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들에게 있어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단지 철학적인 질문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대상을 묘사하는 태도와 형식을 결정하다는 점에서 작가의 예술 세계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연에 대한 관심은 커리어 초반이었던 1820년대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나며 이를 반영하는 일련의 스케치, 회화 작품들이 다수 남아있다.
들라크루아에게 자연은 양가적인 존재였다. 분명 자연은 평화롭고 풍성하지만 다른 한편 인간 사회의 변화에 무관심하고 때때론 파괴적인 힘을 발휘했다. 방향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자연은 그렇기에 인간과 대비되었다. 인간은 자연에 비해 이성적이고 문명화된 사회 속에서 모든 것을 예측 가능한 범주에 묶어두려 한다. 하지만 인간에게 이성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격정적인 감정, 창조에 대한 열망 등 차가운 이성의 것이라 볼 수 없는 통제 불가능한 관념들이 인간의 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들라크루아가 동물에 대한 탐구를 통해 자연과 인간의 유사성에 깊이 천착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동물, 이 중에서도 사자, 호랑이와 같은 고양잇과 동물들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그의 일기와 작품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커리어 초기 들라크루아는 당시 동물을 바라보는 두 가지 대립적인 관점 모두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동물에 대한 과학 연구는 우화적, 상징적 방식과 실증적 방식이 공존하고 있었다. 우화적 연구는 동물을 연구한 과거 문헌들을 참고하여 그것의 습성을 동물의 성격과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일례로 조르주 퀴비에(Georges Cuvier)는 아리스토텔레스, 플리뉘 등 고대의 문헌과 18세기 쓰여진 뷔퐁(Buffon)의 글을 참고하여 사자가 힘, 용기, 관대함을 상징하는 동물이며 호랑이는 잔혹성을 상징하며 단지 유희를 위해 피를 마시는 맹수라 주장했다. 한편 실증적 연구의 입장에서 이러한 접근 방식은 비논리적, 비과학적이었다. 이들에게 있어 맹수는 단지 포식자에 불과하며 이들에게 부여된 성격은 실제 관찰에 의거한 것이 아닌 단지 인간의 관점에서 해석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들라크루아의 태도는 두 가지 연구 경향이 혼합된 양상을 보인다. 그는 동물의 외형을 비교해부학적 관점에서 면밀하게 관찰해 역동적인 맹수의 모습을 포착했다. 하지만 그러한 묘사는 단지 외양의 묘사에 그치는 것이 아닌 내면의 공통점을 찾는 방향으로까지 나아갔다. 그에게 있어 외양은 내면을 들여다 보는 통로와 같았다.
그가 19세기에 유행했던 인상학(Physiognomy)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는 점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비록 두 학문은 20세기를 지나오며 그것이 지닌 비과학적, 정치적 성격으로 인해 과학의 영역에서 퇴출되지만 19세기 내내 여러 분야에서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1817년부터 1820년까지 들라크루아의 일기에서는 요한 카스파 라바터(Johann Caper Lavater)라는 인물이 자주 언급되는데 그는 독일의 저명한 생리학자이자 인상학을 정립한 인물이었다. 그는 고대부터 내려져온 인상학적 서술들을 집대성 해 인간과 동물의 신체적 유사성을 관찰함으로써 대상이 가진 도덕성을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저작은 19세기 초 프랑스에 번역된 이후 널리 읽혔는데 들라크루아 또한 그 영향으로 인상학에 대해 깊이 천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들아크루아가 남긴 방대한 습작은 이런 영향의 일면을 보여준다. 1817년부터 1824년까지 그려진 습작들에서 들라크루아는 인간과 동물의 옆모습을 반복적으로 그리며 둘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했다. 가령 한 그림에서 들라크루아는 인간의 옆모습을 마치 개구리와 같은 모습으로 묘사한 바 있는데 이것은 라바터의 저작에서 인간과 개구리의 외양적 유사성을 강조한 일련의 드로잉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는 인간과 쥐의 옆모습을 병치시켜 둘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한듯한 드로잉을 남기기도 했는데 인간과 쥐의 외양적 비교는 1586년 출판된 지오반니 바티스타 델라 포르타의 인상학 저작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드로잉이나 일기에서 나타난 인상학의 영향이 완성작에 드러나는 것은 182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다. 이 시기 들라크루아는 인간과 동물의 친연성이 외양의 유사성을 넘어 둘 사이의 기질적 측면을 반영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때 기질적 측면이라는 것은 대상이 가지고 있는 성격 뿐만 아니라 처해있는 상황과 그에 대한 태도까지 외양을 통해 드러난다는 폭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두 가지 작품이 들라크루아의 이러한 생각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1825년경 그가 완성한 <이탈리아인 도적>은 초췌한 몰골로 죽어가는 도적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인물의 동작은 인간의 것이 아닌 고양잇과 짐승이 보여주는 동작에 가깝다. 이것은 비슷한 시기 죽어가고 있는 사자의 모습을 그린 스케치와 큰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죽어가는 도적과 사자의 상황은 그들이 가진 공통의 동작으로 표현이 된 것이다.
