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 미술가 열전 (9) 장발, 한국 기독교 미술의 효시
1921년 식민지 조선에서 최초의 미술 전람회에 대한 열기가 달아올랐을 무렵, 동경미술학교를 다니던 한 학생이 미국행을 결심합니다. 이제 막 1년차 학생이었던 장발(1901-2001)은 그렇게 자신의 평생의 생애를 결정할 중대한 선택을 하게 됩니다. 물론 그가 미국이란 나라에 대해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찍이 인천의 가톨릭 집안 둘째 아들로 태어나 그곳을 드나드는 외국인들을 많이 만났으며 관립영어학교를 다녔던 아버지 장기빈의 영향으로 인해 영어에도 친숙했습니다. 형제들의 영향도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각각 미국과 독일에서 유학했던 장면과 장극 박사 모두 영어에 능통했으며 그 중 첫째였던 장면 박사가 1919년 미국으로 건너갔으므로 어느 정도 미국의 소식과 생활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습니다. 또한 휘문고보 재학 시절에는 최초의 양화가였던 고희동(3편 참조)에게서 유화를 배웠으니 당대에 그 어떤 사람들보다 서양 문화 친숙했던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웬일인지 그는 도미 이후 미술 실기가 아닌 이론 공부에 매진합니다. 약 4년간의 공부 끝에 장발은 1925년 콜롬비아 대학교 사범대학에서 미학과 미술사학을 비학위과정으로 이수합니다. 그가 왜 실기가 아닌 이론을 공부했는지에 대해서는 오늘날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다만 추측컨대 1920년의 시점에서 미국이 프랑스, 영국, 독일에 비해 미술로 잘 알려진 국가가 아니었으며 그렇기에 장발 본인이 이를 공부해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 다른 이유로는 여러 현실적인 사정들로 인해 실기 공부를 지속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합니다. 주지하다시피 구미권에서 유학했던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아무리 식민지 조선에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물감, 표구에 필요한 각종 장비들, 학비 모두를 감당할 수 있는 집은 많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당시의 교통, 금융 시스템의 한계로 말미암아 송금한 돈이 제때 도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당시 한인 유학생들이 많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그들이 현지에서 정보를 얻고 작업을 지속하기 어렵게 했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장발 또한 미국에서 실기가 아닌 이론을 공부했을 것이라고 보는 의견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미국 체류 기간 동안 그가 작업을 완전히 포기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동경미술학교 시절부터 독일 뮌헨을 중심으로 발행되고 있었던 기독교 관련 잡지인 『기독교 미술』에 삽화를 기고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미국 유학 시절에도 계속 이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1920년 그렸던 <김대건 신부상>은 그가 미국 체류 시절 어떠한 화풍을 구사했는지 알 수 있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동경미술학교 재학시절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비록 묘사가 뛰어나지는 않지만 명암이나 입체감 묘사에 있어서 외광파 화풍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김대건 신부상>에서 보이는 화풍상의 특징은 이후 미국 체류 과정에서 보다 진일보하는데 1928-29년 사이에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성인 김대건 안드레아>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이전 작품과 비교했을 때 인물 표현이 보다 자연스러우며 색채 사용에 있어서도 보다 원색에 가까운 색들을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19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퓌비 드 샤반느의 작품을 보고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가 성화에 몰두했다는 점은 화가 인생에 있어서나 또 근대 미술의 역사에 있어서나 매우 중요한 지점입니다. 그의 회화 작품들은 크게 서화협회 참가작들과 성화(聖畵)미술로 일별할 수 있는데 이 중에서 후자의 경우 성화들이 한국에서 어떻게 뿌리내렸고 또 어떠한 양식이 들어왔는지 연구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닙니다. 또한 화가 개인의 인생에 있어서도 이 때 그렸던 일련의 성화들로 인해 식민지 조선, 해방 이후에 화가로써 이름을 얻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후대 학자들이 그의 회화를 연구하는데 있어서도 서화협회 출품작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성화를 분석하는 것은 거의 필수적인 과정으로 여겨집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 장발이 가지고 있는 명성을 소급해 올라가면 1920년대 성화를 그리기 시작했던 때부터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1925년 콜롬비아 대학에서 수학을 마친 장발은 잠깐의 로마 체류 이후(종교적인 이유 때문으로 추측합니다) 식민지 조선에 귀국, 당시 양적, 질적 성장을 보이고 있었던 식민지 조선의 미술계에서 주요 작가로 떠오르며 활발한 활동을 보입니다. 