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 2021. 12. 6. 09:10

앙투안 장 그로, <아르콜 다리의 나폴레옹을 위한 습작>, 1796, 루브르 박물관.

 

1796년의 원정에서 나폴레옹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그에게 있어 첫 번째 이탈리아 원정 기간이었던 이 시기 나폴레옹은 훈련받지 못한 지원병들로 이루어진 병사들을 이끌고 목표를 완수해야 했다. 11월 15일 아르콜 다리를 두고 양군이 대치할 때 프랑스 군은 오스트리아 군의 공격에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 젊은 나폴레옹은 깃발을 들고 병사들을 독려해 다리를 돌파하고자 했는데 그 순간이 작품으로 남아있다. 물론 아르콜의 다리를 둘러싼 실제 진실은 그것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소식이 파리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많은 것들이 실제와 다르게 혹은 과장되게 윤색되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진실이 무엇인 중요한가. 그것이 좋은것이든 나쁜것이든 결국 이 일화는 나폴레옹의 입지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초기 연구에서 이 작품은 그로의 이탈리아에 체류 당시 해당 장면을 직접 목격하고 그린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혼란스런 전쟁의 상황에서 그런 것이 가능했을리가 없다. 아직까지 현장 사생이란 개념조차 생소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추가적인 연구들은 많은 부분 가려져 있었던 그로의 초기 커리어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와 혁명전쟁기 프랑스 미술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로는 당대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한 사람이었던 자크 다비드의 화실에서 자신의 화업을 시작했다. 그는 촉망 받는 화가였다. 비록 1792년 살롱전시에서 국가가 주는 최고의 상인 로마상을 수상하지 못했지만 그가 다음 차례일 가능성은 상당히 높았다. 하지만 혁명의 열기 속에서 살롱과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는 귀족적인 취향을 반영하는 예술 기관으로 여겨졌고 그에 따라 존폐의 기로에 놓였다.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1793년 그로는 자신의 왕당파 성향이 프랑스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자 고전,고대를 공부한다는 핑계를 대고 이탈리아로 내려갈 결심을 한다. 이 시기 그로는 로마상은 커녕 목숨을 부지할지에 대한 확신도 없는 상태였다. 그는 스승인 자크 루이 다비드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이탈리아로 떠난다. 하지만 이탈리아 생활은 불행하기 짝이 없었다. 화가들의 주된 수입이었던 초상화 의뢰는 들어오지 않았고 오랜 체류 생활로 빚은 늘어만 갔다. 결국 그는 지인들의 손을 빌려야 했다. 하지만 부채 탕감은 순탄하지 않았다. 지인들은 그들이 빚을 갚아주는 대신 이 젊은 화가가 다시 파리의 화단으로 돌아오길 바랬기 때문이다. 수익이 변변치 않았던 젊은 화가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다시 예기치 못한 변수가 그로의 인생을 180도로 바꿔놓는다. 그가 프랑스로 돌아가기 위해 제노아에 머무르는 동안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했으며 자신의 스승인 다비드도 혼란의 와중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국 프랑스로 돌아가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제노아에 정착해 어떻게든 생계를 이어가고자 했다. 다행히 화가의 원만한 성품은 당시 제노아에 머물던 프랑스인 명사들과의 교유를 용이하게 만들었다. 나폴레옹과 그의 아내 조세핀을 처음 소개받은 것도 바로 이 즈음이었다. 조세핀은 남편의 이탈리아 원정을 기념할 회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이탈리아에 체류하던 화가들과 접촉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다비드의 촉망받는 제자였던 그로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아르콜 다리의 나폴레옹>은 이렇게 탄생했다. 그로가 처했던 상황을 알고나서 작품을 보면 나폴레옹을 묘사한 이 그림이 순전히 애국심의 발로로 그려졌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그는 작품을 완성하며 불굴의 용기로 무장한 위대한 지휘관의 모습을 '상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자신의 상상이 이 작품을 의뢰한 조세핀의 마음에 들기 바랬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현실적인 뒷이야기를 감안하고 보더라도 그로의 그림은 나폴레옹 전쟁 시기 회화들 중에서 주목할만하다. 1801년 살롱에 출품되기도 했던 이 작품은 왜 그로가 나폴레옹 전쟁기 훌륭한 선전화가였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모두가 주저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 젊은 장교가 깃발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고 장교는 병사들을 돌아보지만 아무도 앞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다. 그런 병사들이 못마땅 했던 것일까? 뒤돌아보는 나폴레옹의 모습에서 유난히 다물고 있는 입술이 눈에 띈다. 하지만 그런 점을 제외하면 이 그림은 당대에 잘나갔던 한 군인의 모습을 매우 효과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일반적인 전쟁화와 달리 한 인물에 집중하고 있으며 그 인물을 마치 고대 그리스의 남신상과 같이 묘사했다. 역동적인 모습은 아직까지 바로크의 궁정취향의 잔재로 남아있지만 나머지 것들은 (당시의 기준으로)온전히 고전적이다. 이 그림이 혁명전쟁시기 프랑스의 그림이라고 알려줄 수 있는 지표는 포화로 인해 생긴 어두운 배경과 인물의 복장 그리고 나폴레옹이라는 인물 그 자체 밖에 없다. 그로는 전쟁 내내 나폴레옹이 참가한 전투를 주제로 여러 작품들을 그렸다. 그 정도는 다르지만 그가 묘사한 나폴레옹의 모습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초연함을 잃지 않는 지도자로 그려졌다.

