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미술

풍경화 - 그 계보와 간략한 역사

공식 2023. 7. 24. 09:13

19세기 미술을 전반적으로 조망했을 때 이 시기의 변화를 주도한 장르는 풍경화였다. 하지만 그것이 예술계에서 주도적인 장르로 부상한 것은 19세기의 기준으로 봤을 때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독립적인 장르로 발전하기 전, 풍경은 두 가지 카테고리에서 부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하나는 후일 역사화라는 장르로 묶이게 되는 성경, 신화, 역사를 모티프로 한 회화에 배경으로 삽입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가문 초상화라 불리는 장르에서 인물들의 배경으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풍경화가 하나의 독립적 장르로 등장하게 된 것은 17세기 초의 일이다. 이는 도시와 성장과 큰 관련이 있다. 도시의 성장으로 그곳에 살던 시민들에게 자연은 일종의 도피처이자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대변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또한 도시의 거주지에 걸기 적합한 소규모의 장르화에 대한 수요가 증가한 것도 풍경화의 성장에 자양분이 되었다. 다른 한편 풍경화는 기록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도시의 통치자들은 통치 지역을 시각화 하는 과정에서 풍경화를 도입했고 그 결과 도시와 그 주변의 풍경을 담은 기록화들이 늘어났다. 이런 경향은 해외 식민지 개척 사업이 활발하게 벌어진 18-19세기에도 지속되어 기록적 풍경화의 한 전통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풍경화가 발달한 최초의 지역은 도시가 발달한 지역들이었다. 이탈리아와 네덜란드, 독일의 일부 소도시들에서 독립적인 풍경화 장르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이 때문이다.

 

클로드 로랭, 로마 포룸 폐허가 있는 풍경(Capriccio with ruins of the Roman Forum), 1634, 남호주 미술관

 

살바토르 로사, 머큐리와 아르고스가 있는 낭만적 풍경(Romantic Landscape with Mercury and Argus), 1655, 빅토리아 미술관
야콥 반 루이스달, 폭포가 있는 풍경(Landscape with Waterfall),  1660-1670경, 레이크스 미술관
마인데르트 호베마, 미델하르니스의 가로수길(The Avenue at Middelharnis), 1689, 런던 내셔널 갤러리

초기 풍경화의 역사에서 두드러지는 지역은 로마였다. 로마에서 오늘날의 장르 구분에 부합하는 순수한 의미의 풍경화가 탄생했다. 이 시기 풍경화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등장했다. 하나는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 1600-1682)으로 대표되는 고전적 풍경화였고 다른 하나는 살바토르 로사(Salvator Rosa, 1615-1673)로 대표되는 비고전적 풍경화였다. 네덜란드에서도 새로운 풍경화 전통이 탄생했다. 야콥 반 루이스달(Jacob van Ruisdael, 1682/3-1682)이나 알베르트 코이프(Albert Cuyp, 1620-1691), 마인데르트 호베마(Meindert Hobbema, 1638-1709) 같은 인물들은 상업으로 번성하고 있던 암스테르담을 중심으로 일상적인 풍경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와 네덜란드 두 지역에서 시작된 풍경화 전통은 이후 각지로 퍼져나갔다. 18세기에 들어 프랑스의 클로드조세프 베르네(Claude-Joseph Vernet, 1714-1789)나 영국의 리처드 윌슨(Richard Wilson, 1713-1782)은 로랭의 전거를 따라 고전적 풍경화를 더욱 발전시켰으며 영국의 토마스 개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 1727-1788)는 네덜란드의 풍경화를 전거로 해 보다 사실적인 풍경화에 몰두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야외 스케치에 대한 중요성이 대두된 시기이기도 했다. 비록 야외 스케치는 풍경화 초기 역사부터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졌지만 그것을 하나의 이론적, 절차적으로 심화시켜 풍경화 제작 과정의 핵심으로 올려놓은 것은 18세기 활동했던 아카데미 교수들과 화가들의 업적이었다.

