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미술/피터 셍크, 하멜 이후 100년만의 네덜란드 손님

피터 셍크, 하멜 이후 100년만의 네덜란드 손님 - 9

공식 2021. 12. 4. 20:08
마태오 리치가 죽은지 100년 가까이 지났다. 시대는 다시 피터 솅크가 중국행 무역선에 자신의 판화를 보낸 17세기 후반. 중국은 더 이상 한족의 통치를 받는 지역이 아니었다. 1644년 숭정 17년. 명나라가 멸망하고 그 자리를 만주족이 꿰차면서 중국 최후의 전통 왕조이자 최후의 이민족 왕조인 청나라가 들어섰다. 중국의 왕조 교체는 언제나 그렇듯이 동북아시아의 국제 정세에 커다란 변화를 몰고왔다. 16~17세기에 걸친 국제적인 전쟁과 정권 교체가 이 지역에 새로운 질서를 만든 것이다. 하지만 으레 그렇듯 이 변화에 반발하여 구체제를 고수하는 세력이 있기 마련이다. 중국의 경우 남명정권이 그러했다. 물론 이들의 운명은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변화의 파도는 누구도 막을 수 없었고 그렇게 동아시아에 새로운 질서가 들어섰다. 공교롭게도 이러한 변화는 단지 동아시아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유럽에서도 17세기는 커다란 변혁의 세기였다. 중세이래 끊임없이 유럽 대륙을 붙잡았던 종교적인 문제는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종식되었다. 기존에 강대국의 위치를 점유하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내리막길로 치닫고 있었고 대신에 프랑스. 영국과 네덜란드 같은 세력들이 부상하게 된다. 역시나 이곳에서도 동아시아의 남명 정권이 그렇듯이 반발하는 세력들이 존재했다. 이를테면 기존에 유럽 대륙 전체를 세력권으로 두었던 교황청 세력이나 중산계층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었던 제2 신분 기사 계급이 바로 그들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거대한 흐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변화라는 측면에 있어서 피터 셍크의 동판화는 달랐다. 그의 판화는 동아시아의 문화예술계의 흐름 속에 불쑥 들어온 작은 돌멩이에 불과했다. 물론 서양화의 유입이 '충격'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동아시아 문화계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일반적으로 이런 외부의 침입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흐름을 유지하며 도도하게 돌멩이를 흡수하거나 단단하게 굳어버려 흐름 속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거나. 중국의 경우 사실 서양의 그림이 들어왔을 때 이 두 가지 선택지를 모두 들고 있었다. 이것은 상당히 예외적인 경우의 속하는데 이후 동아시아 근대화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외부의 유입에 대해 사회적 이유이던 정치,경제적 이유이던 두 가지 선택지를 놓고 유연하게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더 큰 변화를 맞이하기 위한 일종의 예방접종이 서양의 그림들이라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아무튼 당시의 중국 지식인들은 적어도 이 그림에 대해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있었다. 초반의 반응은 이국적인 문물이 으레 그렇듯 호기심으로 시작했다. 서양화에 대한 찬양일색까지는 아니지만 그 사실성에 감탄해 자신의 문집에 기록한 것이 오늘날에도 전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안가 그런 평가는 부정적인 평가로 바뀌었다. 가령 청대 궁정화가 중 하나였던 추일계()의 경우 자신의 저서 <소산화보>에서
그림을 배우는 자는 한두 가지 받아들여 눈길을 끄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 하지만, 필법이 전혀 없어 공교하긴 하지만 역시 장인의 수준이라, 화풍에 들지 못한다.
라고 적었으며 조선의 경우에도 박지원은 서양의 그림이 사의화가 아니고 필치가 거칠다는 이유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이들의 평가는 사실 어떻게 보면 온당한 것이었다. 생경한 문물을 접할 때 어떤 사람이건 처음에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지만 이후 그 문물에 익숙해지면 적당한 거리두기와 동시에 비판적인 관찰이 행해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동아시아 지식인들은 사실 서양화 자체가 가지고 있는 사실적인 묘사에 대해서는 경탄을 금치 못했다. 처음 서양화가 들어온 16세기 중반, 인물로 따지면 마태오 리치가 한참 활동했던 시기부터 17,18세기 서양화의 기법이 일정부분 중국의 화법으로 흡수되었을 시점까지 이 평가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동아시아 회화의 사의화 전통이라는 것은 서양화가 더 이상 동아시아의 문화계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했다.
 
