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미술/19세기 미술 - 확장된 시선

1866년 프랑스 살롱의 구조와 규칙

공식 2026. 7. 24. 08:51

나폴레옹3세가 황제가 된 이후 살롱의 개최와 운영은 내무부(ministère de l’Intérieur), 국무부(ministère d’État), 궁내부(Maison de l’Empereur), 궁내부 및 예술부(Maison de l’Empereur et Beaux-Arts)로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황제 자신이 최종 결정권자였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1866년 살롱이 개최되기 바로 전 해인 1865년의 시점에서 나폴레옹 3세는 궁내부 및 예술부 장관(Ministre de la maison de l'empereur et des beaux-arts)이었던 장바티스트 필리베르 베일랑(Jean-Baptiste Philibert Vaillant)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형태로 살롱 전시와 운영에 관한 통제권을 유지했다. 베일랑은 1860년 궁내부 장관을 맡은 이후 1863년에는 확대된 예술부 장관까지 맡게 되면서 1870년 사임할 때까지 사실상의 최종 결정권자로 있었다. 하지만 실무영역에 있어 프랑스의 예술 정책을 총괄하던 사람은 예술총감(Superintendency of Fine-Arts)에 있었던 니외베르케르크(Alfred Émilien Nieuwerkerke) 백작과 그가 임명한 필리프 드 세느비에르(Philippe de Chennevières)에게 있었다. 1860년대 살롱은 엄청날 정도의 행정적 자유를 보장받았는데 이는 베일랑이 업무에 엄청난 자유를 보장했기 때문이다(베일랑의 직업적 배경을 고려했을 때 이는 방관에 가까웠다). 따라서 프랑스 예술 정책의 실질적인 결정은 니외베르케르크와 세느비에르의 협업 과정에서 탄생했다.
 

살롱 운영에 관한 상세 조항은 규정집(règlement)이라 불렸으며 살롱 개최 몇 달 전 정부 관보인 르 모니퇴르 위니베르셀( Le Moniteur universel)에 발표되었다. 19세기 동안 이 규정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아래와 같다.

 

1. 전시구성과 작품 제출 절차에 대한 설명
2. 심사위원과 그것의 운용
3. 수상과 관련한 규칙

1866년 살롱은 여러 의미에서 1860년대 내내 벌어졌던 예술계 내부 충돌의 축소판이었다. 에두와르 마네의 《올랭피아》같은 급진적 화풍들은 여전히 배척의 대상이었다. 화가들은 1863년의 전례를 따라 낙선전을 요구했지만 운영진의 입장은 강경했다. 하지만 60년대 자유화의 분위기는 살롱에 일정부분 변화를 가져왔다. 외설 논란에 흽싸이며 폭풍의 중심이 되었던 쿠르베의 작품 《앵무새를 데리고 있는 여인》이 66년 전시에서 대중들에게 처음으로 공개되었으며 후일 인상주의자로 분류되는 클로드 모네, 에드가 드가 등의 젊은 작가들이 살롱 커리어를 쌓아나가며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살롱 전반에 걸친 자유화에도 아카데미즘에 대한 심사위원의 선호는 공고했고 재롬, 카바넬, 부그로와 같은 화가들이 다시 한 번 상찬의 대상이 되었다. 1866년의 살롱은 여러모로 변화를 원하는 진보적 예술가와 최소한의 양보를 통해 기존의 틀을 유지하려는 보수적 운영진 그리고 그 사이에 끼인 무수히 다양한 스펙트럼의 중도파가 혼재한 양상이었으며 이는 1866년 규정집의 몇 가지 조항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1866년 규정집
 
궁내부 및 예술부 
예술총감(Superintendency of Fine-Arts)
생존작가들의 작품들에 대한 공공전시
1866년
 
규정 
1장 작품 제출
 
1항 생존작가들의 작품 전시는 1866년 5월 1일부터 6월20일까지 샹젤리제궁에서 열리며 전시는 프랑스 작가와 외국작가에게 개방될 것이다. 
작품은 3월 10일부터 20일 저녁 6시까지 까지 제출되어야하며 이후에는 어떤 작품도 받지 않는다.
그 어떤 유예기간도 없을 것이다. 
 
