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테레지아와 권력의 재현- 유럽의 여성 통치자는 어떤 방식으로 그려지는가
18세기 초 합스부르크 가문은 왕위 계승 문제로 큰 위기를 겪었다. 이 시기 합스부르크의 남성 혈통은 근친행위와 연이은 불운으로 끊어졌다. 당시 합스부르크 왕가를 책임졌던 카를 6세에게는 딸을 제외하면 후사가 없었다. 그는 여성의 왕위 계승권을 보장하는 국사 조칙을 통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자 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국제적인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성 왕위 계승자의 존재는 국가의 아킬레스건으로 남았고 그것은 치세 말년 외교적 고립과 함께 더욱 심화되었다. 1740년 카를 6세가 갑작스레 사망 이후 이런 불안 요소는 기다렸다는 듯 터져나왔다. 계승권을 둘러싼 갈등으로 마리아 테레지아와 적대했던 카를 알브레히트가 황제로 선출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가 슐레지엔을 침공했다.
1741년 6월 브라티슬라바에서 대관식을 치뤘을 때 마리아 테레지아의 상황은 위태로웠다. 하지만 이후의 역사가 보여주듯 그녀는 산적한 여러 문제들을 헤쳐나가며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 1748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난 이후 슐레지엔을 빼앗기기는 했지만 나머지 영토를 회복했고 자신의 남편 프란츠 슈테판을 황제로 선출했다. 불과 10년도 안되는 기간에 그녀는 가장 위태로운 존재에서 권력을 거머쥔 황녀로 거듭났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합스부르크 - 세계를 지배하다』의 저자 마틴 래디는 자신의 책에서 그 단서를 제시한다.
모성과 연약함이라는 "여자다운"특성과 활기와 용기라는 "남자다운"특성을 겸비한 마리아 테레지아는 유럽에서 가장 이름난 군주가 되었다. 영국의 선술집 간판에는 손님을 끌어모으기 위해서 그녀의 초상화가 걸렸다. p.294.
전근대 유럽에서 초상화가 그려졌다는 사실은 그다지 새롭지 않다. 하지만 초상화의 주인공이 마리아 테레지아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녀는 그때까지 유럽의 역사에서 보기 드문 여성 통치자였다. 많은 유럽의 왕실 초상화에서 여성은 황녀, 여왕, 공주 신분이었기 때문에 남성을 내조하거나 당대에 여성적이라고 여겨지는 관습과 연결되어 그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통치자로의 여성은 그 자체가 이질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초상화를 둘러싼 재현 관례에서도 크게 벗어난 존재였다. 마리아 테리지아의 초상화를 제작함에 있어 당대의 예술가들이 겪었을 법한 곤란은 마틴 래디가 쓴 짧은 구절에서도 암시적으로 드러난다. 저자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여성적 특성과 남성적 특성을 겸비한 존재라고 언급한다. 이것은 분명 두 가지 측면 모두를 가진 뛰어난 존재임을 강조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론 이러한 존재를 묘사함에 있어 두 가지 상반되는 가치를 통일된 시각적 언어로 전달해야 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문제는 군주를 재현한다는 것이 단지 외양을 재현한다는 것 이상의 함의를 지닌다는 것이다. 군주 초상화는 그 자체로 권력의 시각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것은 왕의 존재를 과시함과 동시에 국가 권력이 투사될 수 있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또한 그것은 국가가 지향하고자 하는 가치를 통치자의 신체와 주변 기물들을 통해서 설파한다. 한 마디로 요약해 초상화는 일종의 시각적 프로파간다였다. 모든 프로파간다가 그렇듯 메시지는 명확하고 단순해야 한다. 그것은 왕조의 영속성을 보여주거나 국가가 중점적으로 벌이는 정책 혹은 전쟁의 성공적 수행을 드러낸다. 그것도 아니라면 대내외적으로 추구하는 보편 가치 혹은 계승 의식을 다양한 상징들을 매개로 보여준다. 이렇게 생각했을 때 여성 통치자 재현 문제에 있어 그것이 내포한 서로 다른 속성을 통일된 언어로 제시하지 못할 경우 그 자체가 국가의 불안정한 속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
이러한 위험요소를 피하기 위해 당대에 제시된 논리 중 하나가 왕은 두 개의 몸을 지닌다는 것이었다. 중세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논리는 왕의 신체는 물리적 신체와 정치적 신체 두 개의 신체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여성이 통치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통치자가 가진 젠더 속성은 물리적 의미의 여성 신체를 의미할뿐 정치적 신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여성 통치자 재현 문제에 있어 통치에 부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여성적인 속성들을 배제하고 남성적인 속성들을 강조해 내적 모순을 피할 수 있다는 논리적 귀결로 이어졌다.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에서 발생한다. 예컨대 마리아 테레지아를 그릴 때 어떤 측면을 강조하고 어떤 측면을 누락시킬 것인가? 