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 미술가 열전 (11) 배운성, 최초의 독일 유학파
배운성은 1900년 종로구 명륜동에서 수공업자의 넷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성장기 배운성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는데 5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 속에서 공부를 이어갔기 때문입니다. 16살까지 학교의 급사(관청이나 회사, 가게 따위에서 잔심부름을 시키기 위하여 부리는 사람)로 일하며 야학으로 학업을 작가는 고위 관료 출신이자 대부호였던 백인기의 집에서 집사로 일하게 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됩니다. 백인기는 이 당시 친일 활동을 벌이며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서화협회의 회원이기도 했는데 이런 이력이 배운성의 이후 행적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백인기의 집에 집사로 들어간 이후부터 유학 전까지 그의 삶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기존의 연구는 그가 3.1 운동 당시 일제에 수배되자 일본 도피, 이후 와세다 대학의 경제학부에 들어갔다가 독일로 유학했다는 주장이 정론처럼 여겨겼습니다. 하지만 이후의 연구에서 배운성의 행적이 새롭게 밝혀졌으며 최근 논문들이나 언론 보도들은 이 설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설은 평양에서 출판된 『문예상식』(1994)이라는 사전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배운성은 백인기의 아들 백명곤의 뒷바라지를 위해 함께 베를린으로 향했습니다. 이후 백명곤은 병에 걸려 먼저 귀국하지만 배운성은 돈을 받지못해 독일에 체류하게 되었다는 설입니다.
그 경로가 어찌되었든 배운성은 1922년 베를린에 도착한 이후 화가 후고 미트(Hugo Meith)의 권유로 미술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1923년 레겐스부르크 미술학교에 입학한 것을 시작으로 1925년에는 베를린 예술종합학교 자유미술과에 입학하며 본격적인 교육을 받게됩니다. 입학 이후 그를 지도했던 교수는 페르디난트 슈피겔(Ferdinand Spigel)이라는 인물입니다. 슈피겔은 독일에서 1,2차 세계대전의 참전 군인들의 초상화와 전쟁화 그리고 아리안 농부를 소재로 한 친 나치적 성향의 그림을 그렸던 화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오늘날 독일 미술사에서는 그렇게 지명도가 높은 작가가 아니지만 배운성을 우등생으로 추천해 독일 활동의 기반을 마련해줬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한 인물입니다. 또한 배운성이 입학했을 당시 베를린 예술종합학교는 케테 콜비츠, 오스카 슐레머, 칼 호퍼 등 목판화와 표현주의에 정통했던 교수진들이 있었는데 이런 교수진의 성향은 그의 이후 작품에도 고스란히 반영됩니다.
1930년 학교를 졸업한 배운성은 그 해 베를린 쿠틀리트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엽니다. 이 개인전을 시작으로 독일, 체코, 폴란드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는데 특히 1933년 폴란드 바르샤바 국제 미전에서 1등상을 수상한 것을 계기로 식민지 조선에서도 화가의 활동이 알려지게 됩니다. 독일 시기 배운성의 작품은 조선적인 요소를 평면적인 회화 기법으로 표현해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르적으로는 회화, 판화, 삽화 매체를 중심으로 초상화와 풍속화를 주력으로 그렸으며 파리 체류 시기에는 종교화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주제적인 측면에서는 주로 전통적 도상들을 활용한 모습을 보이는데 무당복을 입은 자화상이나 팽이치기, 연날리기, 승무 등 식민지 조선의 풍속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전통 풍습을 강조한 배운성의 작품은 유럽 화단에서 동양에 대한 이국적 정취를 불러일으키며 큰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는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MARKK), 베를린-달렘박물관센터·아시아박물관, 프라하내셔널갤러리, 흐루비 로호젝 성 등 독일 각지의 박물관에 그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는 점을 통해서도 증명됩니다. 당시 유럽의 평론가들이나 조선의 언론은 배운성의 작품이 서양과 동양의 가교를 놓아주고 있다고 평한 바 있는데 이것은 배운성이 유럽에서 어느 정도 인지도를 갖춘 작가로 발돋움 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1937년 9월 나치의 억압을 피해 파리 인근 부르노 지방에 정착한 화가는 이곳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갑니다. 이듬해인 1938년 샤르팡티에 갤러리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갖는 데 당시 샤르팡티에 갤러리가 가지고 있는 인지도를 생각했을 때 프랑스 이주 이후 비교적 빠르게 파리 화단에 정착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와 관련해서 배운성이 파리 체류 시기 일본인 문화, 선전 단체의 후원을 받아 작품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는 견해가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하게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배운성의 유럽 활동이 끝난 것은 1940년의 일입니다. 프랑스 활동 3년차였던 배운성은 전쟁의 여파로 외국인 아내를 남겨두고 식민지 조선으로 귀국하게됩니다. 식민지 조선으로 돌아온 배운성은 유럽 체류 당시 그린 170여점의 작품들을 프랑스에 두고 왔기 때문에 귀국전을 열지 못했고 1944년에 이르러서야 식민지 조선에서 완성한 신작들로 개인전을 개최하게됩니다. 이 시기 작품들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려진 바가 없으나 현전하고 있는 작품 중 <해금강 총석정>(1940)이 해당 전시에 출품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해방 이후 배운성의 활동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그의 교육 활동입니다. 1941년 회화연구소를 개설한 배운성은 해방 이후에도 이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49년 홍익대학교 미대가 설립되자 학과장으로 재임합니다.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에는 경주미술학교 명예학장을 역임하며 교육 활동과 화업을 병행하던 중 한국전쟁을 맞이하며 이 때 월북하여 북한에서 여생을 보내게 됩니다.
