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미술/한국 근대 미술

한국 근대 미술가 열전 (10) 임용련, 전쟁에 휘말린 유학파 화가

공식 2023. 8. 7. 11:39

 

<에르블레 풍경>, 종이에 유채, 1930, 국립현대미술관

 

1982년 한국근대미술연구소장이었던 이구열은 일제강점기 유학파 화가였던 임용련(1901~1959)의 그림을 찾았다는 전화를 받습니다. 그렇게 찾아간 자리에서 그가 목도한 것은 임용련의 대표작이었던 <에르블레 풍경>(1930)이었습니다. 사료 속에만 존재했던 잊혀진 작가는 그렇게 세상 밖의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활동했던 대부분의 작가가 그렇듯 임용련의 생애 또한 베일에 쌓여 있습니다. 지금까지 연구된 바에 따르면 임용련은 평안남도 진남포 출신으로 배제고등보통학교에 재학했다고 합니다. 그의 인생에 중대한 변곡점이 생기는 것은 1919년에 들어서입니다. 임용련은 당시 3.1 운동에 참여해 일제 경찰의 수배령이 떨어졌고 그 때문에 중국으로 망명합니다. 중국에서 임용련은 임파라는 중국식 이름으로 활동하며 난징에 있는 남경금릉대학에 입학합니다. 당시 남경금릉대학은 조선인들이 많이 있었고 중국학을 제외한 모든 수업을 영어로 진행했는데 이것이 미국 유학에 있어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합니다. 1921년 임용련은 임파라는 이름으로 미국 유학을 떠나 1923년 시카고 미술 학교에서 수학합니다. 이후 시카고 미술 학교에서 임용련을 가르쳤던 유진 프랜시스 새비지가 예일 대학교로 옮기자 그를 따라 1926년 예일대학교로 편입해 1929년 졸업하게 됩니다. 예일대학교 재학 시절 임용련은 뛰어난 성적으로 수석의 자리를 차지했고 이에 대한 특전으로 1년간 유럽 여행을 다녀올 수 있는 장학금을 지원 받아 프랑스로 떠납니다. 

화가로서의 본격적인 커리어는 그가 장학금으로 파리에 정착하면서 시작됩니다. 1929년 파리에 도착한 임용련은 파리에서 기차로 40분 거리에 위치한 에르블랭에서 아내이자 화가인 백남순과 함께 정착해 작품 활동을 이어갑니다. 이 시기 임용련의 활동은 단편적으로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른 아시아 도불 유학생들과 비교했을 때 그가 가지고 있는 커리어의 독특한 측면은 아카데미나 서양인 화가의 개인 화실에서 수학하는 것이 아닌 살롱전에 출품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그가 이미 시카고 미술학교과 예일대학교에서 미술을 배운 화가였기 때문에 가능한 행보였습니다. 

 

<십자가상>, 종이에 연필, 1929, 국립현대미술관


미국과 프랑스 체류 시기 임용련의 작품은 현재까지 세 점이 전해지는데 이 중 한 점은 흑백 도록으로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미국 유학 시기 그린 <십자가상>(1929)은 예일대 재학 시절 그려진 작품으로 추정됩니다. 82년 이구열에 의해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으며 00년 미국에 있는 수집가에 의해 그 실물이 확인된 작품입니다. 이 작품에서 독특한 것은 무릎을 꿇고 있는 우측의 인물입니다. 전통적 종교화라면 사도 요한이 있어야 할 자리에 현대식으로 짧게 머리를 자른 남성이 존재합니다. 이처럼 이례적인 인물의 존재에 대해 이지희는 자신의 논문에서 그림 속 남성이 화가 자신의 자화상이며 이는 일제 경찰에 쫓겨 떠돌이 생활을 해야만 했던 작가 자신의 고뇌를 투영하고 있다고 분석한 바 있습니다.

