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미술/한국 근대 미술

한국 근대 미술가 열전 (1) 미술에서 근대란 무엇인가

공식 2023. 7. 13. 08:01

 

김관호 , < 자화상 >, 1916, &nbsp; 캔버스에 유채 , &nbsp; 동경예술대학 .

 

앞으로 10여 회에 걸쳐서 한국근대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사실 이 기획은 2014년에 간간히 올리던 한국 근현대 미술가들에 대한 글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당시에는 서울 일대에서 활발하게 열리던 한국근대미술 전시에 맞춰 나름 시의성 있는 글을 쓰려고 했기에 시대나 양식에 있어 일관성도 없었고 심지어는 한국근대미술사에서 잘 다루어지지 않는 화가들을 마치 빈번히 언급되는 화가인양 다룬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개론서에 나오는 일반적인 틀에 맞추어 한국근대미술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짧막하게 다루어보려고 합니다. 본격적인 작가론을 다루기보다는 간략한 작가, 작품 소개 정도로 그치는 글이 될터이니 구체적 정보를 원하시는 분들은 논문 검색을 하시거나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비치된 도록을 들춰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시작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미술에서 근대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입니다. 미술에서 근대란 무엇일까요? 결코 쉽지 않은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많은 학자들이 나름의 논리를 내세워 근대를 규정하려 했습니다. 특히 1990년대 중반 근대미술기점에 대한 논쟁이 촉발된 이후 근대의 범위와 정의에 대한 여러 제안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에 와서야 이러한 논쟁이 시들고 각 논자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합의된 두루뭉술한 경계선 안쪽에서 근대 미술이 논의되는 분위기입니다만 아직까지도 이러한 논쟁은 종결된 것이 아니라 각 논문들 속에서 직간접적으로 벌어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입니다.

 

시대 구분 논쟁은 이러한 논쟁이 있었던 여타 학문 분과들에서도 그랬듯 딱 맞아 떨어지는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몇 가지 잠정적으로 합의된 공통 요소들을 암묵적으로 수용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논의의 폭을 확장시킬 뿐이죠. 한국근대미술사 영역에서 그러한 합의된 선이라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만 본 연재는 이 중에서 '시각 중심'이라는 말을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로 뽑아볼까 합니다.

 

시각 중심이라는 말은 단어에서도 짐작할 수 있겠지만 미술이 여타 다른 요소들보다 시각적인 요소를 우선시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미술이 당연히 시각을 중시하지 다른 것을 중시하냐고요? 언뜻 생각하기에는 그럴 것 같아보이지만 의외로 우리의 눈은 대상을 그 자체로 바라보는 것에 큰 어려움을 느낍니다. 어쨌든 눈은 뇌와 연결되어 있고 뇌는 본인이 살고 있는 사회, 문화, 지리적 환경의 여러 정보들을 습득하기 때문에 어떤 대상을 볼 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배경 지식을 대상에 투과합니다. 그렇기에 대상을 관찰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미술은 성경, 신화, 역사 등 여러 맥락의 장막을 들춘 뒤에야 가능한, 대단히 어려운 영역의 미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술사에서 이러한 미술은 흔히 자연주의 혹은 시각 중심의 환영주의의 전통에 서 있다고 말하며 이러한 시각 중심의 환영주의를 근대 미술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시각 철학의 중요한 관점들 중 하나입니다.

 

실제 눈으로 대상을 보고 그린 작품들은 근대 이후로 우세를 점하게 됩니다. 다만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시각적인 요소를 우선한다는 말이 그 이면에 존재하는 내러티브를 완전히 배제한다는 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러한 미술은 19세기 말에 가서야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며 그것이 작품이라는 형태로 등장하는 것은 20세기 초 추상 미술이 등장한 이후부터 입니다. 문제는 결국 그런 내러티브가 있냐 없냐의 문제가 아닌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내가 받아들이고 표현했느냐에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추가적으로 우리는 이 내러티브라는 부분이 한국 근대 미술의 한 축을 형성하는 경우도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합니다. 전차가 다니는 경성의 풍경과 그곳을 누비는 모던 보이, 고랫적부터 살아오던 민중들의 "향토적" 모습 등 당대의 여러 풍속과 문화들이 화가들의 화풍에서 등장할 때 그것은 근대의 한 편린으로 읽혀질 수 있으며 그렇기에 그러한 대상을 포착한 작품들을 근대 미술의 범주에 넣을 수도 있겠지요.

 

한편 위의 논의와 궤를 같이해서 시각의 우세라는 것은 결국 내가 본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며 그렇기에 주체에 대한 자의식을 포함한다는 것도 주요한 논의점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렇듯 근대 미술의 탄생 동력을 주체, 대상의 이분법적 구분과 이것의 시각적 구현으로 보는 관점을 이 연재에서는 채택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어쨌든 이 글의 목적은 근대 미술을 심층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닌 미술사의 흐름에 따라 작품, 작가를 간략히 소개하는데 주안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근대 미술의 척도로 여겨지는 시각 중심이라는 말은 그 의미를 조금 축소시켜, 대상에 대한 관찰과 그에 따른 묘사를 기반으로 하는 미술로 이해해도 큰 무리는 없겠습니다. 

