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 미술가 열전 (2) 구로다 세이키
한국 근대 서양화의 명과 암은 이 시기 많은 화가들이 일본 유학생들이라는 점에서 기인합니다. 단순히 일본인 미술가들에게 화풍을 배웠다는 점을 넘어 때론 그들의 사상에 동조하고 나아가서는 그것을 시각적으로 홍보하기까지 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은 이 시기의 서술자들에게 가장 민감한 지점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서양화 부분에 있어서 일본의 영향은 매우 심대했으며 그렇기에 이를 제외하고는 한국 근대 미술사를 온전하게 서술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감정이 어떻던 간에 결국 일본 미술의 영향 하에서 한국의 서양 화단이 성장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사실 이것은 근대 미술의 후발주자라고 볼 수 있는 중국, 한국의 미술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사항이기도 합니다. 중국의 미술에서 이른바 영남화파라 불리는 광저우 지방 중심의 일본 유학생들이 등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양화에서도 일본, 특히 동경미술학교 유학생들이 식민지 시기 미술계의 주축을 이뤘으며 이들이 역사적으로도 의미있는 작품들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미술사에서 조명 받고 있는 많은 양화가, 특히나 1910년 이후로 해서 등장하는 소위 "최초의 서양화가들"은 대부분 동경미술학교의 직간접적인 영향권 내에 있으며 이들이 후일 조선총독부 주관하에 열리는 선전의 주요 수상자, 심사위원들이 되기 때문에 이들의 맥을 짚는 것은 한국 근대 미술이 어떻게 시작되었나를 파악하는데 유용한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물론 역사적 현실이 이 시기 미술을 오늘날 어떻게 평가해야 하느냐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것입니다.
구로다 세이키(黒田清輝, 1866~ 1924)는 1910-20년, 아니 일제강점기 통틀어 한국의 서양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행사한 미술가입니다. 그는 1896년 동경미술학교 양화과의 교수로 재직하며 동아시아 각국에서 몰려오는 화가 지망생들을 키워냈고 그 결과 동아시아의 초기 서양화풍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1886년 법률 공부를 위해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갔다가 그곳에서 미술로 진로를 변경한 인물입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서양의 물결로 말미암아 공부성 산하의 공부미술학교를 중심으로 서양식 미술 교육법과 양화풍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때의 양화는 하나의 순수예술이라기보다 산업의 일환으로 여겨지고 있었기에 본격적인 서양화의 전파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문화계에서는 국수주의적인 물결로 말미암아 동양화에 대한 긍정적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양화를 소홀히 했기에 이를 배운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몇몇 인물들은 공부미술학교가 아닌 서양화의 본산인 프랑스, 영국 등지에서 그림을 배워와 일본 미술계에 새바람을 이끄는 데 이들 중 한명이 바로 구로다 세이키였던 것이지요.
그는 파리에서 아카데미 화풍을 가르치는 라파엘 콜랭의 화실에 들어가 수학합니다. 라파엘 콜랭은 사실 서양근대미술사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데 아카데미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인상주의의 일부 기법을 차용해 소위 "살롱 인상주의"풍의 그림을 그렸던 화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콜랭의 작품 중 하나인 <Floréal>은 살롱 인상주의의 전형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작품 속에서 배경은 인상주의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붓질이 강조되어 있고 다소 불분명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는 빛과 대기의 효과를 화폭에 구현하려 했던 인상주의의 풍경화풍이 작품에 적용된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달리 전경에 있는 인물은 신고전주의자인 앵그르나 더 후대의 부그로를 연상케하는 아카데미 인물화풍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붓질이 거의 보이지 않는 매끈한 마무리와 관능적인 몸짓 등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재밌는 것은 서로 상이한 두 화풍이 한 폭에 모아져 있다 보니 빛의 효과라는 것이 불균등하게 적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후경의 자연이 빛의 효과가 일관되게 적용되어 있는데 반해 인물은 마치 다른 그림에서 붙여넣기를 한 듯 빛의 효과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이 이를 말해줍니다. 콜랭의 화풍을 배운 구로다 세이키는 일본 귀국 이후 이 화풍을 자신들의 제자들에게 전달합니다. 물론 그가 단지 스승의 화풍을 그대로 모방한 것은 아닙니다. 구로다 세이키는 라파엘 콜랭과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구로다 세이키는 자신의 정체성인 동양인 화가라는 점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에 따라 서양화풍을 따르면서도 주제의 측면에 있어서는 일본적인 주제를 추구했으며 이것을 자신의 생애 말년까지 이어갑니다. 또한 그는 인상주의 기법을 보다 적극적으로 채용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1898년 작품 <나무그늘>에서 알 수 있듯 배경뿐만 아니라 인물들에게도 일관된 빛의 효과를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 이를 말해줍니다. 앞서 언급했듯 파리에서 돌아온 구로다 세이키는 귀국 후 많은 제자들을 키워냅니다 그 제자들 중에서는 조선에서 유학온 사대부 출신의 학생 고희동도 있었는데 바로 이 인물이 오늘날 한국 근대 미술사에서 최초의 양화가로 기록되는 인물입니다. 이 인물에 대해서는 다음편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