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예품의 정치적 활용 - 18세기 합스부르크 왕가와 칠기 공예
그 어떤 다이아몬드도 저에겐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인도에서 온 물건들... 특히 칠기 공예품만이 제게 기쁨을 주는 유일한 물건이군요
-1753년 마리아 테레지아가 리히슈타인 대공 요제프 귄첼에게 보내는 서한
18세기 유럽의 왕과 귀족들은 중국풍 물건에 열광했다. 거실, 응접실, 침실을 비롯한 방 곳곳에 중국을 테마로한 집기와 그림들이 있었고 중국풍으로만 꾸며진 방도 유행했다. 오늘날 시누아즈리라 불리는 18세기 유럽의 문화 현상은 20세기 논자들에게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되었다. 이 중 시누아즈리를 간헐적으로 이어져오던 동서 문화 접변의 한 양상이자 비서구권을 바라보는 유럽인들의 왜곡된 태도로 이해하는 의견은 지배적 해석으로 굳어졌다. 요컨대 시누아즈리는 비문명화된 하지만 나름의 힘을 갖춘 비유럽 타자를 바라보는 이중적 시선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동방에 대한 신비화, 낭만화임과 동시에 야만적이고 계몽되지 않은 세계를 상징했다. 때문에 그것은 단순히 취향을 넘어 이후 전개될 식민지 정복과 착취의 역사를 예고하는 문화적 현상으로 독해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분석은 시누아즈리 현상이 발생한 내재적 원인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비판받았다. 식민주의적 분석은 이국적 물건을 사고 수집하는 직접적 동기를 설명해주지 못했다. 많은 분석에서 그 동기를 단지 취향의 문제로 설명하지만 그것은 이 현상이 때때로 왕실 중심의 국가적 사업과 결합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다. 식민주의적 분석은 시누아즈리의 동기를 지나치게 단순화해 이면에 깔린 차별의 논리만을 부각시킨다는 비판이 있었던 것이다.
합스부르크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칠기 공예품이 주목 받는 것은 시누아즈리의 내재적 동기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1753년의 편지에서도 나와있듯 마리아 테레지아는 칠기 공예품에 대한 남다른 사랑을 드러냈다. 그것은 여왕 사후 소장하고 있던 개인 물품 중 절반이 칠기 공예품이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하지만 그것이 왕실의 권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건축물에까지 쓰였다는 점은 단순한 기호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1769년부터 1772년 사이 마리아 테레지아는 쇤부른 궁의 동쪽에 위치한 비유-라크방(Vieux-Laque Zimmer, 오래된 칠기의 방이란 뜻)을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한다. 이곳은 본래 프란츠 1세가 사용하던 개인서재였지만 1765년 남편의 사망 이후 쓰이지 않던 곳이었다. 방을 새롭게 꾸미면서 여왕은 이곳을 금박을 입힌 중국풍의 칠기 패널과 로코코풍의 브와즈리(장식용 내장재) 그리고 가족초상화로 장식할 것을 명령했다. 그렇게 완성된 방은 쇤부른 궁의 다른 방과 마찬가지로 화려한 모습을 갖춤과 동시에 동양풍의 공예와 서양의 초상화가 결합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완공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곳을 응접실로 사용하면서 내방하는 귀족들과 관료들의 업무를 보고 받는 응접실로 사용했다. 이것은 비유-라크방이 단순히 왕실의 취향을 반영하는 것을 넘어 왕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공간이었음을 의미한다. 금박을 입힌 장식과 가족 초상화의 결합은 그런 점에서 왕가의 영속성과 웅장함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생각했을 때 칠기 패널 또한 유사한 기능을 하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처럼 18세기 유럽 왕실에서 화려하고 이국적인 장식을 통해 힘을 과시하는 것은 보편적으로 사용된 수단이었다. 하지만 왜 하필 다른 물건도 아닌 칠기 패널이 활용된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유-라크방의 개조 과정과 칠기 공예품이 합스부르크 왕실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서유럽과 비교했을 때 중부 유럽에 위치한 합스부르크 제국은 동방에 대한 정보가 상대적으로 느리게 전달되었다. 이는 동방에서 수입된 많은 물품들이 인도,중국,일본풍의 물건으로 불리며 부정확하게 분류되어 있다는 점을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이러한 모호성은 이 시기 유럽의 지식인들과 왕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사항이었지만 합스부르크 왕가는 상대적으로 그 정도가 더 심했다. 그들에게 있어 동방의 나라들은 동쪽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슬람권을 제외하면 모호한 존재들이었다. 더구나 합스부르크 왕가는 카를 6세가 동인도 회사에 대한 국가적 지원을 중단한 이후 줄곧 동방 무역에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동방에 대한 투자가 과도한 국고 유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지만 역으로 동방의 물품이 필요할 때 더 비싼 비용을 들여 물건을 구매해야 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칠기 공예품에 대한 관심은 이런 상황과 연관이 있다. 이 시기 칠기 공예품은 훨씬 더 광범위한 인기를 불러왔던 도자기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더 희소성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희소성이 칠기공예품을 값비싼 명품임과 동시에 이것을 구매한 왕가의 재력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만들었다.