(위) 청나라 건륭제 초상화. 건륭제는 이른바 강건성세의 마지막 시기에 해당하는 황제이자 활발한 정복사업을 벌였던 황제였다. 그의 통치 시기 대대적인 박해로 인해 중국의 예수회 조직은 사실상 그 영향력을 상실했으나 선교사들의 예술, 과학적 능력을 눈여겨본 건륭제에 의해 궁정에서만큼은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림은 서양의 부감법과 대기원근법이 사용되었고 동시에 산수표현에 있어서는 동양의 방식이 사용되었다. 중서절충식 화풍이라 불리는 이러한 중국식 서양화법은 청대 궁정화가들이 널리 사용했던 화풍이었다. 말탄 모습의 건륭제 초상화는 당대 유럽에서 유행하던 기마초상화와 유사한 점이 있어 선교사들이 당대의 미술 경향을 중국의 초상화에도 적용했음을 알 수 있다. 루이 14세의 기마초상화(아래)와 비교해서 볼 것.

 

조선에 본격적으로 서양화라는 것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중국보다 약 한 세기가 늦은 17세기 초반이었다. 중국에서는 이미 한바탕 서양화법에 대한 논의가 끝나고 몇몇 지식인들에게는 나름 익숙한 무엇으로 자리잡은 그 때 조선인들에게 서양화가 전해진 것이다. 가장 이른 시기 기록은 아마도 소현세자의 기록일 것이다. 비공식적으로는 아마 중국을 다녀갔던 많은 지식인들이 서양의 문물에 대해서 알고 있었겠지만 1645년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돌아갈 때 당시 선교사로 있던 아담 샬로부터 <천주상> 한폭을 받아왔다는 것이 최초의 공식 기록인 것은 변함이 없다. 물론 이 최초의 접촉은 소현세자가 정확히 3개월 뒤 급사하면서 물거품이 되고만다. 이후 서양화가 조선에 유입되기 시작한 것은 청나라의 수도 연경에 사행단을 보내면서부터 였다. 이 시기 중국 내에서는 이미 한역된 서양의 책들이 유통되고 있었기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 책들을 통해 처음 서양의 문물을 접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출판물의 유포는 서양화의 발자취를 추적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후 중국과 조선간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출판물의 유통도 활발해지고 그로 인해 굳이 사행단으로 청나라에 가지 않아도 서양의 문물을 접할 수 있는 창구가 열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성호 이익이나 다산 정약용 같은 인물들도 바로 이 경로를 통해서 서양화에 대한 정보를 접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실 사행단으로 가는 인원은 매우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조선의 지식인이 일반적으로 해외의 문물을 접할 수 있는 기회는 출판물을 통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어떤 경로로 서양화를 접했든 그 반응은 일관된 모습이었다. 경이로움과 기괴함. 후대의 역사학자들이 실학이라는 이름 아래 분류하는 지식인이나 사행단으로 따라가 서양화를 직접 보았던 사람들의 기록 모두가 이 점에 대해서 한결같았다. 그것은 중국의 지식인들이 처음 마태오 리치가 가져온 성화를 보았을 때 했던 반응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성호 이익(瀷 1681 ~ 1763)의 경우 자신의 책 <성호사설>에서 

 

처음에 한 눈을 감고 다른 한 눈으로 오랫동안 주시하면 궁전의 지붕의 모퉁이와 담이 모두 실제 형태대로 튀어나온다. 

성호사설 <화상요돌> 중 일부 발췌

 

라고 적었다. 이익의 화상요돌에는 당대인들의 서양화에 인식의 단면을 보여주어 흥미로운 점들이 많다. 이익의 경우에만 한정해서 말하면 그는 명암법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지만 기하학적 지식이 요구되는 원근법에 대해서는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기하원본>의 서문을 보니 "여기에 눈으로 원근, 정사(正邪- 바르고 기울어짐), 고하의 차이를 살펴, 물상에 빛을 쬐어 평평한 판 위에 원통이나 모난 기둥의 부피를 표현하고 ...(중략)... 원을 그려 공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은 상의 오목하게 들어간 곳과 튀어나온 곳을 표현하고 집의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을 표현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근데 크게 보고 멀리 본다는 것이 무슨 방법으로 하는지 모르겠다. 

