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 미술가 열전 (6) 조선미술전람회
1921년 12월 21일 동아일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통해 총독부 주관 하에 개최되는 조선미술전람회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미술전람계회
총독부 사업으로 내년 초 설립 계획
총독부는 조선미술의 발달을 비보할 목적으로 동경의 제국미술원전람회를 모방해 매년 1회 미술전람회를 개최할 방침을 내정했다. 26일 오전 10시, 총독부 제2회의실에서 박영효 후작, 민병석 자작, 서화협회의 정대유, 김돈희, 이도영 외 제(諸)씨, 서화연구회의 김규진씨, 일본측 서화가로 다카기 하이스이(高木背水)씨 외 다수, 그 외 서화가로써 관계있는 인사를 초청하고 정무총감 이하 학무당국자가 회합하여 여기에 관한 연속 회의를 열었던바 계획에 만장일치의 찬성이 있었기에 이것에 관한 규정 발표가 있었다.(후략)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는 1922년부터 1944년까지 식민지 조선 하에서 가장 큰 권위를 가진 전시였습니다. 그것은 기사에서도 드러나는데 식민지 조선에서 유력한 미술 단체였던 서화협회와 서화연구회(이 두 단체는 한국근대미술의 제도사를 서술하는데 있어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단체이니 추후 다시 등장할 예정입니다)가 선전 설립에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더해 조선에 머무르고 있는 일본인 화가들 또한 설립에 관여했는데 이것은 합병 이후 최초의 근대적 미술공모전이자 산업박람회였던 조선물산공진회가 1915년 개최된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화가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던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선전 개최는 미술계 전체가 참여할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영락전 상품진열관에서 열린 제 1회 대회에서 최초의 양화가들과 국내에서 활동했던 주요 화가, 재조선 일본인 화가들이 모두 참여했다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비단 미술계 내부뿐만이 아니라 언론에서도 선전은 그 해 주요한 문화적 이벤트 중 하나였으며 그 해 입선과 특선을 수상한 작가들은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일약 스타 작가로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초기에 선전은 제국미술원전람회(이하 제전)의 방식을 따라 1부 동양화 2부 서양화/조각으로 작품을 나누되 제 3부로 서예와 사군자(書)를 추가해 제전과의 차별점을 두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크게 두 가지 인데 우선 제 1부에 한국화가 아닌 동양화부가 들어섰다는 것과 제 3부로 서(書)부가 추가되었다는 점입니다.
우선 동양화부라는 이름을 택한 것에 대해 기존의 연구에서는 한국의 독자성을 말살하기 위해 한국화 혹은 조선화가 아닌 동양화라는 다소 포괄적 범위의 명칭을 사용했다는 설이 존재했었습니다. 하지만 보다 최근의 연구에서는 총독부가 그러한 의식을 가졌기 보다는 일본화와 한국화 모두를 아우르는 전통 회화를 출품 대상에 포함시키기 위한 조치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 1회 전람회 당시 동양화부의 일본인 입선자가 34명에 이를 정도로 많았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이에 반해 동양화부의 한국인 입상자 수는 25명으로 일본인들보다 그 수가 적었습니다)
다음으로 서부의 추가는 당대 일본의 분위기와 선전 설립에 관여한 일본인 화가들의 성향을 고려했을 때 이례적인 조치였습니다. 1920년대 일본에서 글씨(서)는 19세기 말 고야마 쇼타로와 오카쿠라 텐신의 서화 논쟁 과정에서 서와 화(畫)가 분리되며 미술 범주에서 이탈했고 이는 이후 세대들에게도 이어져 왔습니다. 그렇기에 일본 내에서 열리고 있었던 미술 전람회를 모방하고 일본인 화가들이 창설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선전에서도 서의 제외는 당연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조선에서는 1932년까지 서부가 유지되었고 그 영향력 또한 적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학자들은 선전에서 서부가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이유 중 하나로 선전 창설시 참여했던 동양화 단체인 서화협회의 영향력이 작용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선전 설립에 크게 관여했던 이완용, 박영효와 같은 인물들이 서부가 추가될 수 있도록 압력을 넣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두 인물이 모두 사군자 등의 서화 장르에 친숙했고 서화 협회의 후원과 설립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을 통해서도 뒷받침되는 사항입니다.
이렇듯 선전의 개최는 단지 관 주도의 미술 전시가 열렸다는 의미 이상으로 복잡한 맥락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선전을 둘러싼 연구자들의 관점들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초기 연구이자 오늘날에도 널리 받아들여지는 관점에 따르면 선전은 1920년대 문화 통치를 대표하는 일제의 문화 정책, 나아가서는 동화 정책의 일환입니다. 그것은 선전이 제전을 모방했고 이후 심사위원에 있어서도 일본인 심사위원이 압도적이었으며 그렇기에 출품작들 또한 총독부의 입맛에 맡는 주제, 형식 일변도였다는 점을 통해 뒷받침됩니다. 더군다나 동아일보 기사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설립 목적에 있어서 “조선미술의 발달을 비보”한다는 것을 내세웠는데 이는 조선의 미술이 열등하다는 것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식민지 시기 일본이 조선을 바라보는 인식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선전을 단순히 일제의 강압 통치에서 문화 통치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문화사적 사건으로 바라보는 것을 넘어 다양한 관점에서 선전을 바라보는 연구 결과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선전 설립 배경을 조선 미술에 대한 통제와 억압이 아닌 재조선 일본인 화가들의 정치적 영향력 행사라는 관점에서 바라본 연구, 일본 미술과 조선 미술의 관계성에 대한 고찰, 더 나아가서는 식민지 근대성이 발현되는 양상에 대한 연구로 그 범위를 확장시켜 나가고 있어 주목됩니다. 이러한 연구 중 하나로 주목할만한 것은 선전 창설을 구로다 세이키의 영향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연구입니다. 일본 미술계에서는 공부미술학교(2편 참조) 설립 이후 국내에서 서양화를 배웠던 일군의 집단들과 구로다 세이키와 같이 구미에서 서양화를 배워온 집단이 서로 대립했는데 이들을 각각 구파와 신파로 분류했습니다. 이들의 대립은 단순히 화풍의 대립을 넘어 미술제도 내에서 심사위원의 선정, 미술학교 교수 임용, 출품작의 통과여부 등 전방위적인 대립 양상을 띄었습니다. 1920년대 신파는 이러한 대립 과정에서 사실상 일본 서양화단의 주류로 올라서며 그 때문에 선전 설립과 이후의 심사위원 선정 과정에서도 신파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이렇듯 신파 출신의 심사위원이 선정된 것은 자연스럽게 동경유학파(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구로다 세이키가 교수로 재직)들의 외광파 화풍이 득세하는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이후 1930년대에 한국의 모더니즘 미술 단체라고 할 수 있는 일련의 단체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외광파는 소위 선전풍으로 불리며 조선향토색과 함께 대표적인 서양화 양식으로 자리매김합니다.
이렇듯 선전은 한국근대미술을 개괄함에 있어 1910-20년대뿐만 아니라 이후의 미술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또한 근대적 미술 제도의 도입과 그에 대한 인식,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한국 근대 미술이 가지는 위치, 식민지 근대성의 시각적 발현 등 식민지 시기의 다양한 측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선전은 주제는 매력적인 연구 주제가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