칠기 공예품의 제작 과정이 유럽에서 오랫동안 베일에 쌓여 있었다는 점 또한 희소성을 높이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18세기 중반 도자기 제작 기법이 어느 정도 유럽에서 보편화 된 것과 달리, 칠기 제품의 생산 과정은 여전히 미궁 속에 있었다. 칠기의 광택을 내기 위해 사용된 옻나무는 유럽에 동일한 수종이 없었을 뿐더러 유약은 쉽게 건조해졌기 때문에 수입해 오는 것 또한 여의치 않았다. 이 때문에 칠기는 수공업 분야에 있어 동방의 우위를 상징하는 기물로 여겨졌던 것과 동시에 그것을 소장하고 있는 것이 부의 상징으로 기능했다.
칠기 제품의 희소성은 비유-라크방을 개조할 당시 이에 대한 경제적 문제를 촉발했다. 당시 재상이었던 벤첼 안톤 폰 카우니츠리트베르크(Wenzel Anton Graf von Kaunitz-Rietberg, 1711-1794)는 비유-라크방 개조 과정에서 장식품 구매와 초상화 주문으로 인해 막대한 국고가 유출되는 것을 염려했다. 실제 쇤부른 궁의 중국풍 장식들을 구매하는 과정에서 왕가는 귀족 수집가에게서 물건을 사들이거나 유럽의 사치품 시장에서 직접 물건을 구매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국고 유출은 7년전쟁으로 인한 전비 지출과 맞물려 왕실의 경제적 조건을 더욱 악화시켰다.
비용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왕실은 두 가지 해결책을 마련했다. 하나는 방을 중국풍으로 개조함에 있어 기존에 증여되었던 물건들을 재활용하는 것이었다. 또한 증여품으로 메꿀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자체 제작을 통해 수급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1758년 카우니츠리트베르크가 주도해 설립한 수공예 학교는 이런 목적에서 설립된 것이었다. 수공예 학교는 왕실 수요에 필요한 공예품을 생산하는 것 뿐만 아니라 유럽의 사치품 시장에서 상대적우위에 있는 프랑스, 독일제 사치품들과 경쟁하려는 목적 하에 설립되었다. 수공예 학교는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고 얼마안가 유럽을 대표하는 칠기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비유-라크방에 장식된 패널들 역시 수공예 학교 출신 장인들의 작품이었다.
비유-라크방을 장식한 칠기 공예품들의 탄생 과정은 시누아즈리 현상으로 일반화 할 수 없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독특한 맥락을 드러낸다. 우선 칠기 제품은 유럽에서 도자기 생산이 보편화된 이후 동방의 사치품으로 급부상했기 때문에 이를 소유한 왕실의 경제적 역량을 드러내는 물건으로 여겨졌다. 또한 비유-라크방 장식을 위해 사용된 칠기 패널이 대부분 증여품이거나 수공예 학교의 장인들이 생산한 자체 제작품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국가의 산업적 역량을 드러낼 수 있는 물품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때 산업적 역량은 단순히 중국과의 비교 뿐만이 아니라 프랑스, 독일 등 주변 유럽 국가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드러났다. 특히 칠기 제품에 대한 유행을 선도한 것은 루이14세로 대표될 수 있는 부르봉 왕실이었기 때문에 제품의 수입과 생산 또한 프랑스 장인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즉, 합스부르크의 장인들은 중국과 유럽이라는 이중의 경쟁 상대와 대적해야 했다. 그리고 이 경쟁에서 합스부르크 장인들의 제품이 인정받았다는 것은 동방에 대한 우위 뿐만 아니라 유럽 왕실에 대한 우위를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칠기가 가진 맥락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당대의 문헌에서 칠기 제품은 그것이 가진 물성으로 인해 여러 상징적 함의와 결합되곤 했다. 가령 칠기의 광택을 내는데 사용된 바니시는 본래 목재의 부패와 변색을 막아주며 공예품의 내구성을 강화하는 기능을 하지만 소유자의 광휘, 총명함, 영속성을 상징하기도 했다. 즉, 장식에 있어 칠기는 그 자체로 왕가의 영원성과 영광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 빛을 반사시키는 바니시의 성질은 소유자의 권위와 영향력을 널리 퍼트린다는 점에서 선호되었다. 이것은 일찍이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에서 거울을 이용한 빛의 반사를 왕실 권위의 확대라는 상징적 기능으로 활용한 것과 유사했다. 부르봉 왕가의 거울이 합스부르크 왕가에겐 칠기 패널이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마리아 테레지아가 다수의 칠기 소품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이것을 쇤부른 궁을 방문한 귀족들에게 선물로 나눠주었다는 점은 그것이 가진 상징적 의미를 뒷받침한다. 