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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나폴레옹 전쟁과 미술

이베리아 반도전쟁, 1808~1814년

by 공식 2025. 6. 14.

나폴레옹 전쟁은 미술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역사적사건을 주로 묘사했던 미술은 전유럽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빠트린 이 전쟁을 무시할 수 없었다. 화가들은 이제 신화와 역사, 성경의 세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현실 세계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 때 현실은 과거 플랑드르 지방이나 영국에서 그려졌던 풍속화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권의 요구에 의해 혹은 전쟁의 참상을 기록하기 위해 붓을 들었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그것의 진앙지였던 프랑스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18세기 중반 이후 유럽을 휩쓸었던 신고전주의는 유럽 전역에 퍼진 국제적인 미술사조였지만 그것이 큰 위력을 발휘한 것은 프랑스였다. 프랑스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 신고전주의는 지역의 상황에 따라 주변적인 사조로만 머물거나 심하게는 수용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더구나 18세기 후반 유럽을 휩쓸다시피한 전쟁은 서쪽으론 이베리아 반도부터 동쪽으론 러시아까지 유럽 각국의 화가들에게 새로운 양식의 변화를 추동했다. 문제는 그들이 겪어야 했던 현실이 전쟁이라는 끔찍한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시민의 고귀한 희생과 그리스, 로마라는 보편적인 문화를 강조하는 신고전주의 사조는 국가 간의 폭력과 살육이 난무하는 전장을 담기에는 지나치게 고결했다. 이 시기 화가들에게는 새로운 양식이 필요했다.

 

1808년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략을 기록한 프란시스코 고야는 그러한 양식을 찾고자 했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가 목도한 조국 스페인은 내외부로 큰 위기에 봉착하고 있었다. 과거 이 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었던 해군력은 세기의 전환기에 벌어졌던 일련의 충돌로 서서히 사라져갔다. 공동의 적인 영국을 무찌르기 위해 프랑스와 맺었던 동맹은 전화위복의 기회는 커녕 빠른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스페인 왕실은 각종 추문과 전횡으로 어지러웠고 기층을 이루는 농민들의 삶은 스페인의 척박한 농토만큼이나 핍박해졌다. 연이은 원정으로 유럽 곳곳을 지배 하에 둔 나폴레옹의 입장에서 스페인은 손쉬운 먹잇감으로 보였다. 1808년 2월 나폴레옹이 뮈라와 쥐노의 군대를 스페인에 쏟아냈을 때 상황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반도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전쟁을 지휘해야할 스페인 왕실은 무력하기만 했다. 스페인은 이미 내부에서부터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프란시스코 고야,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 1800-1801, 프라도 미술관.
마누엘 톨사, <카를로스 4세>, 1803, 멕시코시티.

 

왕실의 궁정화가로서 고야는 이 나라의 위정자들의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가 그린 카를로스 4세 가족의 집단 초상화는 그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동시대에 나폴레옹의 대관식 장면을 누구보다 성대하게 묘사했던 다비드와 다르게 고야가 그린 왕실 가족의 모습은 그 권위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방식으로 그려졌다. 그림의 중앙에 위치해야할 왕은 약간 오른쪽으로 비껴가 있으며 그 자리에는 사실상의 실권자인 왕비 루이사 마리아가 그려져 있다. 바로 오른쪽에는 재상 고도이의 자식이라는 추문이 뒤따랐던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당시 나이6세)가 있는데 이렇게 부부 사이에 자식을 그려넣는 것은 구성적인 측면에서 권장되는 사안은 아니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화면상 가장 앞에 위치한 페르난도 왕세자의 모습과 얼굴을 뒤로 돌린 마리아 안토니아의 모습은 정상적인 왕실 가족 초상화와는 거리가 먼 묘사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의 그림에서 왕실의 권위를 높인다는 궁정화가 본래의 역할은 매우 부차적으로만 보일 뿐이다. 오히려 작품은 왕실 내의 갈등과 치부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것에 집중하고 있다. 이런 목적은 동시대 스페인 예술가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식민지 뉴스페인에서 스페인 아카데미의 회원이자 조각 분야의 교수였던 마누엘 톨사는 카를로스 4세를 위한 청동 기마상을 완성한다.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들은 전쟁과 경제적 위기, 크레올들과 본토인들 사이의 갈등으로 큰 혼란을 맞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스페인 왕실은 예술작품을 통해 왕의 권위를 시각적으로 구현하고 국가의 결속력을 다지고자 했다. 왕을 로마의 황제처럼 묘사하는 것은 그러한 수단들 중 하나였다. 고대 그리스의 갑옷과 월계관을 쓴 카를로스 4세의 모습은 다소 어리숙하게 그려진 고야 속 인물과 전혀 다른 존재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매체, 경향, 목적에 있어 모두 상반된 특징을 보이는 마누엘 톨사의 작품조차도 19세기초 스페인의 위기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고야의 작품과 맥이 닿아있다.

 

프란시스코 고야, <1808년 5월 3일>, 1808, 프라도 미술관.

