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미술/나폴레옹 전쟁과 미술12 안토니오 카노바, 1806년 18세기 말은 미술의 역사에서 변화의 시대임과 동시에 파괴의 시대였다. 그것은 일련의 정치, 사회 분야의 격변과 맞물려 일어났다. 대서양 양안에서 벌어진 혁명의 물결은 왕과 귀족이 아닌 시민들의 시대를 열었다. 지배계층의 변화 앞에서 미술은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새로운 후원자를 찾아 나섰지만 모든 분야가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특히 공공조각 분야는 그것의 특성상 사회의 변화를 신속하게 반영하는 것이 어려웠다. 이 시기 벌어진 공공조각에 대한 파괴 행위들은 그것의 결과였다. 미국에서는 조지 3세의 동상이 철거되고 프랑스에서는 루이16세의 조각이 같은 운명을 맞았다. 뒤이어 벌어진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시기의 전쟁들은 조각에 대한 대대적인 반달리즘에 더욱 불을 지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이념에 따라 혹은.. 2025. 6. 14. 이베리아 반도전쟁, 1808~1814년 나폴레옹 전쟁은 미술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역사적사건을 주로 묘사했던 미술은 전유럽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빠트린 이 전쟁을 무시할 수 없었다. 화가들은 이제 신화와 역사, 성경의 세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현실 세계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 때 현실은 과거 플랑드르 지방이나 영국에서 그려졌던 풍속화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권의 요구에 의해 혹은 전쟁의 참상을 기록하기 위해 붓을 들었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그것의 진앙지였던 프랑스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18세기 중반 이후 유럽을 휩쓸었던 신고전주의는 유럽 전역에 퍼진 국제적인 미술사조였지만 그것이 큰 위력을 발휘한 것은 프랑스였다. 프랑스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 신고전주의는 지역의 상황에 따라 주변적인 사조로만 머물거나.. 2025. 6. 14. 테오도르 제리코, 1812년 1812년 테오도르 제리코는 을 출품한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21살로 화업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맞이한 살롱 전시였다. 1808년 동물화로 유명했던 칼 베르네와 다비드의 제자 중 한 명이었던 피에르 나르시스 게렝의 지도를 받은 제리코는 학생시절 그로의 작품을 모사하며 국가의 위업을 선전하는 역사화를 그리기를 원했다. 언뜻 보기에 그가 출품한 작품은 이런 개인적 야망이 잘 드러나는듯 보인다. 작품은 기마초상화라는 전쟁화의 전형적인 형식들 중 하나를 취하고 있다. 앞다리를 들어올린 말의 모습은 과거 왕들의 기마초상화에서 말의 역동적인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자주 그려지던 포즈이며 가깝게는 다비드의 작품 과도 형식적인 유사성이 발견된다. 실제 제리코에 대한 전기를 처음으로 썼던 샤를 클레망은 이 작품이 .. 2025. 5. 15. 보통 사람들의 전쟁 낭만주의는 영웅을 숭배한다. 프랑스 혁명 당시 화가들은 역사화라는 형식에 기대 혁명을 선도한 정치가, 군인들을 영웅으로 칭송하며 화폭에 담았다. 이후 나폴레옹이 정권을 잡았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가 프랑스를 영광의 길로 이끌 새로운 영웅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군사적인 천재성으로 주변국들을 꺾을 때만 해도 그러한 생각은 틀리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사상자가 누적되고 국가가 빈곤해지자 찬양일색의 붓질들이 점차 의혹으로 바뀌게 된다. 화가들은 영웅숭배의 장막을 걷어내고 새로운 주제를 찾아 나서기 시작한다. 그곳에는 일반 병사들의 죽음, 공포, 절망이 있었다. 숭배의 뒷면에 가려졌던 불편한 진실들이었다. 역사화가들이 평범한 사람들에 주목한 것은 영웅숭배가 가져온 필연적인 결과였다. 신고전주의에서 묘사되었.. 2025. 5. 15. 아일라우 전투, 1807년 아일라우 전투는 프랑스 제국에게 있어 불길한 징조였다. 러시아군의 후퇴과정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나폴레옹이 치렀던 과거의 전투와는 그 양상이 달랐다. 시야를 가리는 눈보라와 맞물려 프랑스 대육군은 막대한 출혈을 강요받았다. 비록 프랑스는 이 전투에서 적들을 물러나게 했지만 승리를 자축하기 힘들 만큼 큰 피해를 보았다. 사실 원정의 결과 자체는 나폴레옹으로서는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아일라우 전투 이후 계속된 원정에서 프랑스군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프로이센-러시아 동맹을 분쇄했다. 이후 체결된 틸지트 조약은 유럽의 평화와 동시에 패권국으로서 프랑스의 지위를 재확인해주었다. 분명 이 시기는 프랑스 제국에게 있어 영광의 순간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역사는 이것이 참혹한 유혈극의 전조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2025. 5. 12. 아우스터리츠 전투, 1805년 1806년 앵그르가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살롱에 전시했을 때 비평가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들은 앵그르가 재능 있는 화가라는 점은 인정했지만 그 재능이 과 같은 결과물로 나왔다는 점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작품에 대한 비난은 가볍게는 사소한 형식 오류에 대한 지적부터 심하게는 예술가의 자질을 따져묻는 시비조의 비판까지 다양했다. 누군가는 그의 작품이 지닌 기괴한 자세와 창백한 피부를 지적했다. 또 누구는 작품이 지나치게 기독교 도상에 기대고 있으며 각 요소들이 조화롭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평자는 그가 다비드의 제자였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애처롭기 그지없다"는 원색적 비난을 가했다. 그런데 재밌는 비평하나가 눈에 띈다. 살롱 전시 직후 한 비평가는 그림 속 나폴레옹의 눈이 생기 없이 그려졌다는 점을 지.. 2025. 5. 12.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