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미술/나폴레옹 전쟁과 미술

테오도르 제리코, 1822년

공식 2021. 12. 6. 09:02

테오도르 제리코, <군대에 관한 편집증 환자>, 1822-1823, 암 뢰머홀츠 미술관.

 

1822년, 어두운 방 안에 세 남자가 앉아있다. 그중 한 명은 의사였고 한 명은 창백한 몰골의 화가였고 나머지 한 명은 편집증 환자였다. 이 환자는 자기 자신을 장교로 생각하고 매일같이 군사 훈련을 반복하는 편집증 증세가 있었다. 붉은 술이 달린 모자와 입고 있는 복장이 그가 군인임을 드러내는 것 같지만 불안하게 눈알을 굴리는 모습에서 그가 망상에 빠진 환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가 에티엔 조르주 박사의 환자를 그린 10점의 광인 연작 중 하나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제리코는 죽음을 불과 1,2년 앞둔 상황이었다. 박사의 진료실에 찾아갔을 때, 테오도르 제리코는 각종 질병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던 상태였다. 1821년에 다녀온 런던 여행은 악명 높은 스모그의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에게 폐병을 안겨주었고 설상가상으로 종양이 발생해 몸을 가누기 힘든 상태가 되었다. 간신히 체력을 회복한 뒤에는 낙마사고라는 불행이 그를 덮쳤고 뒤이어 투자한 회사가 도산하는 불운이 뒤따랐다. 이러한 상황에서 초췌한 모습으로 화가 앞에 앉은 편집증 환자의 모습은 어찌 보면 자신의 미래를 비춰주는 거울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노인과 자신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병을 앓고 있다는 것 외에도 군인이라는(그것이 진짜이든 아니든) 공통점이 둘 사이를 가교처럼 이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테오도르 제리코, <전장을 떠나는 흉갑기병>, 1814, 루브르 박물관.

 

불과 몇 년 전 제리코도 프랑스를 전쟁의 물결로 몰아넣었던 한 지도자를 따르는 군인이었고 그 지지를 실천에 옮기기도 했었다. 이 시기, 테오도르 제리코는 근위대에 들어갔고 지도자의 위대한 업적을 찬양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으며 그림을 통해 프랑스의 영광을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전쟁이 진행될수록 그가 꿈꾸던 이상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사라진 이상 뒤에 따라오는 것은 극도의 회의감과 절망이었다. 그 지도자, 나폴레옹이 섬으로 쫓겨나기 몇 년 전 제리코는 자신의 그림 속에 그러한 점을 투사해 담았다. 나중에 더 자세히 보겠지만 이 그림에서 조국을 위해 전진하는 당찬 청년은 이제 없다. 화폭에 남은 것은 단지 전쟁의 공포와 살고 싶다는 몸부림만이 남은 비련 한 인간이다. 당시 전쟁은 한참 진행 중이었지만 몇몇 화가들에게 전쟁은 이미 이상을 위한 전진이 아닌 절망 그 자체의 반복적인 구현으로 보였다. 제리코는 학생 시절 "세상을 비추고, 계몽하며, 놀라게 하는 것"이 자신의 목적이라고 쓴 바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전쟁 장면을 묘사한 역사화를 그리는 것을 자신이 이뤄야 할 필생의 업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전쟁 이후 그의 그림에서 전쟁의 모습은 자취를 감춘다. 그렇게 화가 제리코가 가졌던 꿈은 사라졌다.

 

그런 일이 있고 몇 년 후, 제리코는 이 환자를 만났던 것이다. 매일 아침 공터로 뛰쳐나가 "진격! 진격!"을 외치는 이 환자의 머릿속에 프랑스는 아직도 나폴레옹 황제의 통치 아래 있었다. 동정심 때문이었을까? 환자를 그리는 화가의 시선은 결코 증상을 건조하게 묘사하는 의사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를 마치 부르주아 가정의 벽에 걸릴 법한 반신초상화의 형식으로 그렸으며 과거 네덜란드 화가 브뢰겔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표현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를 보여준다. 이런 선택을 하게 된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그 여러 가지 요소들 중 전쟁의 경험과 그로 인한 동정심이 결코 부차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이 글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전쟁의 경험이 미술의 영역에 끼친 일련의 변화들이다.

 

이 글에서 앞으로 다루고자 하는 작품들은 나폴레옹 전쟁 전후 유럽 각지에서 조국의 현실을 묘사하고 있다. 전쟁에 휘말린 각국의 화가들은 저마다의 방법을 가지고 전쟁에 관한 회화를 그렸다. 그것은 때로는 르포와 같은 사실적인 묘사를 동반하기도, 신화라는 은유 속에 현실을 숨겨놓는 방식을 취하기도, 그도 아니면 양자의 애매한 지점을 넘나드는 방식을 취하기도 했다. 목적 또한 방법과 마찬가지로 다양했다. 조국의 영광, 화가로서의 명성, 사회에 대한 불만, 막대한 금전적 수익 등 저마다의 이유가 작품의 완성을 추동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제리코와 비슷한 또래의 프랑스 화가들은 대부분 20~30대였다. 이들이 사회로 진출할 나이에 혁명전쟁과 나폴레옹의 집권이 이어졌다. 그리고 커리어상으로는 최정점에 올라선 40대~50대가 되었을 때는 왕정복고가 일어났다. 이들의 이상이 다시 꽃 필 수 있었던 것은 1840년대에 들어서였다. 그러나 이 시기가 되면 그때의 주역들은 대부분 사망했고 살아있더라도 인생의 마지막을 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보았을 때 그들의 삶은 온전히 나폴레옹이 거쳐왔던 행적과 겹쳐진다. 화가들에게 나폴레옹 전쟁이 단순히 하나의 사건이 아닌 화폭의 세계관을 결정한 분기점인 것은 이 때문이다.

 

제리코의 삶 또한 동시대 다른 화가들의 삶의 궤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제리코는 환자를 그린지 얼마 되지 않아 척추에 생긴 종양으로 몸져누웠고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33살. 죽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였다. 그는 20대 시절 동시대에 가장 유명했던 역사화가였던 앙투안 장 그로를 이어 제일가는 전쟁화가가 되기를 꿈꿨다. 그러나 그의 이런 꿈은 다소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 종점을 맞았다. 전쟁이 가져다주는 애국심과 영광이 아닌 절망과 두려움, 광기, 슬픔 따위가 화폭을 지배한 것이다. 이것이 그가 원했던 결말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그런 변화가 시작되었는지 묻는다면 주저 없이 하나의 사건을 지목할 것이다.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제리코가 비참한 최후를 맞기 약 30여년 전 이탈리아로 거슬러 올라간다. 1796년, 베로나 인근의 아르콜 다리에서 프랑스 군대가 붕괴 직전의 상황에 놓였다. 그때 병사들을 헤치고 한 장교가 다리를 건넌다. 그는 지휘관이었지만 무모하게도 빗발치는 총탄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자칫 병사들끼리의 무용담으로만 남을 뻔했던 이 지휘관의 행동을 한 화가가 화폭에 담았다. 그리고 아르콜 다리를 둘러싼 신화는 19세기 프랑스 미술에서 나폴레옹을 이야기할 때 주요한 단골 소재 중 하나가 되었다.

 

앙투안 장 그로, <아르콜 다리의 나폴레옹>, 1796, 루브르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