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래디, 합스부르크 - 세계를 지배하다, 2022
마틴 래디의 책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흥망성쇠를 다룬다. 유럽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가문의 역사를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주로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 제국의 왕이나 왕비)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으며 그들이 다스렸던 나라의 역사가 가문의 역사와 어떠한 방식으로 연결되는지 조명한다.
가문의 역사가 중심이 된다고 했을 때 그것의 서술 방향은 어쩔 수 없이 인물 중심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유럽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익숙하게 들어보았을 카를 5세, 마리아 테레지아, 요제프 1세, 펠리페 2세뿐만 아니라 이름조차 낯선 가문의 구성원들까지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각 장의 중심을 잡아준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기원을 다루는 1장부터 제국의 해체를 다루는 29장까지 책의 구성은 한 인물의 생애, 시대적 배경, 인물 평가라는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하는 일련의 흐름으로 짜여져 있다. 이렇게 볼 때 책은 꽤나 딱딱한 역사책으로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천 년이 넘는 시간에 휩쓸려 길을 잃을 수 있는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저자는 각 장의 주인공들을 역사책 속에 박제된 무엇이 아닌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제시한다. 그들은 어떤 점에서 기독교 세계의 구원자 같은 초인적 힘을 보여준다. 하지만 또 어떤 측면에서 그들은 정신병자, 예술애호가, 음모론자, 전쟁광, 겁쟁이다. 그들은 군주로서의 자질과 함께 나름의 결함(그것이 꼭 생물학적 결함이 아니더라도)도 가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생기는 에피소드들은 때때로 실소를 자아낸다. 하지만 이것이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드러낸다던가 그들의 어리석음을 대변하기 위한 증거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에피소드들은 단지 지루함을 없애는 흥밋거리로 소비하는 것이 아닌 합스부르크 주변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여러 오해와 선입견들을 제거하고 그 구성원들을 역사 속 인물로 평가하는 수단이다. 하나의 사례로 연금술에 빠진 루돌프 2세에 대한 설명을 보자.
"연금술과 비술은 통치자의 직분에서 벗어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오히려 통치자의 직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이 세상을 우주의 질서와 일치시키는 방법을 둘러싼 해답이 마법과 숨겨진 진실이라는 영역에 존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장의 전체에 걸처 루돌프 2세는 "미친 사람 혹은 악마에 사로잡힌 사람"이자 궁성에 틀어박혀 삿된 것에 몰두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또한 그는 종교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책무를 저버리고 국가를 정치적 파탄으로 빠트린 인물로 평가된다. 그럼에도 저자는 서술의 균형을 맞춘다. 황제의 괴벽을 설명하는 당대의 증상인 흑담즙병(혹은 우울증)은 알브레히트 뒤러의 작품에서 예증하듯 천재의 징후이자 지적 노력의 흔적으로, 연금술사, 점성술사들과의 교유는 천문학 분야의 연구 성과와 연결시켜 그것의 의의를 재평가 하는식이다.
책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저자의 인물 평가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오해를 교정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사람들을 분석함에 있어 당대의 입장을 최대한 전달하려고 한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비합리적이고 심지어는 어리석어 보이는 행동이 사실은 당대의 사회, 정치, 문화적 맥락에서 나온 행동이며 심지어는 통치 철학의 일환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이 저작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사에 대한 입문서로 탁월한 가치를 지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저작이 가지는 힘은 중앙 유럽의 낯선 나라를 중심으로 펼쳐진 여러 이야기들을 당대의 맥락 속에서 설명해낸다는 것에 있다.
누군가는 이것이 단지 편향된 서술에 불과하며 연구 주제에 대한 그릇된 애정의 한 형태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날의 고지에서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이 했던 여러 행위들은 헛된 것으로 보이며 심지어는 가문의 필연적 멸망을 설명하는 하나의 요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뭐라 변명하든 그들은 근친으로 얼룩진 지나간 역사의 한 페이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1차세계대전 이후 가문이 몰락한다는 정답지를 옆에 두고 풀이 과정을 이에 맞추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각 장에서 등장하는 통치자들은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판단한다. 때때로 그것은 당대에도 실책으로 인식되었고 절대적 기준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있지만 어찌되었든 모든 행위들이 그것을 추동하는 여러 원인들과 함께 설명된다. 19세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왜 식민지를 얻을 수 없었는가에 대한 설명을 살펴보면 이러한 방식의 단면을 알 수 있다. 저자는 프란츠 요제프의 식민 활동 지원이 여타 유럽 열강들에 비해 미약했으며 그 방향조차 경제적 이익과 거리가 멀었다 주장한다. 그럼에도 저자는 오스트리아의 식민 활동이 나름의 의의가 있다고 보는데 책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른 나라 사람들은 해외의 땅을 노렸지만, 오스트리아인들은 연구를 향한 애정 때문에,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지식을 넓히기 위해서 해외로 향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서술에 즉각적으로 제기될 수 있는 후기식민주의적 비판은 잠시 제쳐두고 이 주장을 따라가보자. 