풍경화 장르가 다시 한 번 큰 도약을 맞이한 것은 18세기 후반 영국에서였다. 이 시기 영국에서는 존 레이놀즈를 중심으로 왕립 아카데미가 들어서고 역사화와 초상화를 장려했다. 하지만 1769년 아카데미가 처음으로 전시를 열었을 때 전시장에 더 많이 보인 것은 초상화나 역사화가 아닌 풍경화였다. 이에 당시 아카데미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레이놀즈는 신고전주의에 기초한 역사화 제작을 강력하게 밀어부쳤고 그 영향으로 풍경화는 한동안 아카데미에서 자취를 감춘다. 그러나 레이놀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풍경화의 유행은 이미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퍼져 있었다. 이 무렵 영국의 수장가들은 그랜드 투어의 성행에 발을 맞춰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 각지에서 그려진 풍경화를 구매했고 그것을 화가들과 일반인들에게 공개했다. 가령 1812년 영국 내셔널 갤러리가 세워지기 전까지 화가들은 런던 교외의 덜위치 갤러리(Dulwich Picture Gallery)에 소장된 다양한 양식의 풍경화들을 습득할 수 있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오늘날 풍경화의 거장이라 불리는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1776-1837)이나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가 등장한 것이다. 

 

토마스 거틴, 베리 포메로이성, 데본(Berry Pomeroy Castle, Devon), 1798년경, 개인소장
로버트 코젠스, 알바노 호수와 카스텔 간돌포의 노을(Albaner See mit Castel Gandolfo, Sonnenuntergang), 1777년경, 개인소장


18세기 말에 들어 영국의 정치적 상황은 풍경화 성장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해준다. 나폴레옹 집권 이후 영국인들의 대륙 여행이 어려워지자 자연스럽게 국내의 자연 환경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다. 북부 웨일즈 지방이나 스코틀랜드 고지대, 잉글랜드 북서부의 호수 지방이 픽처레스크, 즉 그림 같지만 인공적이진 않으며 과장이 없는 자연의 불규칙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풍경으로 각광 받기 시작했다. 화가들은 영국의 독특한 자연 지형을 찾아가 그곳을 담기 시작했다. 동일한 시기 워즈워스로 대표되는 낭만주의 문호들의 작품은 국내의 자연 풍경에 대한 자국인들의 인식을 심화시켰다. 수채화의 유행 또한 풍경화의 유행을 부채질했다. 수채화는 1790년대 영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해 독립적인 협회를 만들고 전시를 열 정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영국의 수채화는 단지 자연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 풍경을 재구성 하는 독자적인 영역으로 나아갔다. 존 로버트 코젠스(John Robert Cozens, 1752-1797)나 토마스 거틴(Thomas Girtin, 1775-1802)같은 인물들은 이 시기 수채화를 단지 기록의 매체가 아닌 예술 작품으로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수채화의 성장은 영국의 역사적 발전과도 궤를 같이했다. 이 시기 영국이 얻게된 막강한 해양력은 해외 식민지의 팽창을 불러왔고 그곳에서의 생활 풍습을 기록할 필요성을 증대시켰다. 휴대성이 뛰어났던 수채화는 그런 점에서 해외에서 사생하는 화가들에게 적합한 매체였다. 사진이 등장하기 전까지 수채화는 제국주의적 팽창을 시각적으로 기록하는 첨병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한편 풍경화는 수채화 뿐만 아니라 유화의 영역에도 정착하여 그 전성기를 누렸다. 터너와 콘스터블은 이런 전성기를 선도한 주요 인물들이었다. 비록 두 작가는 그 예술적 성향에 있어 차이가 있었지만 초상화 중심으로 운영되던 영국 아카데미에 풍경화를 중요 장르로 올려놓았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이들의 성취는 19세기 초 낭만주의 풍경화가 영국 뿐만 아니라 서유럽 풍경화의 지배적인 양식으로 자리매김 하는 데 기여했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떡갈나무 숲의 대수도원 묘지(The Abbey in the Oakwood), 1809-1810, 베를린 구 국립미술관


낭만주의적 풍경화는 유럽 대륙에도 퍼져나갔다. 독일의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는 풍경화에 종교적 색채를 더해 영국의 풍경화와 다른 숭고를 표현했다. 영적 분위기와 함께 기이할 정도로 고요한 풍경은 휘몰아치는 폭풍과 불길, 불안정한 대기의 표현으로 대표되는 터너의 숭고 표현과 대비된다.  이러한 종교적 색채는 드레스덴을 중심으로 하는 일군의 화가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적인 요소였다. 그들은 풍경에 대한 묘사가 신이 창조한 편린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종교에 대한 강한 지향은 클로드 로랭이래 이어져온 고전적 풍경화 또한 굴절시켰다. 독일에서 고전적 풍경화는 중세와 고딕에 대한 알레고리로 변환되어 풍경화의 새로운 경향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동시기 자연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함께 성장하고 있었지만 그것 또한 창조주의 메시지를 충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폭넓게 수용되었다. 비록 얼마안가 자연 과학은 자연에 대한 종교적 믿음에 제동을 걸며 결별하지만 둘은 한동안 공존의 길을 걸었다. 