(해석)
1860년대 살롱전을 둘러싼 논란 하나는 장소 선정을 두고 벌어졌다. 산업궁이라 불렸던 이 장소에 대해 평론가들과 예술가들은 그곳이 예술이 아닌 상품을 위한 전시장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여론은 규정집에서 산업궁을 샹젤리제궁이라 부르며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산업적 의미를 제거하려 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5월부터 6월말까지 진행되는 전시 기간은 장소의 환경과 살롱 관람객들을 모두 고려한 조치였다. 19세기 동안 살롱은 그 기간이 조금씩 변했지만 많은 경우 4월 중순~6월 중순의 기간 동안 열렸다. 제2제정 시기 산업궁이 살롱 전시를 위한 장소로 쓰이게 되자 이러한 규정은 꽤나 중요해졌다. 만약 너무 일찍 전시를 열게 될 경우 전시장에 불어닥치는 강풍과 고드름으로 인해 온전한 전시가 불가능했다. 너무 더운날에 열 경우 산업궁 자체가 거대한 증기실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전시가 불가능했다. 이러한 고려 이외에도 살롱 전시의 작품을 구매하는 잠재적인 고객들이 더위를 피해 6월 이후에는 파리를 떠난다는 점 또한 중요한 고려사항이었다.
 
2항 전시에 허용가능한 작품은 아래의 6개 범주를 따른다. 
1. 회화
2. 드로잉, 수채화, 파스텔, 세밀화(miniatures), 에나멜, 도자기, 스테인드글라스를 위한 밑그림(cartoons)
3. 조각과 메달조각
4. 건축 드로잉
5. 판화(engraving)
6. 석판화(lithography)
예술가들은 각 범주 당 2개의 작품을 낼 수 있다.
 
(해석)
예술가들은 이론상 12작품을 낼 수 있었지만 대부분이 작은 매체기 때문에 예술가들이 낼 수 있었던 분야는 사실상 회화뿐이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위한 밑그림(카르통)이 범주에 포함된 것은 1866년 규정만의 특징인데 이것은 세느비에르가 종교예술과 전통적인 예술 기법,형식을 부활시키기 위한 의도에서 추가시킨 것이다.
 
3항 제출 제한 
에나멜, 도자기, 드로잉 같은 다른 매체를 이용한 모작을 제외한 모작(copies)
파리에서 열린 전시에서 출품한(figured) 작품 
사망한 작가의 작품, 단 지난 살롱전 개최 이후 사망한 사람은 제외
익명 출품작
소성하지 않은 조각
 
4항 작품의 앙상블을 위해 필요한 것을 제외하고 프레임은 1개 이상의 주제를 포함시켜서는 안된다
세밀화, 메달조각, 준보석작품들만이 동일 재료에 한하여 그룹으로 제출 가능
 
5항 타원이나 원형 프레임 혹은 가장자리가 절단된 프레임, 반드시 금박 재질의 직사각형 프레임이어야 함.
 
6항 전시에 제출할 작품을 선불 우편으로 정확한 전시 장소에 보낼 것 
 
7항 작품을 제출했거나 제출할 예술가들은 성명, 출생지, 스승의 이름, 파리의 전시에서 수상한 내역, 주소를 포함한 설명서를 본인이 서명하여 보낼 것
개인적으로 작품을 가지고 올 수 없는 사람은 반드시 서면 허가를 받은 사람을 통해 제출해야 함.
 
8항 2항의 범주 각각에 대하며 설명서를 제출할 것
 
9항 카탈로그 부록은 지난 전시 이후 공공기념물에 설치된 그림과 조각에 할애될 것이며 이 작품들은 살롱 전시를 이유로 기념물로부터 제거되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종류의 작품을 도록에 등재하려는 예술가는, 신고 내용의 증빙 자료로서 작품의 주문·위촉 사실과 승인 일자를 증명하는 공식 문서를 제출해야 한다
 
10항 작품은 전시된 이후 재작업할 수 없음 
 
11항 예술가의 허락 없이 어떤 작품도 복제될 수 없음 
 
12항 전시된 어떤 작품도 특별한 허가 없이 전시가 끝나기 전까지 임의로 철거될 수 없음
제출된 작품은 전시 종료 후 1달 안에 철거 해야 함; 작품은 접수증을 제시하지 않으면 반환되지 않음. 상기한 기간이 지나면 이 작업은 행정부에 의해 중단될 것이다.  
  