놀랍게도 그녀가 내놓은 해법은 여성성을 국가가 추구하는 가치와 연결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두 개의 몸 담론이 의도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노선이었다. 두 개의 몸 담론이 여성성과 남성성의 분명한 구분 속에서 공적인 이미지를 통치자의 젠더적 특성과 상관 없이 남성적인 것으로 고정시키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다면 마리아 테레지아가 추구했던 이미지는 여성성과 정치적 몸을 결합해 둘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이 왕족 여성을 재현하는 방식에 있어 얼마나 급진적 변화였는지는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완성된 두 개의 작품을 보았을 때 분명히 드러난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를 계승하기 이전에 그려진 한 삽화에서 그녀는 카를 6세의 계승자라기 보다는 가문의 지속을 위해 후사를 낳아야 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작품 속에서 로마 여인의 복장을 한 마리아 테레지아는 두 명의 푸토를 대동한 채 사자가 이끄는 마차에 올라타 있다. 마차를 둘러싼 두 명의 푸토 중 한 명은 풍요의 뿔을 들고 있고 다른 한 명은 당대의 도상 체계에서 시간을 상징하는 야누스 흉상을 들고 있다. 이러한 기물들은 곧 바로 마리아 테레지아가 잡고 있는 아기와 연결되는데 이를 통해 마차와 야누스 흉상으로 상징되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속성이 풍요의 뿔과 아기로 상징되는 출산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종합하자면 그림 속에서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요구되는 역할은 (남성) 후사의 생산이라는 젠더적 역할로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난 이후 그려진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러한 젠더적 틀에 머무르지 않는다. 말을 탄 채 왕관을 쓰고 칼을 들고 있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모습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통치자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 통치 기간 동안 수 없이 변형되어 묘사된 말을 탄 마리아 테레지아의 모습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기마 초상의 전통과 연결시켜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도상이다. 유럽의 왕가에서 기마 초상은 통치자의 남성성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도상으로 자주 활용되었다. 거기에 더해 합스부르크 왕가에서는 기마 초상 제작이 직전에 있었던 전쟁의 승리와 연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티치아노가 그린 카를 5세의 기마 초상화는 그러한 전통의 한 사례를 보여준다. 작품은 1547년 4월 24일 슈말칼텐 동맹을 격파한 기념으로 카를 5세가 주문한 그림이다. 작품의 해석에 있어 에르빈 파노프스키는 이 그림이 기독교 세계의 보호자이자 로마의 계승자라는 두 가지 함의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이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기물이 황제가 들고 있는 창이다. 창은 당대 회화 전통에서 성 조지와 롱기누스의 창이라는 기독교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 창은 로마 황제들의 강력한 권력을 상징하기도 했다. 이러한 해석을 토대로 했을 때 카를 5세가 실제 전투에서 창을 사용했는지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그 목적에 있어 그림은 상징적 측면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로마의 계승자로 위치시킴과 동시에 가톨릭의 수호자로 위치시키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카를5세가 초상화를 통해 강조하고자 했던 지점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기마 초상에서도 이어진다. 그녀가 기마 초상 속 주인공으로 나타났을 때 그것은 계승 분쟁으로 인한 제국의 혼란을 수습한 군주라는 이미지를 내세운 것이었다. 또한 기마 초상이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내포하고 있는 상징으로 인해 과거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광을 실현했던 군주들과의 연속성까지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다시 명백한 차이점이 드러난다. 카를 5세의 초상을 비롯한 다른 합스부르크 왕가의 기마 초상에서 황제의 모습은 무구를 착용한, 금방이라도 전투에 돌입할 것만 같은 모습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마리아 테레지아의 기마 초상에서는 그러한 암시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녀의 복장은 비록 칼을 쥐고 있기는 하지만 전투를 위한 복장이 아닌 화려함을 과시하기 위한 복장에 가깝다. 