 

정선 , &nbsp; < 금강전도> , 1734 , &nbsp; 종이에 수묵담채 , &nbsp; 호암미술관 .

 

이처럼 근대 미술을 시각 중심의 미술로 보는 것은 일견 설득력있게 들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많은 의문점을 낳기도 합니다. 가령 조선시대 미술만 해도 대상의 정확한 묘사를 보여주는 여러 작품들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신사임당의 것으로 알려진 초충도의 정확한 묘사는 말할것도 없거니와 18세기 진경산수화가들이 그린 금강산은 오늘날 찍은 사진과 종종 비교할 정도로 세부 묘사의 측면에서 뛰어난 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실제로 시기구분론에 대한 여러 논의들 중에서는 이러한 점에 착안해 한국 근대 미술의 출현을 18세기까지 올려서 보는 논자들이 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존재했었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많은 논자들은 그러한 견해를 채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제도, 형식, 내용 등 이유는 다양하지만 억지로 종합해보면 진경산수화 등으로 대표할 수 있는 실경산수의 전통이 19세기에 들어 사실상 맥이 끊겼고 이로 인해 실경 전통에 기반한 사조들을 모더니즘의 일환으로 바라볼 수는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습니다. 이는 진경산수론으로 대표할 수 있는 조선의 사생 전통이 모더니즘의 하위 개념 범주이자 모더니즘의 속성이라 볼 수 있는 역사적 모더니티와 미학적 모더니티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찍이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가 삽화가 콩스탕탱 기스의 모더니티를 평가하기 위해 사용했던 현대 생활의 화가라는 말은 이에 대한 구체적 힌트를 줍니다. 즉, 18세기의 진경산수화는 산업화 이후 등장한 근대적 요소와 그에 따른 파생적 양상인 근대 생활을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미학적 모더니즘이 그러하듯 근대화 양상을 비판하는 일군의 작품 경향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결정적으로는 그러한 비판 등을 작품 자체의 내적논리(형식주의 논리라고 풀어 쓸 수 있는)로 풀어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현대 미술의 선조격으로 평가하는 프랑스의 화가 에두와르 마네를 이야기할 때 평면성, 반연극성 등의 형식적 요소를 현대 미술의 징후로 보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요컨대 그는 단순히 비너스가 아닌 사창가의 창녀를 그렸다고 해서 현대 미술의 아버지로 평가받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진경산수화가들에게 그들 고유의 형식주의적 논리는 여타 외부적 맥락들, 가령 이론에 있어서는 성리학, 미술에 있어서는 원말사대가로 대표할 수 있는 문인화 전통에 저항하는 형태로 사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그들 또한 과거, 더 올바르게 말하면 바로 직전 시기의 화풍에 반발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더 먼 과거를 소환하거나 이를 참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를테면 동양의 문인화가들은 명의 절파를 극복하기 위해 원말 사대가를 이용한다던가 더 과거의 북송, 남송 시기 화풍나 5대 10국 시기의 화법을 등장시켰는데 이는 그들이 복고풍을 수용 혹은 재해석 하는 방식으로 과거를 뛰어 넘으려 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글의 행간에서도 알 수 있듯 제가 보는 근대 미술 기점론은 이른바 근대주의적 가정을 깔고 있는 것으로 역사가 고대-중세-근대로 발전한다는 사관을 전제로 깔고 들어가고 있고 서구 근대를 근대의 기준점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논쟁의 여지가 많습니다. 실제로 최근 나오고 있는 근대미술사 논문들은 서구의 역사상으로 설정한 시기 구분을 타파하고 독자적인 시기 구분을 정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전초작업으로 근대 속에서 전근대적 요소라 여겨졌던 것을 찾는다거나 전근대적인 것이라 여겨졌던 요소들의 내적 논리를 규명하는 작업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글은 본격적으로 이러한 시기 구분에 대한 논쟁을 다루기 보다는 보다 널리 통용되고 있는 근대 시기를 기준점으로 삼아 화가들을 소개하는 정도로 그칠 것이기 때문에 더 깊게 들어가지는 않겠습니다.

 

한국 근대 미술은 오늘날 많은 미술 전공자들, 특히 젊은 미술 전공자들에게 가깝고도 먼 시대입니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인 그림자의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날 많은 미술전공자들은 먼 유럽에 있는 거장들의 작품들에 더 익숙하고 또 그곳에서 작품의 영감을 얻고자 합니다. 하지만 일찍히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며 나름의 화풍을 구축하려고 했던 미술가들의 고군분투는 오늘날의 작가들에게도 분명 울림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 한편으로 역사 애호가들에게 한국 근대 미술이라는 영역은 사실상 암흑 속에 묻힌 것과 같습니다. 정치, 경제사에 집중되어 있는 역사 애호가들의 관심사로 인해 한국 근대 미술은 주목을 받지 못했고 기껏해야 이중섭, 박수근 등의 이름이 간간히 커뮤니티에 올라올 뿐입니다. 비록 많은 작가들을 소개할 수는 없겠지만 이번 연재를 통해서 글을 읽는 사람들이 근대라는 시대의 편린을 포착한 화가들을 한 번쯤 생각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19년도에 모 역사카페에 올렸던 연재글을 재업로드한 글입니다. 

오랜만에 다시 보니 부족한 부분이 정말 많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