그의 논리에 따르면 오스트리아 식민 정책은 "기독교의 주도권과 세계적 명성이라는 관념에 뿌리를 둔 보편적 원리를 지향한다"는 원칙을 지식의 축적으로 구현한 사례다. 그리고 이것은 과거 프리드리히 3세의 무덤에 새겨진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가치를 드러내는 이합체시인 AEIOU를 19세기의 환경에 맞게 실천한 것이었다. 즉, 오스트리아의 식민정책은 동시대 유럽의 식민 정책과 비교할 때 그 동기에 있어 너무나도 "중세적"이었으며 왕조적 사명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전형적인 식민지 활동과 구별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 방식에서 나름의 내적 논리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저자가 변명이 아닌 당대의 기준에서 합리적이라고 여겨진 설명을 제시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에 주목하자. 저자 자신도 19세기 오스트리아의 식민 활동이 개탄스러운 학술 연구의 한 사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이에 대한 신랄한 평가를 내린다. 하지만 저자의 초점은 비록 눈쌀이 찌푸려지는 무엇이라도 아무런 역사적 배경 없이 즉흥적으로 진행된 무엇이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는 것에 있다. 저자는 해명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의 선택에 맥락 설명을 보탠다. 하지만 그런 해명은 언제나 냉정한 평가와 함께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역사적 평가의 견지에서 이해할 수 있다. 몇몇 장에서 잠시나마 그러한 균형을 깨버리는 서술(가령 세르비아 민족주의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헝가리 민족주의에 대한 저자의 설명과 비교할 때 분량이나 태도 측면에서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부분이 있다 또한 결론부는 누군가에겐 아주 불편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이 종종 눈에 띄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렇듯 저자가 지속적으로 행위의 이면에 놓인 논리 구조를 설명하는 것에는 기존의 연구 경향에 대한 비판적 평가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서론에서 저자는 기존의 역사학자들이 가문의 역사를 "취약", "시대착오적", "돌발적"이라는 단어로 수식한다고 지적하며 이러한 서술 방식으로는 이들의 역사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이 책이 "그들의 제국, 그들의 상상력과 우리가 그들을 상상한 방식, 그들의 의도, 계획, 실패 등을 설명하는 것"에 목표가 있다고 말한다. 실제 저자는 민족국가의 기반 위에서 성장한 일반 독자들에게 그들의 상식 범위 바깥의 개념을 기반으로 하는 이질적 정치체의 논리적 구조를 설명하는 것에 분량을 할애한다. 가령 저자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신,구 대륙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영토를 차지했으면서도 서로 분리되지 않고 나름의 결속력을 보였던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오스트리아의 통치자들은 위대해질, 그리고 사람들을 다스릴 운명을 타고난 자들이었다. 오스트리아는 바로 그런 땅이었다. 사실, 오스트리아는 땅이 아니라 제국, 사명, 운명 같은 여러 주제들이 한데 모인 후천적 구성물이었다....(중략)... 오스트리아는 지리적 요인과는 별개로 성립된 통치 가문을 향한 일련의 믿음이 특징인 곳이었다. 그러므로 훗날 부르고뉴로 떠나버리거나 스페인의 왕위를 물려받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제후들은, 오스트리아 공작령과의 물리적 관계가 멀어지더라도 여전히 오스트리아 가문의 일원임을 자처했다.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이 바라보는 오스트리아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이념이었다."
책 전반에 걸쳐 저자는 우리와 100년 이상의 시공간에 떨어진 한때 유럽의 주요한 플레이어였던 존재들의 사고방식을 재현하려 노력한다. 이념으로써의 오스트리아, 기독교의 구원자, 로마적 기원 등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의 상상력을 구성하는데 일조했던 사고 체계들을 소개하며 그들의 논리적 흐름을 따라가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은 단지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나열이 아닌 나름의 합리적 체계를 설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보다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마틴 래리의 책은 합스부르크에 관한 포괄적 설명을 제시하는 훌륭한 입문서이지만 한 가지 의구심이 들어 이에 대한 감상을 끝에 남기고자 한다. 내가 느낀 꺼림칙함은 이 책의 집필 동기에 있다. 저자는 이 책이 아주 짧은 입문서 시리즈(국내에서는 고유서가에서 출판 중인 그 시리즈다)에서 분량상의 문제로 아쉬움을 느끼던 차에 어느 편집자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책을 쓰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후반부에 갈수록 이 책이 미진했던 부분을 보충한다는 목적과 함께 오늘날 유럽이 처한 다민족 문제(특히 중부, 동부 유럽의 문제)를 어떠한 방식으로 대처해야 하는가라는 케이스 스터디를 제공하려는 목적에서 작성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90년대 유럽 내에서 내전으로 점철된 민족 분쟁이 발생하고 최근에 와서는 이민자 문제가 심각한 화두로 떠오른 지금, 19~20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사례가 하나의 역사적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걸까? 글은 그러한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의 추론은 상상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결론부에서 헝가리 역사학자의 말을 빌린 저자 자신의 주장은 분명한 정치적 의견 표명으로 보이며 그것이 오해의 소지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부주의하게 제시되었다는 점에서 책의 유일한 오점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 서평은 부흥 카페 서평 이벤트에 응하여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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