 

루이 프랑수와 르죈, <로디 전투>, 1796, 베르사유 국립 박물관

 

 앙투안 장 그로, <루이 알렉상드르 베른티에>, 1797, 개인소장

 

아르콜 다리를 건너는 피에르 오제로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798년 제작된 동판화

 

물론 진실은 이와 달랐다. 아르콜의 다리를 누가 건넜냐 건넜다면 나폴레옹 혼자만이 그 영웅적 행위를 했는가의 문제에 있어 사실관계를 두고 갑론을박이 일어났던 것이다. 하지만 진실이 무엇인지 화가들에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듯 했다. 논쟁의 와중에 화가들은 다리를 건너는 지휘관의 모습 그 자체가 프랑스 군대의 용기를 시각적으로 잘 전달하는 상징이라 보았다. 그리고 이것은 혁명전쟁기 프랑스에서 아주 독특한 하나의 도상으로 나타났다. 이 도상은 특히 이탈리아 원정 당시 나폴레옹의 측근들을 그린 작품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로디 전투 당시 루이 알렉상드르 베른티에의 모습을 담은 또 다른 전쟁초상화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로디 전투는 밀라노 남동쪽 31km 지점에 있는 아다강의 로디 다리에서 일어난 전투다. 이 전투는 아르콜 다리에서의 전투가 일어나기 몇 개월 전에 치뤄졌다. 하지만 다리를 건너는 지휘관이란 도상이 프랑스에서 유행을 타기 시작하자 유사한 형식을 취했던 로디 다리에서의 전투가 그림의 소재로 재등장한 것이다. 그로가 <아르콜 다리의 나폴레옹>을 완성한 직후 밀라노에서 체류할 당시 완성한 이 작품은 동일한 전투를 그린 루이 프랑수와 르죈의 작품과 비교했을 때 전투의 전반적인 상황을 보여주는 그 어떤 지표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물의 뒤에 보이는 다리의 존재만으로 당시 프랑스의 관람객들은 작품이 이탈리아 원정 당시 프랑스 지휘관 모습을 그렸다는 점을 알았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 프랑스에는 비단 회화뿐만 아니라 판화의 형식으로 유사한 도상을 담은 작품이 다수 제작되어 유통되었기 때문에 여타 지리적인 특징등을 작품에 그리지 않아도 작품의 소재를 식별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샤를 테베닝, <아르콜 다리를 건너는 오제로>, 1798, 베르사유 국립 박물관
존 싱글턴 코플리, <피어슨 소령의 죽음>, 1782-1784, 테이트 브리튼

 