이것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자신을 정복 군주라기 보다는 외적의 침입에 맞서는 방어자로, 호전적인 통치자라기 보다는 자애로운 통치자로 시각화하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실제 그녀는 자신을 Landesmutter(국모)로 상징화하고자 했는데 이러한 단어 속에는 제국 내 다민족들을 화합시키는 존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평화와 화합을 가져오는 통치자라는 이미지는 또 다른 초상화에서도 드러난다. 1844년 제작된 작품에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미네르바에 의해 월계관이 씌워지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로마의 판테온을 연상시키는 장소와 월계관이 암시하는 로마와의 연관성은 과거 합스부르크 왕가의 예술품에서 빈번하게 드러나는 도상이기에 특별한 무엇은 아니다. 하지만 독특한 기물이 눈에 띈다. 관람자가 보는 화면에서 우측, 마리아 테레지아의 옆의 좌대에 스핑크스가 앉아 있다. 스핑크스는 관람자, 마리아 테레지아를 보지 않고 뒤쪽에 있는 무언가를 보고 있는데 관객은 그것이 후경에 위치해 있는 깃발, 헬멧, 검 등 전쟁과 연관된 소품들임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사실 유럽의 초상화, 특히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초상화에서 스핑스크가 아주 이질적인 무엇은 아니다. 18세기를 기점으로 강하게 불기 시작한 유럽 바깥 지역에 대한 호기심이 다양한 문화적 형태로 나타났고 그러한 사례 중 하나가 바로 스핑크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스핑크스를 이집트에 대한 문화적 호기심이라고 이해할 수는 없다. 당대의 정치 철학에 관한 글에서 스핑크스는 단순히 이집트를 상징하는 것은 넘어 지성을 갖춘 여성(스핑크스는 여성으로 표상되는 것이 일반적이다)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18세기의 어떤 평자를 스핑크스가 군주의 힘을 표현하는 상징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스핑크스를 둘러싼 의미의 그물망을 생각했을 때 마리아 테레지아의 그림에서 스핑크스의 역할이 무엇인지 드러난다. 아직까지 왕위를 둘러싼 혼란이 끝나지 않았을 무렵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 그림을 통해 통치에 적합한 여성이자 합스부르크 왕가를 둘러싼 충돌을 일소하고 평화를 가져오는 존재로 인식되기를 바랬다. 이 그림이 오스트리아가 아닌 코펜하겐에 있는 크론보르 성에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요컨대 그림은 마리아 테레지아 본인의 소망이자 대내외적인 천명이었다.
이처럼 평화는 마리아 테레지아 초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한 개념이다. 비록 그의 치세 절반이 전쟁으로 점철되었고 짧은 평화를 제외하면 대내외적인 마찰에 시달렸다고 해도 그것이 초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평화와 화합의 군주로서의 마리아 테레지아를 위협하지 않았다. 앞서 언급 했듯 초상화는 하나의 프로파간다였다. 그것이 당대의 국제 정세와 동떨어진 무엇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은 카를 5세의 초상에서 황제가 창을 들고 있었냐 아니냐로 싸우는 것 만큼이나 무의미하다. 합스부르크 왕가를 둘러싼 정세가 어떻게 변하든 그것은 일종의 캐치프레이즈로 마리아 테레지아 집권기를 상징하는 국가적 이미지로 남아야하기 때문이다. 1777년의 한 초상화에서 그러한 의지를 또 다시 찾아볼 수 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나고 수십 년 후 가족의 죽음이라는 개인적 풍파와 대외적 충돌 속에서 그녀의 화려했던 복장은 무채색으로 변했고 젊은 공주는 노년을 바라보는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개인적인 변화 속에서도 자신을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 화환을 쥔 여인으로 묘사된 평화의 알레고리는 그녀의 뒤편을 지키고 있다. 물론 쇤부른 궁의 개인 침실에 걸려 있었다는 이 그림이 오랜 기간 지속된 마리아 테레지아 치세 전부를 설명하지는 못할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마리아 테레지아를 묘사한 다양한 초상화들은 그것의 목적, 전시 장소, 제작 의도에 따라 풍부한 이야기거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그림이 그녀의 치세 동안 정치적 몸이 어떠한 방식으로 시각화되었는지에 대한 하나의 증거로서는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신의 통치 이미지를 18세기 여성성을 드러낸다 여겨졌던 관념들과 결합해 시각화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 결과 탄생한 무수히 많은 초상화들은 치세 기간 동안 합스부르크 가문이 어떠한 문화적 전략을 가지고 통치 권력을 시각화했는지 보여주고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 시기 다른 유럽의 왕실들처럼 시각적인 것이 가진 정치적 힘을 잘 알고 있던 군주였다. 