가 늦었더라도 이후의 역사가 보여주듯 불타 없어졌을 것이고 시기가 조금만 빨랐으면 애초에 동양 근처에도 가지 못했을 그림이었다.
이쯤 되면 의문의 그림이 어떻게 조선에 들어왔을지는 더욱 분명해졌다.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 사행단은 총 500여회에 걸쳐서 청나라의 황제를 알현했다. 그때마다 사행단은 수백명에 달하는 인원들과 상인들, 통역관들을 대동했다. 피터 셍크의 그림을 조선인에게 전해준 사람도 바로 이러한 경로를 통해서 서양의 그림을 들여왔을 것이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의미심장한 기록이 눈에 들어온다. 실학자로 유명한 홍대용(洪大容 1731 ~ 1783)의 기록인데 그는 1765년 연경 사행을 다녀오며 이러한 기록을 남겼다.
할러스테인(원 글에는 유송령劉松齡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이 "요사이 항해하는 선박 편이 드물어서 토산물이 떨어졌으므로 답례할 물건이 없습니다."하고, 조그마한 인화 두장, 능화 두 장 고과 네 개, 흡독석 두 개를 나에게 선물하고 이덕성(원글에는 일관日官이라 기록되어 있다. 일관은 천문관련 일을 담당하는 관리인데 당시 홍대용은 일관과 통역관을 대동해 할러스테인을 만났었다 당시 대동했던 일관의 이름이 바로 이덕성이다)에게도 또한 같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