들라크루아의 관심은 여기서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관상학이 단지 인간과 동물의 겉모습을 통해 기질의 공통점을 추측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비교해부학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러운 경로였다. 실제 커리어 초반 들라크루아는 토끼를 해부해 그것의 근육을 드로잉하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1824년에는 퀴비에의 살롱에 방문하여 동물들의 해부된 모습을 관찰하기도 했으며 1830년대에 이르러서는 영국의 해부학자 샤를 벨과의 서신 교류를 통해 인간과 동물의 해부학적 유사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19세기 초 동물학을 둘러싼 과학자들의 논쟁은 들라크루아의 말기 작품들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시기 동물학은 해부학의 발전으로 큰 변화를 맞이했다. 해부학의 영향으로 근육과 뼈에 대한 구조적인 접근이 가능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각 개체들 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보다 명확하게 분류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여기서 개체들 간의 구조적 유사성에 주목하여 살아있는 모든 존재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주장은 과학 아카데미에서 큰 논쟁거리로 남았다. 해부학적 유사성을 존재의 동일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지, 만약 이해할 수 있다면 그 동일성은 어느 범주까지 적용가능한지에 대한 토론이 수 차례 벌어졌다. 이 논쟁은 일반 대중들에게도 큰 관심거리였으며 추정컨대 들아크루아 또한 이에 대해 깊은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들라크루아가 가졌던 자연과학에 대한 다방면의 관심은 1840-60년대 사냥을 소재로 한 일련의 작품들을 분석함에 있어 중요한 요소가 된다. 기존의 연구에서 <사자 사냥> 연작이라 불리는 생애 후반기 작업들은 휘몰아치는 듯한 붓질로 사냥의 긴장감과 격렬함을 담았다고 평가 받는다. 또한 이 작품을 착수하는 과정에서 루벤스의 작품 <사자 사냥>(1621)에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작품을 평가함에 있어 형식적인 특징이나 미술사적 영향 이외에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오랜 탐구가 드러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과거 서양의 전통에서 사냥 장면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위를 드러내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비록 자연은 불가해하고 때때로 공포스럽지만 결국 그것을 정복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사자와 같은 맹수를 잡는 인간의 모습은 그런 점에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위를 드러내는 전형적인 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냥 장면은 인간의 영웅적 행위를 강조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되는 경우가 빈번했다. 하지만 들라크루아의 그림에서 그러한 모습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작품은 되려 사자 사냥이 가지고 있는 위험천만함, 그리고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맹수의 흉포함이 더욱 강조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낙마한 인간의 겁에 질린 모습과 인간을 물어뜯는 사자의 대비는 그런 점에서 자연의 통제불가능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것은 이런 표현 방식이 단지 자연에 대한 숭고 감정의 발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사냥 장면에 나타나는 형식적 특징으로 인해 그의 말년 작품은 낭만주의라는 사조를 드러내는 전형적인 무엇으로 보이게 했다. 그로 인해 <사자사냥> 연작들 또한 자연에 대한 숭고라는 낭만주의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한 사례로 여겨지곤 했다. 그러나 19세기 초반 프랑스에 불어닥친 여러 자연 과학 담론이 들라크루아의 영향에 미친 영향을 고려했을 때 그의 작품을 섣불리 숭고 감정의 표출이라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커리어 초기부터 꾸준히 자연과 인간의 유사성에 대해 탐구했던 들라크루아는 과학적 지식을 자신의 화폭에 반영하며 사냥 장면에서 자연과 인간의 도식을 뒤집었다. 해부학적 지식은 인간과 자연의 비교에 있어 어느 한쪽이 우월한 곳이 아닌 똑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촉진시켰다.
여기에 더해 저자는 사냥 장면이 단지 자연과 인간의 충돌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이탈리아인 도적>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해부학적 유사성을 단지 외양의 유사성을 넘어 심리상태, 상황에 대한 은유로 사용하곤 했다. 상처입은 사자의 모습이 그 자체로 곤경에 처한 도적의 상황과 그대로 겹쳐진 것은 이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들라크루아의 후반기 작업에서 나타나는 사냥 장면들을 해석함에 있어 동일한 적용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인간과 사자의 뒤엉킴은 그 자체로 인간의 내면의 두 가지 특성의 격돌로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들라크루아가 표현한 사자의 폭력성은 어쩌면 인간의 내면을 동물의 모습으로 시각화한 것은 아닐까? 이에 대한 답은 당장 내리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들라크루아가 영향 받은 자연 과학에 대한 지식이 동물을 묘사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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