글을 마무리하며 이와 같은 시각물의 정치적인 힘, 특히 대외 관계에 있어 그것이 가지는 힘에 관해 이야기 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한 가지 그림을 소개하고자 한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예술이 정치와 긴밀하게 연결될 때 그것이 중요한 정치적 프로파간다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일찍부터 인식했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 자신의 초상화를 보낼 때도 그러한 정치적 고려를 계산에 넣곤 했다. 특히 그녀는 초상화를 보낼 때 그림의 목적과 장소에 걸맞게 자신의 모습을 마치 카멜레온처럼 바꾸곤 했다. 1779년 스웨덴의 그립스홀름 성에 있는 초상화 갤러리에 보내진 그림은 그것의 대표적 사례다. 그녀의 치세 후반기 초상화들이 미망인의 복장을 입고 있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화려한 복장을 입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모습은 매우 이례적이다. 여기에 더해 그녀가 입은 복장이 1840년대 초상화에서 자주 보이던 헝가리왕 대관식 복장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그림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증만 늘어난다. 답은 그림이 걸리는 장소에 있다. 스웨덴의 왕 구스타브 3세는 그립스홀름에 있는 갤러리를 건설하며 유럽 왕들의 초상화를 모아 전시하고자 했다. 이러한 전시 방식은 18세기에는 상당히 낯선 방식이었는데 많은 왕족 초상화가 혈연적 친연성에 의거해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즉, 일반적인 왕궁에서 초상화는 통시적 관점에 의거해 가문의 시조부터 현재의 왕과 그 주변 친인척들의 초상을 하나의 흐름처럼 전시했다면 그립스홀름에 있는 갤러리는 공시적 관점에서 동시대 유럽 왕들의 초상을 혈연적 유사성과 관계 없이 전시했다. 이러한 전시 방식은 일찍이 덴마크의 크리스티안보르 궁전에서 먼저 시도된 바 있었는데 이곳에 보내는 초상화에서도 마리아 테레지아는 동시기의 초상화와 다르게 화려한 복장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렇듯 유럽 각국의 왕들의 초상화가 모인 공간은 일종의 상징적 회담장과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이러한 공간에서는 통시적 방식의 전시가 암시하듯 혈연적 기원과 그것의 지속성이 강조되지 않는다. 오히려 두드러지는 것은 그림이 전시되었을 당시 통치자들이 어떠한 이미지로 표상되었는가다. 그런 점에서 보았을 때 마리아 테레지아가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을 상징하는 다양한 도상들과 함께 나타난 것은 그녀가 유럽에서 그러한 표상되고 있음을 혹은 그녀 자신이 그러한 이미지를 대외적으로 강조하려고 했음을 암시한다. 이것은 두 개의 몸이라는 담론이 보여주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또 다른 모습이다. 요컨대 남편과 딸들의 사망 이후 미망인의 복장을 입은채 등장하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초상화는 단지 그녀의 심리상태에 대한 반영에 불과한 것일까? 그보다는 미망인의 복장을 입은 통치자의 모습이 자애로운 혹은 남편으로 대표되는 가정에 충실한 여성 이미지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신민들에게 자신의 통치 전략의 한 측면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수단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그녀의 그림 속에서 통치 전략이 아닌 슬픔, 우울함과 같은 개인의 감정을 읽어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 때 슬픔, 우울함의 주체는 정치적 몸으로서의 마리아 테레지아인가 아니면 육체적 여성으로서의 마리아 테레지아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둘 다라면 그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점은 어디인가라는 문제가 꼬리를 물고 따라오게 된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마리아 테레지아의 초상화는 쉽사리 독해할 수 없는 두꺼운 상징의 그물망을 거둬낸 뒤에야 그것의 온전한 의미가 독해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의미의 망을 풀어냈을 때 초상화는 궁전을 장식하는 화려한 장식이 아닌 당대의 정치 상황과 이를 헤쳐나가고자 시각적 수단을 활용했던 어느 통치자의 고민의 흔적으로 읽힐 것이다.
※참고문헌
마틴 래디, 『합스부르크 - 세계를 지배하다』, 까치, 2022.
Andrew Wheatcroft, The Habsburgs: Embodying Empire, 1996.
Mihaela Vlăsceanu, Imperial Identity Seen Through Art. The Case of Maria Theresa, Gender Studies 20, 2021.
Michael Elia Yonan, Empress Maria Theresa and the Politics of Habsburg Imperial Art, 2011.
Michael Elia Yonan, Picturing Empress Maria Theresa in Eighteenth-Century Denmark, Sweden, and Russia, Die Repräsentation Maria Theresias. Herrschaft und Bildpolitik im Zeitalter der Aufklärung,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