 

고야가 왕실 초상화에서 넌지시 표현했던 갈등과 분열은 닥쳐올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그들의 무능함으로 드러났다. 침공에 맞서 스페인 왕실은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프랑스군을 효과적으로 막지 못했고 그 결과 수도 마드리드가 프랑스의 손에 떨어지게 된다. 하지만 진정한 비극은 점령 이후에 시작되었다. 그때까지 남아있었던 스페인 왕실 가문의 일원을 호위하는 과정에서 민중들과 프랑스 군이 충돌했고 끔찍한 유혈사태가 일어났다. 당시 마드리드에 있던 고야는 이 순간을 <푸에트라 델 솔,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라는 작품을 통해 기록했다. 양일간에 걸쳐 일어난 폭동과 진압 과정에서 고야가 목격한 것은 무자비한 학살이었다. 특히 <1808년 5월 3일>에서 나타난 희생자와 군인의 극명한 대비는 이 사건이 지닌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작품에 대한 해석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특히나 양팔을 벌린채 죽음을 맞이하는 희생자의 모습은 그 포즈가 내포하고 있는 상징적 의미와 스페인과 가톨릭의 밀착관계로 인해 오랫동안 예수와 연관되어 해석되어졌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서 인상 깊은 것은 그러한 인물을 비추는 랜턴의 존재에 있다. 작품에 등장한 랜턴은 석유나 카본 가스로 불을 붙이는 도구로 1801년 파리에서 처음 선보인 이후 프랑스에서 대량으로 제작되었다. 나폴레옹은 이 발명품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야간 기습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 랜턴은 군사적인 목적이 아닌 효율적 학살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랜턴은 희생자를 비춘다는 형식적 장치이자 기술의 발달이 가져오는 비극의 일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것은 18-19세기 과학기술의 발달이 낳은 진보가 폭력의 수단으로 사용될 때 그것이 어떤 끔직한 결과를 낳는지 보여주는 명징한 사례다. 과학적 발명품으로서나 그 시대 이론가들의 주장으로서나 이 시기는 빛의 시대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 빛은 계몽과 더불어 야만을 비추고 있다. 그렇기에 랜턴은 이후의 전쟁에서 과학기술이 살육의 수단으로 이용된 수 없이 많은 사례들의 기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편 고야의 그림은 사건의 목격자로 화가를 위치짓는 당시의 경향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프랑스에서 이러한 경향은 전쟁화 분야에 있어 사실성을 담보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고야의 회화 또한 그러한 경향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으나 단순한 기록을 넘어 전쟁의 참상을 극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낭만주의적 경향을 띄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과장된 포즈와 적나라한 살육의 장면은 단지 감정의 과도한 분출로 인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을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서 끔찍했던 그날의 기억을 담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낭만주의적 윤색이 아닌 역사에 대한 기록으로 읽혀질 수 있는 것이다.

 

프란시스코 고야, <이것이 더 나쁘다>, 《전쟁의 재앙들》, 1810-1820,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에서의 참성을 다룬 일련의 작품들에서 알 수 있듯이 고야는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는데 있어 그 어느 것도 숨기려 하지 않았다. 1810년부터 1820년까지 제작한 일련의 판화 작품들은 그것을 뒷받침해준다. <전쟁의 재앙들>이라는 제목이 붙은 판화들은 프랑스와의 전쟁과 그 이후의 왕정복고를 다룬 세 개의 연작 시리즈로 구성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고야의 후기 작업에서 나타나는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의 전조처럼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한 개인의 예술적 커리어 외에도 생생한 사실에 대한 기록이라는 측면에서 고야의 판화들은 그 가치가 있다. 고야가 묘사한 전쟁의 기록들에는 선과 악의 구분이 없다. 그의 작품들에서 스페인은 선 프랑스는 악, 민중은 선 지배자는 악이라는 구도는 혼란과 공포, 폭력의 현장 앞에서 무의미한 것처럼 보인다. 절단된 신체와 쌓여있는 시체들, 가감없는 학살의 현장에 대한 묘사는 그것이 얼마나 고증에 부합하는지와 상관 없이 당시 스페인을 휩쓴 전쟁의 분위기를 직접적으로 전달해주고 있다. 고야가 완성한 일련의 판화들은 반도전쟁이 누구하나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과 같은 전쟁이었다는 점을 시각적으로 말해주는듯 하다.

 

후안 갈베즈, 페르난도 브람빌라, <세미나리오의 폐허>, 《사라고사의 폐허들》, 1812-1813, 비블로테카 나시오날.