한편 <에르블랭 풍경>은 임용련의 파리 체류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작품은 언덕에 위치한 신혼집에서 세느강을 내려다 보며 마을의 풍경을 그린 것으로 거친 붓질과 마티에르와 함께 화려한 색채가 돋보입니다. 앞서 언급했듯 이 작품은 임용련이 동료화가인 백남순과 결혼하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완성된 그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이국적인 자연 풍경을 그렸다는 것을 넘어 갓 결혼한 부부의 추억을 담은 풍경화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임용련, 백남순 부부, 한겨례신문 기사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860219.html에 실린 사진

 

<에르블랭 풍경>을 그린 1930년 7월, 임용련은 식민지 조선으로 귀국해 한국 최초의 부부동반전시회를 개최합니다. 동아일보 사옥에서 열린 전시에서 임용련은 백남순과 함께 82점의 작품을 전시했는 데 이 시기 전시한 작품들은 대부분 현전하지 않고 심지어는 도판도 남아있지 않아 신문이나 잡지에 단편적으로 언급된 몇 점의 작품만을 통해서 그 경향을 파악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 중 흑백도판으로 전해지는 <하고>(1930)는 비현실적인 공간에 고전주의적으로 묘사된 나체의 인물군상이 표현되어 있는 데 이를 통해 임용련이 동시기 화가들에게 영향을 큰 주었던 퓌비 드 샤반느와 유사한 화풍을 구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20년대 구미유학파들과 마찬가지로 임용련 또한 식민지 조선의 가장 권위있는 전시인 선전을 거부하고 독립전의 길을 선택합니다. 1930년 임용련은 휘문고보 강당에서 열렸던 제10회 서회협회 기념전에 <풍경>을 출품한 것을 시작으로 1934년 결성한 목일회와 이를 계승한 목시회에서 활동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갑니다. 하지만 이 시기의 작품들 또한 대부분은 유실되어 이름만이 전해지고 있으며 1940년작인 <금강산>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임용련의 활동 중 특기할만한 점은 그의 교육 활동에 있습니다. 임용련은 1931년부터 정주의 오산학교에 미술 및 영어 교사로 재직하며 1940년대 일제 당국의 강압적인 정책으로 작품 활동이 어려워지자 교육 활동에 집중합니다. 이 시기 임용련에게 그림을 배운 대표적 인물로 이중섭을 꼽을 수가 있는 데 임용련을 다룬 많은 글에서 이중섭이 자신만의 화풍을 정립함에 있어 스승인 임용련의 영향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해방 이후 임용련과 백남순 부부는 38선 이북이 공산치하에 들어서게 되자 서울로 내려와 살게됩니다. 이후 임용련은 서울 세관 관장으로 재직하며 미술 활동과는 멀어지는데 이것이 사실상 사회적 커리어로 임용련의 마지막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현재까지 확인된 바 임용련은 인민군 혹은 괴한들에게 끌려가 행방불명 혹은 피살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확실치 않아서 몇몇 기사에는 1959년까지 생존해 있다고 표기되어 있거나 1951년 평양으로 납북되어 총살되었다는 기사도 존재합니다. 더욱 더 큰 비극은 전쟁 중 그의 작품이 대부분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해방 이후 부부는 월남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작품을 정주에 있는 작업실에 두고 내려왔는데 그곳에 있던 작품들이 전쟁 중 폭격을 맞아 전소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임용련은 1930년대 그가 보여준 활발한 행보에도 불구하고 베일에 쌓인 작가로 남았으며 1980년대 지인의 집에서 발견된 몇몇 작품이 빛을 보기 전까지 그 활동을 확인할 수 없는 작가로 남아있었습니다.  미국, 프랑스를 거쳐 활발한 활동을 했던 작가. 하지만 전쟁에 휘말려 단 몇 점만이 남아있는 작가의 삶은 마치 혼란의 시대를 오롯히 견딘 한반도의 역사를 닮은 듯합니다.     

 

참고문헌
손영옥, [명작 in 이건희 컬렉션] 나혜석이 질투했던 파리 유학파… 비운의 화가가 남긴 걸작, 문화일보, 2021, 08, 02
노형석, 분단과 전쟁이 묻어버린 천재 화가의 프랑스풍경화, 한겨례, 2018, 09, 01
전은자, 이중섭의 미술교사 백남순과 임용련, 제주일보, 2021, 11, 15
이지희, 1920~30년대 파리 유학 작가 연구, 인물미술사학, vol.8,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