칠기 제품을 선물로 준 것은 그것이 상대적으로 희소하고 또 값비싼 물건이었기도 했지만 칠기가 지닌 상징적 함의를 전달해준다는 점에서 정치적 행위의 연장선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칠기의 사용은 왕의 권위를 시각적으로 구현한다는 보편적인 목적을 구현할 기물로 여겨졌다. 여기에 더해 칠기의 활용은 합스부르크 왕가가 처한 특수한 사회적 상황과도 연관이 있었다. 서유럽 국가들과 다르게 합스부르크는 다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였다. 때문에 합스부르크 왕의 힘은 화려함과 광채 뿐만 아니라 여러 민족들을 아우를 수 있는 포용력을 드러내는 존재로 재현되어야 했다. 다른 기물도 아닌 칠기 패널이 여왕의 응접실에 활용된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칠기가 가지고 있는 이국적인 속성은 그 자체로 왕가의 영향력이 멀리 동방에까지 미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상징적 역할을 한다. 물론 이러한 방식은 18세기 이전 합스부르크 왕실의 궁전 장식에서도 빈번하게 드러나는 특징이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변화시킨 것은 그 양상이었다. 과거 합스부르크 왕가가 다민족성을 아메리카, 이슬람을 상징하는 여러 기물들에 부여했다면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런 역할을 동아시아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칠기 제품에 부여했다. 이런 변화는 유럽 사회에 퍼진 중국사회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18세기 중국에 대한 여러 서술들에서 중국 왕조를 엄청난 부와 권력을 가진 전제 국가로 묘사했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칠기 제품은 유럽인들이 중국 왕조에 가지고 있는 관념을 합스부르크 왕가의 권위로 변형시킨 시각적 장치였던 것이다.
비유-라크방의 구성은 이러한 측면을 잘 대변한다. 방은 중국 풍경을 묘사한 패널들과 유럽의 고전주의 풍으로 그려진 거대한 합스부르크 가족 초상화가 번걸아가며 병치되어 있다. 칠기 패널과 가족 초상화의 병치는 칠기가 가지고 있는 상징적 함의를 초상화의 주인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킴과 동시에 패널 속 상대적으로 작게 묘사된 인물들과 거대하게 묘사된 초상화 속 인물들의 대비를 드러낸다. 또한 방에 들어선 방문자는 초상화 속 인물이 합스부르크의 일원임을 바로 알아볼 수 있지만 칠기 패널 속 작은 인물들의 정체성을 알아볼 순 없다. 그들은 단지 중국인 혹은 일본인이라는 동방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모호한 존재들로 인식된다. 여기에 더해 칠기 패널의 어두움과 초상화의 밝음의 대비는 마치 무대의 스포트라이트처럼 초상화 속 인물들을 부각시킨다. 비유-라크방 곳곳에 드러나는 시각적 요소들의 대비는 칠기 패널 속 인물과 초상화의 인물의 관계를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관계로 전환시킨다. 그리고 이를 통해 가문 사람들의 영향력이 멀리 동방의 사람들에게까지 미치고 있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비유-라크방은 합스부르크가 당면한 다민족적 속성을 가문의 영광과 결합한 일종의 극장이었다.
역사적 의미에서 18세기 로코코 미술의 화려함은 절대 왕권을 시각화하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하지만 그 화려함의 양상은 국가들마다 천차만별이었다. 비유-라크방을 장식한 칠기 패널들은 이런 특수성을 반영한다. 비유-라크방은 취향의 문제를 넘어 합스부르크의 독특한 정치, 사회적 속성과 긴밀히 연관된 상징의 공간이었다. 권력을 어떻게 시각화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쇤부른 궁의 리모델링으로 화답했다. 이것은 비단 쇤부른 궁을 넘어 유럽의 궁전들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게 한다. 그것이 보여주는 화려한 외양은 분명 사치의 증거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문화를 활용한 통치 전략이 녹아있다. 그런 점에서 비유-라크방의 칠기는 이국적 취미의 반영 혹은 타자에 대한 왜곡된 시선이기도 하지만 권력의 가시화 방식을 드러내는 하나의 사례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참고문헌
Andrew Wheatcroft, The Habsburgs: Embodying Empire, Penguin, 1996.
David Porter, Ideographia: The Chinese Cipher in Early Modern Europe, Stanford Univ. Press, 2001.
Michael Elia Yonan, Veneers of Authority: Chinese Lacquers in Maria Theresa's Vienna, Eighteenth-Century Studies, vol. 37,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