특히 두드러진 점은 그가 당시 가장 권위 있었던 관전이자 미술계 내 엘리트들이 반드시 출품했던 조선미술전람회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런 행보는 비단 장발뿐만이 아니라 1920년대 구미 유학파들의 국내 활동에 있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사항이기도 합니다. 192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해서 총독부 중심의 관전에 반대해 민간 차원에서 예술가들이 단체를 조직하고 독립 전시를 개최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이런 동인전 개최 열기는 중일 전쟁의 여파로 미술 활동 자체가 어려워진 1930년대 후반까지 지속됩니다. 이러한 열기의 중심에는 일본이 아닌 구미권에서 유학을 했던 일련의 화가들이 존재했는데 그 중에서도 핵심 인물이 바로 장발이었던 것이지요. 그가 이른바 선전에 반대하는 ‘아방가르드적’ 행보를 보였다는 점은 귀국 이후 결성했던 단체들의 면면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1920-1930년대의 기간 동안 이종우, 장발, 임용련, 백남순과 함께 <네모듬회>라는 단체를 만든 것은 시작으로 미술비평가이자 화가였던 김용준, 구본웅 등과 의기투합해 <목일회>를 조직해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중일 전쟁 직전에는 목일회 주축 멤버들을 중심으로 목일회를 <목시회>로 개칭하고 전시 활동을 지속했습니다.
장발이 1920-30년대 동안 보여주었던 일련의 활동은 한국 미술에서 소위 모더니즘의 태동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지에 대한 중요한 논쟁거리를 제공합니다. 서양 근대 미술에서 모더니즘은 기본적으로 주류 미술(살롱 체제)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되는 바, 한국의 근대 미술에서도 선전에 대한 저항의 흐름을 모더니즘 태동의 탄생과 연결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나 소위 선전의 주류 미술에 반대해서 나온 미술가들이 외광파로 특징지을 수 있는 형식적인 경향에 반대하고 야수파, 표현주의 등의 비재현적인 미술을 추구했다는 사실은 이들이 서구 모더니즘의 경향에 강하게 경도되어 있었으며 그렇기에 한국 모더니즘의 시작을 이 시기로 바라보는데 전혀 무리가 없다는 결론이 도출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들이 모더니즘의 전부는 아니고 또 이종우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그들이 모더니즘이 내포하고 있는 사상을 전부 이해했는지 불확실하기 때문에 일부 평자들은 1947년, 그러니까 해방 이후 추상 미술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시기를 모더니즘의 탄생시기로 보는 논자들도 존재합니다.
글을 마무리하기 전 장발의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이력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창설 과정에 대해서 짧게 언급하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그는 정확히 한 세기를 살면서 여러 활동들을 했으며 비교적 초기 시기라고 할 수 있는 1920-30년대에는 활발한 미술 활동을 벌이기도 했지만 정작 오늘날 미술계에 그의 족적이 남아 있는 곳은 미술 행정, 교육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방 이후 과거 경성제대였던 서울대학교는 동경미술학교의 학제를 모방해 회화과 조각과 도안과의 3과 체제로 미술대학을 개설합니다. 이 중에서 회화과의 경우 1과는 동양, 2과 서양으로 나누어 학생들을 모집했는데 이처럼 동양과 서양으로 구분하는 방식 또한 동경미술학교의 방식을 따른 것입니다. 이렇듯 서울대학교 초창기 학제는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이것은 해방 이후 한국에서 활동하던 미술가들이 대부분 일본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하지만 커리큘럼의 측면에 있어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은 미국식 커리큘럼을 따라가고 교재에 있어서도 영미권에서 출간된 교재들을 번역해 사용하는 등 차별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당시 미술대학의 학장직을 맡고 있었던 장발의 영향 때문인데, 그가 1920-30년대 보여주었던 행보를 생각하면 당연한 귀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학교 내부의 문제뿐만 아니라 외부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이정표를 형성했습니다. 그는 학장직에 재직하면서 활발한 외부 활동을 벌였는데 그 결과 서울대학교가 홍익대학교와 함께 주요 대학 중 하나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런 화려한 활동의 이면에는 서울대파와 홍대파의 극심한 대립이라는, 해방 이후 5년간 국내에서 벌어졌던 정치 대립의 축소판(혹은 연장)이라 할 수 있는 여러가지 혼란상이 펼쳐지는 바, 결국 그의 해방 이후 활동은 명과 암이 있는 것이라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