 
2장 허가 
 
(해석)
2장은 심사위원 구성과 심사 기준에 관한 조항들로 구성되어있다. 2장은 19세기 내내 논란이 되었는데 그것의 특성상 전시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2장은 당대의 정치적인 상황에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가장 빈번히 변하는 장이기도 했다. 가령 7월 왕정 기간 동안 심사위원은 오직 프랑스 학술원 소속 에콜데보자르 회원만이 가능했었다. 이 시기 아카데미는 화가 10명 조각가 8명 건축가 8명 판화가 4명 음악가 6명 박물관 행정가와 작가를 포함한 10명의 자유회원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아카데미의 새회원은 기존의 회원이 죽을 때만이 새로 선발되었다. 1848년 혁명은 엄격한 살롱 기준을 180도로 뒤집었다. 이 시기 살롱은 출품하고자 하는 모든 회원들에게 열려있었으며 심사 제도 또한 폐지되었다. 하지만 1848년 이후 심사 제도는 다시 부활했고 심사위원 선출 자격 또한 점점 더 보수적으로 변했다. 그 결과 1852년에 이르면 1848년 살롱을 제외한 살롱 출품 허가자만이 심사위원 투표가 가능해졌다. 제2제국 시기 살롱에 관한 규정은 더욱 보수적으로 변했다. 1855년 이후 살롱은 격년제로 열렸으며 1857년부터는 살롱에 대한 아카데미의 통제권이 다시 돌아왔다. 이 시기 아카데미는 6명의 음악가을 제외한 것을 빼면 과거의 지위를 회복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1863년 전례없는 반발로 인해 변화한다. 이 시기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으로 다수의 출품작들이 탈락했고 이에 대한 격렬한 반발로 황제가 개입하게 된 것이다. 낙선전의 탄생으로 이어진 이 사건으로 인해 아카데미는 살롱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했고 프랑스 행정부가 살롱 운영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게 되었다.1863년 이후 살롱은 다시 매 해 열리게 되었고 심사위원의 3/4는 투표로 1/4는 프랑스 행정부가 임명한 사람들로 채워졌다. 이러한 체계는 1866년의 조치 이후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13항 허가와 수상을 위한 심사위원단 선발의 3/4는 살롱에 전시한 예술가이거나 살롱에서 수상한 사람이 선출 자격을 갖는다. 나머지 1/4는 행정부에서 선출한 사람으로 임명한다.
 
14항 심사위원은 4개 부문으로 나뉜다
 첫번째 는 회화, 드로잉 기타 
 두번째는 조각, 조각 메달, 준보석
 세번째는 건축
 네번째는 판화와 석판화 
 
15항 첫번째 회화, 드로잉, 기타부는 24명으로 구성되며 18명은 투표로 6명은 행정부에서 선출한다
      두번째 조각, 메달조각부는 12명으로 구성되며 9명은 투표로 3명은 행정부에서 선출한다
      세번째 건축부는 8명으로 구성되며 6명은 투표로 2명은 행정부에서 선출한다
      네번째 판화와 석판화부는 세번째 심사위원단과 동일하게 구성한다 
각 부문은 4명의 추가 심사위원을 둘 수 있으며 이 때 3명은 투표로 1명은 행정부에서 임명한다.
 
(해석)
1866년 살롱에서 세느비에르는 조각 부문을 제외하고 심사위원단을 2배로 늘렸다. 이러한 조치는 어느정도 살롱의 자유화를 가져오는 것으로 보였지만 심사위원 투표 자격이 여전히 보수적이기 때문에 큰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16항 심사위원단의 총심사위원장은 예술감이 맡는다. 그러나 각각의 부서는 부서별 심사위원장을 투표로 선출한다. 
 
17항 심사위원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출품자 중 학술원Institute 회원이거나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은 출품자거나 지난 살롱 전시에서 메달을 수상한 사람들이다. 
 
(해석)
17항은 과거 있었던 비전문가들의 심사위원 선발 권한을 박탈한 조항이다. 하지만 학술원 회원이나 레지옹 도뇌르 출품자들에게 심사위원 선거 권한을 줌으로서 사실상 아카데미 회원과 레지옹 도뇌르 수여자들에게 큰 권한을 주는 셈이 되었다.
 