 

고야의 판화들이 전쟁 기간 동안 인간이 겪은 참상을 고발하고 있다면 다른 스페인 화가들은 이 시기 벌어진 물질적인 피해, 특히 도시와 건물들에 집중해 일련의 작품들을 제작했다. 후안 갈베즈와 페르난도 브람빌라가 작업한 <사라고사의 폐허들>(1812-1813) 연작은 이런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이다. 작품은 반도전쟁 기간 벌어진 사라고사 공방전을 기념하기 위한 국가적 프로젝트의 일부로 시작됐다. 그것의 제작 주체와 소재에서도 알 수 있듯 전쟁의 참상을 기록하기보다는 도시를 지켜낸 사라고사 시민들을 치켜세우고 프랑스군에 의한 도시의 파괴를 비판적으로 고발하는 애국주의적 목적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국가로부터 작품을 의뢰 받은 두 화가는 모두 스페인 아카데미 회원으로 작품에 대한 고전적 규범에 익숙한 전문가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작품을 제작하는데 있어서도 기존의 형식적 전거를 참고하되 그것을 동시대 스페인의 상황에 맞게 변형시키는 방식으로 판화를 완성했다. 그들이 사라고사의 모습을 재현하는데 있어 참고한 도상들은 18세기 무렵 큰 인기를 얻게된 그리스, 로마의 폐허 이미지였다. 18세기 유럽에서는 고전고대에 대한 관심과 그랜드투어의 유행으로 말미암아 로마, 그리스 유적에 대한 관심이 확산된 시기였고 이에 대한 이미지의 유통도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 시기 고대시대에 대한 관심은 당연하게도 그 시대의 여러가지 측면, 그 중에서도 특히 긍정적인 측면들에 대해 발굴하고 이를 동시대의 삶과 문화에 적용하는 일련의 행위들을 확산시켰다. 하지만 그러한 관심은 예술 분야에서 옛시절에 대한 긍정적인 의미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일으키는 감정, 요컨대 화려했지만 이제는 지나가버린 것에 대한 멜랑콜리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 소재로 활용되고는 했다. 또한 낭만주의가 점차 유럽의 지식인, 예술가들 사이에서 유행하게된 이후에는 고대문명과 자연의 연관관계에 속에서 불변하는 자연과 다른 문명의 덧없음을 묘사하는 소재로 활용되고는 했다. 폐허 이미지는 이러한 의미의 변화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도상이다. 이 시기 폐허 이미지는 유럽인들에게 크게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하나는 그것이 문명의 (내부 요인에 의한)쇠락 그리고 그로인한 상실을 의미했고 또 다른 하나는 그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초목과 같은 자연물에 의해 변형, 부식된다는 점에 착안해 자연의 위대함을 찬양한다는 의미와도 연결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폐허의 함의는 때때로 폐허의 정확한 재현이 아닌 의미에 맞춘 시각적 변형 혹은 소재의 선택으로 이어지곤 했다. 즉, 폐허가 가진 의미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정확한 재현에 의존하기 보다는 과장이나 폐허의 특정 요소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의미를 획득하는 일련의 경향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스페인의 두 화가가 애국주의적 목적의 판화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사라고사의 어떤 측면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세미나리오의 폐허>란 제목이 붙은 일련의 판화들에서 그러한 목적은 동일 지역이 시간의 차이에 따라 어떤 변화를 보이는지를 통해 표현되고 있다. 낮 시간을 그린 작품에서 폐허의 모습은 지난 전투의 상처를 복구하고 시민들이 그러한 작업에 동참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시신을 운구하고 잔해들을 치우는 시민들의 모습은 이를 보는 스페인인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려는 목적 하에 의도적으로 선택된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작품 내의 폐허의 이미지는 과거 폐허 이미지가 그러하였듯 쇠락, 자연의 위대함을 찬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작품은 그러한 폐허를 딛고 일어선 사라고사 시민들을 강조하며 이를 통해 스페인 시민들의 애국심을 강조하고 있다.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작품에서는 동일 지역이 프랑스에 의해 어떻게 파괴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밤 풍경을 묘사한 작품은 프랑스인들의 파괴적인 공격을 도시 내의 화재 장면을 통해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작품들에서 그림 속 장면들이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인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사라고사의 폐허가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탄생했다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시민들의 영웅적인 행동과 프랑스의 만행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를 보는 스페인 관객들이 작품을 통해 스페인에 대한 애국적인 감정을 불러일으켰다면 작품은 그 자체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다.

 

역사적 지평에서 나폴레옹 전쟁은 각국의 민족적 감정을 자극시켜 민족주의를 추동했다고 알려져 있다. 폐허 이미지의 변화 과정은 바로 그러한 역사적 전개가 미술사에서 어떠한 변화를 추동했는지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라고사의 폐허를 묘사한 일련의 작품들은 비록 그 형식적 기원에 있어 신고전주의의 폐허 이미지를 따르고 있지만 목적에 있어서는 온전히 민족주의적 시선이 담겨져 있다. 이러한 민족주의적 함의는 폐허 이미지를 조국의 시련과 영광을 재현하는 기념비로 재탄생시켰다. 공교롭게도 폐허 이미지의 의미 변화는 신고전주의의 흥망과도 어느정도 일치한다. 서양 미술을 규정하는 지배적인 양식으로 여겨졌던 신고전주의는 그것의 용어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그리스, 로마에 대한 재발견과 동시대적 해석을 강조했다. 하지만 그러한 경향은 19세기로 넘어와 각국의 역사, 자연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국제적인 공통 언어였던 그리스, 로마의 신화는 이제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동시대의 사건들로 대체된다. 그리스, 로마의 폐허는 이제 각국의 고유한 자연지형과 고유의 문화를 반영하는 랜드마크들로 채워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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