 

유진 폰 게라르드, 시드니 발원지(Sydney Heads), 1865, 뉴사우스웨일즈 아트갤러리
토마스 콜, 옥스보우, 폭풍우 이후 홀리요크에서 바라본 노샘프턴, 메사추세츠의 풍경(View from Mount Holyoke, Northampton, Massachusetts, after a Thunderstorm- The Oxbow), 1836,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호주와 미국에서도 풍경화의 영향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유럽 각지에서 온 화가들이 새로운 식민지의 풍경을 담기 시작했는데 영국 출생으로 호주와 뉴질랜드, 인도의 풍경을 담았던 아우구스투스 얼(Augustus Earle, 1793-1838)이나 호주 태생의 유진 폰 게라르드(Eugene von Guerard, 1811-1901)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미국에서는 토마스 콜(Thomas Cole, 1801-1848), 프레드릭 처치(Frederic Edwin Church, 1826-1900)를 비롯한 일군의 풍경화가들이 허드슨 강 화파를 이루며 미국 동부의 풍경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부터 시작된 풍경화의 유행은 19세기 전반기 전유럽, 호주와 미국 등 대륙을 오가며 이 장르를 서구의 지배적인 장르로 만들었다.

 

풍경화 급격한 성장은 19세기 민족주의의 성장과도 궤를 같이했다. 그리스, 로마의 보편적 미를 기반으로 발전했던 신고전주의사조는 유럽에서 큰 인기를 얻었지만 그것이 가진 보편성으로 인해 지역의 고유한 특성을 강조하는 낭만주의에게 자리를 내주게된다. 민족주의와 낭만주의의 결합은 민족 고유의 자연 풍경을 재현하는 것이 민족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과 동일하다는 생각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세기 내내 서유럽에서부터 시작해 동부, 북부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국민 화파(National School)가 형성되어 지역 고유의 역사, 문화, 자연을 담기 시작했다. 19세기에 풍경화는 민족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확실한 수단으로 각광 받으며 유럽 전역을 휩쓸었다.

 

카미유 코로, 퐁텐블로 숲(Forest of Fontainebleau), 1834,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클로드 모네, 아르장퇴유의 다리(The Bridge at Argenteuil), 1874,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19세기 중반, 풍경화는 새로운 변곡점에 도달했다. 1830-1850년대에 들어서 프랑스의 바르비종 마을의 퐁텐블로 숲에서 활동한 일군의 화가들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들 또한 영국 풍경화에 영향을 받아 프랑스의 고유한 자연을 그리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 사실주의자들은 풍경화 영역에서의 사실에 대해 집중하며 단지 일상적 풍경을 넘어 이전까지 풍경화가들 조차 주목하지 않았던 대상들을 화폭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활발하게 그려졌던 풍경화는 이후 인상주의의 화가들의 주된 탐구 대상이 되었다. 야외 사생을 기반으로 한 색채와 대기 표현에 몰두했던 일군의 화가들은 높은 채도의 색과 분절적인 스케치풍의 붓질로 인상을 재현하는 새로운 양식을 탄생시켰다. 인상주의 이후 19세기 후반 젊은 화가들 또한 자신들의 새로운 회화를 실험함에 있어 풍경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 시기 풍경화는 단순히 자연을 재현한다는 측면을 넘어 조형 언어의 새로운 실험장으로 여겨졌다. 이런 점에서 풍경화는 현대 미술을 배태한 어머니인 셈이다.

 

20세기에 들어 풍경화는 그 진취적 에너지를 정물화와 인물화에 내어주며 한 시대를 마감한다. 하지만 풍경화의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탐색하길 원하는 작가들에 의해 탐구되고 있다. 60년대 대지 미술은 자연이 단지 소재로 머무르는 것을 넘어 관객과 작품 사이를 매개하는 공간으로 자연을 선택했다. 21세기에 들어 기후 변화와 환경 파괴에 대한 위기가 심화되자 인류세(혹은 자본세)를 테마로 하는 생태학적 작업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20세기 이후 등장한 다양한 작업들은 비록 풍경화라는 회화 장르 구분으로는 묶을 수 없지만 자연과 예술,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매개한다는 점에서 풍경화가 줄 곧 견지했던 예술적 목표를 공유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참고문헌 

이은주, 픽처레스크le pittoresque 미학의 형성과 프랑스 풍경식 정원, 프랑스문화예술연구, vol.29, 2009.

Christine Dixon et al., Turner to Monet : The Triumph of Landscape Painting, National Gallery of Australia, 2008.

Malcolm Andrews, Landscape and Western Art, Oxford University Press,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