18항 제17조에 명시된 조건을 충족하는 작가는 작품이 등록된 이후 자신의 작품이 등장하는 부문에 투표용지를 제출할 수 있다. 이 투표용지는 접수증을 제출하면 인정된다.
작업을 직접 제출하지 않는 예술가는 서명한 설명서를 봉투에 봉인하여 보내야 하며 이때 투표용지 또한 봉인된 봉투에 동봉하여야 함. 이 투표용지는 봉투를 전달한 사람의 입회 하에 항아리에 보관한다. 
 
19항 투표용지 집계는 투표종료 후 다음날 실시한다. 항아리는 예술감이 3월 21일 1시에 개봉하며 이때 집계는 투표 용지를 제출한 사람들과 참여를 원하는 예술가들의 입회 하에 진행된다. 
 
20항 배심원에게 제출된 모든 작품의 승인에는 출석한 구성원의 절대 다수를 필요로 함.
투표가 나뉘는 경우 허가는 평결로 부친다. 
 
21항 학술원 회원이나 레지옹 도뇌르 수상자, 작년 살롱 전시 메달 수상자는 조사없이 작품을 받는다.
살롱에서 상을 받은 사람을 제외하고 심사나 투표 면제를 받을 수 없다.
 
3장 수상 
 
(해석)
1866년 살롱에서는 최대 69개의 메달이 수여되었으며 1863년처럼 1등,2등,3등으로 나뉘어지지 않았다. 예술가가 3번의 새로운 메달을 받게되면 그 예술가는 오르콩쿠르hors-concours(무심사자)라고 불렸다. 중요한 것은 심사 면제는 단 한번의 메달 수여만 있어도 되었기 때문에 오르콩쿠르와 심사 면제자의 수는 동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1860년대 중반에 이러한 구분이 중요한 것은 오르콩쿠르로 불려진 예술가만이 레지옹 도뇌르를 수여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회에서 레지옹 도뇌르를 받은 것은 계층 상승을 도모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매우 중요했다.(참고로 1866년의 시점에서 살롱 메달 수상자는 1267명이었으며 이중 472명이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이 중에서 65명이 슈발리에(Légion d'Honneur Chevalier)를 3명이 코망되르(Légion d'Honneur Commandeur) 훈장을, 2명이 그랑도피시에(Légion d'Honneur Grand Officier) 훈장을 받았다.  
 
22항 심사위원은 수상받을 가치가 있는 작품의 예술가들을 선정한다 
 
23항 이 메달은 한 종류이며 26항에서 명시한 메달을 제외하고 400프랑의 가치가 있다
 
24항 심사위원의 수상자 선정은 아래의 수를 초과해서는 안된다 
 
회화, 드로잉, 기타부 40메달
조각, 메달조각부 15메달
건축부 6메달
판화와 석판화부 8메달
메달 혹은 가작은 중복 수여할 수 없다. 
 
25항 예술가는 각 부문에서 3번 이상 메달을 받을 수 없다. 이전 살롱 전시에서 1등 메달을 받았거나 2등 메달을 연속해서 두 번  받았거나 3등 메달을 두 번 받았거나 새로운 메달을 세 번 받았으면 메달 심사에서 제외된다. 
 
26항 4000프랑 가치의 2개의 메달은 살롱 전시에서 가장 탁월했던 작품 2개를 선정해 그 작품의 작가에게 수여한다; 그리고 이 메달은 이전 살롱 전시에서 메달을 받았던 출품자들의 투표로 수여된다. 메달을 수여 받은 예술가들은 재설치 기간 동안 초대 받는다.
 
27항 상 수여는 엄숙한 의식 속에서 진행된다. 의식의 날짜는 추후 정한다. 살롱에 재설치될 때 상을 받은 작품은 대중들 앞에 전시된다. 
전시작품의 취득을 위해 국가는 입장료 수익을 활용한다.
입장료는 1인당 1프랑이다.
일요일 입장료는 무료로 한다. 
 
(해석)
1866년 규정은 심사위원들이 전시 이전이 아닌 전시 기간 중 수상자를 선정하도록 정하고 있다. 이것은 심사위원의 부담을 줄임과 동시에 심사 선정 결과에 대한 예술가들과 대중들의 불만을 경감시킬 수 있는 조치였다.
 
파리 1865년 10월 27일 
상원의원, 예술총감, 학술원 회원 
니외베르케르케 백작
 
승인:
원수, 궁내부 및 예술부 장관
베일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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