월북했던 대부분의 작가가 그렇듯 배운성 또한 한국전쟁 이후 오랫동안 한국에서 잊혀진 존재였습니다. 90년대까지 그의 유럽 시기 작품들이 발굴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작업을 다각도로 규명할 여력 또한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 90년대 월북작가들에 대한 해금조치와 함께 작가의 여러 면모가 재조명되고 1999년과 2000년 유럽 각지에 소장되어 있던 배운성의 유럽 시기 작품들이 발굴되면서 작가의 삶과 예술 세계가 다시금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특히 배운성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가족도>(1930-1935)는 2013년 국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근대기를 대표하는 집단 초상화로 근현대 미술을 조명하는 여러 전시에 출품되고 있습니다.
글을 마무리하기 전 배운성을 다루는 최근의 논문들에서 빈번하게 언급되는 친일 문제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배운성은 여러모로 친일이라는 단어와 인연이 많은 작가입니다. 그가 집사 생활을 한 백인기가 친일파였다는 점을 비롯해 독일 체류 시절에는 일본 대사관의 주문을 받아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으며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는 성격의 목판화인 <세계도>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정착 과정에서는 일본 문화 선전 단체이자 만철의 지원을 받고 있던 일불동지회와 깊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됩니다. 개인전 개최에 과정에서 일불동지회의 후원을 받은 것이 전시 포스터로 확인이 되며 단체의 잡지인 『프랑스-자퐁』에 수 차례 삽화가로 참여했다는 점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작업 외의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주독,주불 일본 대사관의 관료들을 비롯해 유럽에 체류하던 사업가, 출판인들과 교유 관계가 있었으며 이들로부터 주문 받아 완성한 작품들도 현전하고 있습니다.
이를 볼 때 배운성은 적극적인 친일 협력자로 분류할 수 있겠지만 논문들에서는 보다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가령 신채기는 배운성이 단지 돈을 위한 선택을 했다고 주장하며 그가 마지못해 일본에 협력했을 가능성에 대해 언급합니다. 신민정의 경우도 그의 선택이 친일적 행위로 비춰졌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것이 '강제적 자발성'의 틀에서 해석될 여지가 있으며 "‘예술 조선’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타협책이자 디딤돌"로 유럽 내 일본인 커뮤니티와 교류했다는 주장을 견지합니다.
어느 주장이던 배운성의 유럽 시기 행보는 단지 친일/반일이라는 이분법에 가두기 힘든 복잡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주장을 개진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가 여러 작품에서 보여준 조선적 풍습이 과연 친일적 행위로 보이는 일련의 사회적 활동과 배치될 수 있는 것인지는 의심스럽습니다. 1920년대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 조선색을 드러내는 회화 작품이 있었던 것처럼 배운성의 작품 또한 일본 제국의 풍습 중 한 양상으로 독해될 소지는 얼마든지 있으며 실제 조선적인 것의 강조와 일제에 대한 추종이 전혀 모순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에 관해서는 관련 전공자들만큼 지식이 없는 바, 이 정도로 줄이고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 참고문헌
김미금, 배운성 (裵雲成)의 유럽체류시기 (1922-1940) 회화 연구, 한국근현대미술사학, vol. 14, 2005.
신민정, 배운성의 파리 시기- 잡지 『프랑스-자퐁』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근현대미술사학, vol. 42, 2021.
신채기, 배운성의 자화상: 인종, 국가, 이국주의에 대한 교차하는 시선들, 현대미술사연구, vol. 46, 2019.
이지희, 1920~30년대 파리 유학 작가 연구, 인물미술사학, vol.8, 2012.
노형석,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명작…이들은 누구인가, 한겨례, 2022.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