성호사설 <화상요돌> 중 일부 발췌

 

이익은 서양화 그 자체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논평을 하지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그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부분이 성호사설 <논화형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글에서 이익은 소동파의 화평을 논하면서 사실적 표현의 여부가 곧 정신의 표현 여부와 결부된다는 '이형사신(以形寫神)'을 주장하는데 당대 서양화가 사실적 묘사로 지식인들의 이목을 끌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서양화에 대한 이익의 생각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닐까 생각한다.

정신은 형체 안에 있으니 형체가 닮게 되지 않으면 그 정신이 어떻게 전달될 수 있겠는가? (소식이) 이와 같이 말한 것은 대개 형체는 닮었지만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거나 바로 앞의 사물을 광채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나라면 "형체가 닮지 않았는데 어찌 정신이 전달되며 다른 사물이 어찌 그 사물의 광채를 얻겠는가라고 말하겠다.

성호사설 <논화형사> 중 일부 발췌

또한 이기지(之 1690 ~ 1722)의 경우 서인의 영수이자 자신의 아버지였던 이이명(命 1658 ~ 1722)을 따라 연경을 다녀온후 서양화법의 형태를 묘사하며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필치와 색을 가한 것이 극히 정세하지 않으나 가까이 보니 그림이었다. 그러나 열발자국쯤 떨어져 서서 보니 그것은 분명 살아 있는 개였다. 문짝의 안이 무적 깊고 멀게 보여 마치 벽이 비쳐 보이는 듯 하기도 하며 매우 경이롭게 보였다.

<서양화기> 중 일부 발췌

 

이처럼 서양화를 처음 접한 조선인들의 반응은 중국인들이 서양화를 처음 접했을 때의 그것과 거의 비슷했다. 이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서양화의 영향이 적어도 17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런 서양화에 대해서 처음에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새로운 문물에 대한 경계심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서양의 충격이라 불리는 17세기의 모습은 적어도 이러했다. 이후 19세기에 들어와서 굳건히 문을 닫아버린 동아시아의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당시에는 어느정도 서양화가 동아시아 문화의 흐름 속으로 유입될 수 있었던 것이다. 피터 셍크의 그림이 조선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예상컨대 바로 이러한 순풍을 제대로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이 그림은 지독히도 운을 타고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17세기의 시대적인 상황을 만났고 그 와중에 또 동아시아 세계가 그나마 서양 문화에 우호적인 상황에서 동양에 유입되었다. 조금만 시기가 늦었더라도 이후의 역사가 보여주듯 불타 없어졌을 것이고 시기가 조금만 빨랐으면 애초에 동양 근처에도 가지 못했을 그림이었다.

 

이쯤 되면 의문의 그림이 어떻게 조선에 들어왔을지는 더욱 분명해졌다.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 사행단은 총 500여회에 걸쳐서 청나라의 황제를 알현했다. 그때마다 사행단은 수백명에 달하는 인원들과 상인들, 통역관들을 대동했다. 피터 셍크의 그림을 조선인에게 전해준 사람도 바로 이러한 경로를 통해서 서양의 그림을 들여왔을 것이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의미심장한 기록이 눈에 들어온다. 실학자로 유명한 홍대용(容 1731 ~ 1783)의 기록인데 그는 1765년 연경 사행을 다녀오며 이러한 기록을 남겼다.

 

할러스테인(원 글에는 유송령劉松齡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이 "요사이 항해하는 선박 편이 드물어서 토산물이 떨어졌으므로 답례할 물건이 없습니다."하고, 조그마한 인화 두장, 능화 두 장 고과 네 개, 흡독석 두 개를 나에게 선물하고 이덕성(원글에는 일관日官이라 기록되어 있다. 일관은 천문관련 일을 담당하는 관리인데 당시 홍대용은 일관과 통역관을 대동해 할러스테인을 만났었다 당시 대동했던 일관의 이름이 바로 이덕성이다)에게도 또한 같이하였다.

 
이제 의문의 그림으로 다가가는 문은 우리에게 더 가까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