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 미술가 열전 (4) 김관호, 선구자의 불운
2017년, 한국의 모 일간지에서는 조선의 2호 서양화 유학생 김관호(金觀鎬, 1890~1959)를 조명하는 특집 기사가 실렸습니다. 특집 기사의 제목은 “천재화가 김관호의 영광과 좌절” 기사에서는 김관호뿐만 아니라 1910년대 일본에서 유화를 배운 이른바 최초의 서양화가들을 다루며 그들의 파란만장했던 생애에 대해서 비교적 자세하게 밝히며 그들의 미술사적 의의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1910년대, 아직 직업화가에 대한 사회적인 차별이 온존하고 있었으며 미술에 대한 저변이 확대되기도 이전 일본으로의 미술 유학을 감행한 일련의 화가들은 오늘날 한국 근대 미술사의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영광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사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그들의 삶에서 서양화는 영광보다는 불운을, 명성 보다는 스캔들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시기 유학했던 대표적인 화가 4명(고희동, 김관호, 김찬영, 나혜석) 중 한 명을 제외하면 채 10년도 못가 서양화를 포기하며 심지어는 화업을 접기도 했다는 점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사에서 다루고 있는 김관호 또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1915년 고희동이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년 뒤 김관호는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합니다. 그는 평양 부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1908년 명치학원으로 유학을 간 이후 1911년 동경미술학교를 입학, 그곳에서 서양화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합니다. 서양화를 배우는데 큰 어려움을 느꼈던 고희동과 달리 김관호는 서양화를 비교적 수월하게 익혔던 듯 합니다. 비록 27살이라는 매우 늦은 나이에 학교를 졸업했지만 최우등으로 학교를 졸업했다는 점이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일본 문부성 주관 하에 열리는 <일본문부성미술전람회>에도 참여하며 이곳에서 한국인 최초 특선으로 입선하며 당대 미술계에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조선 내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김관호가 동경미술학교에서 최우등으로 졸업한 사실이 신문에 실릴 정도였습니다. 또한 이광수의 경우 《동경잡신》의 〈문부성미술전람회〉에서 “조선인을 대표하여 조선인의 미술적 천재를 표하였음에 깊이 감사한다”고 썼을 정도였습니다. 이것이 이광수의 《동경잡신》에서 문명예찬이 아닌 조선인을 치켜세우는 유일한 대목이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당대 사회에서 김관호의 명성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1916년 김관호가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의 성공가도는 당연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한국 최초의 유화개인전이었던 김관호의 개인전이 1916년 12월 17일 평양 재향군인회 건물에서 열렸을 때만해도 이런 점은 현실화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에 대한 기록은 미술의 역사에서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1923년 조선미술전람회 도록에 등장합니다. 이 전시에서 그는 동경미술학교에서 배웠던 외광파 기법을 활용해 <호수>라는 작품을 출품하지만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단지 입선에 그치고 맙니다. 작품을 둘러싼 스캔들 또한 이어졌습니다. 가장 논란이 되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미술계의 스타로 만들어주었던 작품 <해질녘>이었습니다. <해질녘>은 김관호의 졸업작품이자 앞서 언급한 문부성 미술전람회 특선작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누드화에 대한 인식이 퍼져있지 않았던 조선 사회에서 김관호의 그림은 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일례로 매일신보에서는 “전람회에 진열된 김군의 그림은 사진이 동경으로부터 도착하였으나 벌거벗은 그림인고로 사진으로 게재치 못함”이라는 괄호를 붙여 김관호의 누드화 대신 풍경화를 게재하기도 했습니다. 누드에 대한 몰이해는 심지어 일제 당국의 통제로까지 이어졌는데 몇 년 뒤인 1921년 조선미술전람회에 누드가 출품하자 “이해 없는 일반의 부도덕한 흥분을 촉발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누드화의 신문 게재를 금지한 것은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서양화에서 당연시되었던 누드화 장르는 이때까지만 해도 일반인들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서양화가들의 활동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10년대 후반부터 1920년대 초반까지 활발한 활동을 보이던 김관호는 이후 작품 활동에 뜻을 접고 제자 양성에 전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가 마지막까지 활동했던 미술단체이자 미술학교인 삭성회가 1930년대 해체된 것으로 보았을 때 30년대 이후로는 사실상 미술 관련 활동을 접고 문화재 수집과 사냥 등을 하며 해방 시기까지를 보낸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증언을 통해서도 교차 검증되는 사항인데, 삭성회에서 활동했던 김찬영의 둘째아들이자 서양화가인 김병기 화백의 증언에 따르면 김관호는 생전에 한 번도 그림에 대해서 말을 꺼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950년대 한국전쟁을 전후로 하여 다시금 화업 활동을 이어가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이미 60대를 넘어가 생애의 말년을 맞이한 시점이었습니다. 이 시기 그의 작품들은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후기 인상주의풍의 풍경화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록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만 활동했고 말년에 다시 붓을 잡을 때도 과거의 화풍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평이한 화풍을 보여주지만 그가 오늘날 연구 대상이 되는 것은 단순히 최초의 서양화가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서양화가 식민지 조선에 유입되던 시기 김관호는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이름을 얻어 “평양 화단 = 김관호”라는 말이 당대에 널리 퍼졌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기에 미술사학자 윤범모 선생은 “김관호가 1910년대 화단에서 가장 괄목할만한 화가”이며 단순히 서양화 수용의 기원의 측면에서만 바라볼 수 없는 화가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또한 그는 누드화가 한국 사회에 유입되는 과정과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인물로 꼽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