다리를 건너는 지휘관 도상은 동시대 다른 화가들의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샤를 테베닝의 <아르콜 다리를 건너는 오제로>(1798)는 그것의 대표적 사례 중 하나다. 하지만 그로의 작품과 달리 테베닝의 작품은 몇 가지 형식적 지점에서 중대한 차이를 보인다. 작품에서 나타나는 돌격 장면은 장군의 모습과 병사들의 움직임, 후경의 배경이 한 눈에 들어와 당시의 상황을 전체적으로 설명하는듯한 느낌을 준다. 또한 세부적인 디테일을 보았을 때 오제로의 발 밑에 쓰러진 인물의 모습이나 동일한 제스쳐로 마치 복사한듯 그려진 병사들의 모습은 벤저민 웨스트, 존 싱글턴 코플리로 대표할 수 있는 영미권 화가들의 역사화 기법과 유사성을 보인다. 하지만 그로는 이러한 방식을 채택하지 않고 보다 더 고전적인 전쟁초상화의 방식을 택했다. 그는 전장에서 활약하는 인물 전체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명의 주요 인물을 전체 모습이 아닌 3/4 정도만 화폭에 담았는데 이는 혁명 이전에 귀족들의 전쟁초상화에서 자주 보이는 양식이었다. 더구나 테베닝의 작품과 다르게 그로의 작품에서 배경은 포탄으로 인한 화염을 반영하는듯 붉은 색조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런 일련의 기법들은 전장 전체를 전반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하기 보단 나폴레옹이라는 한 명의 인물에게 집중하도록 만드는 회화적 장치다. 여기서 두 작품은 이후 전쟁화 장르가 걸어갈 두 가지 방향을 선취한다. 하나는 샤를 테베닝의 작품과 같이 전쟁 장면을 묘사하는데 있어 세부적인 디테일을 빠짐없이 묘사하는 경향이다. 마치 사진처럼, 고증에 충실하게 사건의 모든 정보를 회화 속에 담아내는 것이다. 또 다른 경향은 그로의 작품에서 나타나듯 세부적인 디테일은 부족할지언정 전쟁에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특정 사건이나 인물을 강조하거나 전쟁의 참여자가 느꼈던 경험과 감정을 화폭에 담는 것이다. 이 두 흐름은 나폴레옹 전쟁이 벌어지는 내내 전쟁 역사화를 그리는 주요한 방식으로 남게 되며 이후 전쟁화의 양식적 흐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이렇듯 다리를 건너는 지휘관이라는 동일한 행위를 묘사한다 할지라도 몇 가지 형식적인 차이는 두 회화를 전혀 다른 경향으로 인도한다.

 

한편 나폴레옹이 프랑스에서 떠오르는 스타가 되고 이후 유럽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하기까지 화가들이 묘사한 나폴레옹의 모습은 고전적인 인물의 그것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는 당시의 미술 사조가 신고전주의 화풍이 주류였던 이유도 있겠으나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에 대해 사람들이 걸고 있는 기대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그림은 고전고대의 미담을 끌어오지 않고 동시대 인물의 위대함을 부각시키기 위해 그려졌다. 이런 경향은 그가 황제가 된 이후에도 심화되었으며 심지어는 그가 사망한 이후에도 나폴레옹 리바이벌이라는 미술 현상으로 등장하게 된다.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상처뿐인 승리가 지속되자 이런 그림들은 사라지고 나폴레옹이 이끌었던 병사들, 그가 사로잡은 포로들, 민중들로 주제가 옮겨갔다. 하지만 적어도 1802년 아미앵 조약이 체결되고 그가 프랑스에서 확고한 정치적인 입지가 다져지기 전까지 그런 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심지어 이집트 원정에서 전략적인 실패가 그의 입지에 흠결을 주었어도 나폴레옹에 대한 묘사는 큰 변화가 없었다. 첫번째 이탈리아 원정에서 이집트원정 그리고 이후 다시 시작된 이탈리아 원정의 기간에 이르기까지 신고전주의 화가들은 이 국민적 영웅의 모습을 화폭에 담는데 열심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