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6년 앵그르가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살롱에 전시했을 때 비평가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들은 앵그르가 재능 있는 화가라는 점은 인정했지만 그 재능이 <옥좌 위의 나폴레옹>과 같은 결과물로 나왔다는 점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작품에 대한 비난은 가볍게는 사소한 형식 오류에 대한 지적부터 심하게는 예술가의 자질을 따져묻는 시비조의 비판까지 다양했다. 누군가는 그의 작품이 지닌 기괴한 자세와 창백한 피부를 지적했다. 또 누구는 작품이 지나치게 기독교 도상에 기대고 있으며 각 요소들이 조화롭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평자는 그가 다비드의 제자였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애처롭기 그지없다"는 원색적 비난을 가했다. 그런데 재밌는 비평하나가 눈에 띈다. 살롱 전시 직후 한 비평가는 그림 속 나폴레옹의 눈이 생기 없이 그려졌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 표현이 "아우스터리츠의 정복자에겐 어울리지 않는다"라고 논평했던 것이다.

1805년 12월 2일, 나폴레옹의 대관식 있고 정확히 1년 뒤에 벌어진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나폴레옹 개인을 넘어 프랑스 제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전투로 역사에 남았다.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해 나폴레옹은 유럽의 국가들에게 자신의 군사적인 능력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전투의 결과만큼이나 그 여파도 상당했는데 프랑스 제국의 행보를 저지하려던 오스트리아는 신성로마제국의 해체와 함께 굴욕적인 화평 조약을 맺었으며 영국의 경우 소 윌리엄 피트의 사망과 함께 내각이 교체되는 변화를 겪었다. 결과적으로 이 전투는 3차 대프동맹의 해체로 이어졌고 프랑스는 유럽의 패권자로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프랑스 내부에서도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나폴레옹의 입지를 더욱 확고하게 다져준 전투가 되었다. 1806년의 전시에서 나폴레옹 초상화를 평가하며 비평가들이 나폴레옹을 아우스터리츠의 정복자라 평한 것은 이런 당대의 분위기를 보여준다. 나폴레옹은 이 전투의 승리를 대대적으로 홍보하기 위해 전투를 기념하는 대규모 회화 제작에 착수한다. 이 일은 루브르 박물관의 관장이자 나폴레옹 정권 하에서 미술 관련 정책들을 주도하고 있었던 비방 드농의 주도 하에 이뤄졌다. 그는 여러 후보들을 물색한 끝에 프랑수와 제라르라는 화가에게 이 일을 맡겼다.
당시 프랑스 예술계의 입장에서 다비드, 그로 같은 쟁쟁한 화가들을 제치고 프랑수와 제라르가 선택되었다는 것은 여러모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는 프랑스에서 역사화보다는 초상화가로 널리 알려진 화가였다. 이런 평가는 당대에 단순히 기법적인 능숙함 뿐만 아니라 화가의 예술적 재능이 초상화에 더 적합하다는 평가를 포함한 것이었다. 이러한 꼬리표는 화가 본인에게 양날의 검과 같았다. 만약 화가가 평생에 걸처 오로지 초상화만을 그리고자 마음 먹었다면 이런 평가는 긍정적인 요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화가가 초상화 이외에 다른 장르를 그리고자 한다면 그것은 굴레가 되어 돌아왔다. 이것은 예술 장르에 관한 당대의 인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시 특정 장르를 잘 그린다는 것은 그것을 기교적으로 잘 그린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초상화가로 불린다는 것은 단순 기교를 넘어 그 사람의 예술적 천성 자체가 초상화에 적합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 천성을 따르는 것이 화가로서의 미덕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인식이 장르에 대한 위계적 질서와 결합하면서 마치 하나의 신분처럼 작동했다는 사실이다. 특히나 이 시기에는 장르간의 비교적 엄격한 위계로 인해 역사화가가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는데 만약 자신이 역사화에 적합한 예술적 천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에 도전하는 것이 '분수에 맞지 않는 행위'로 비춰질 우려가 있었으며 대중들의 평가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마이너스 요소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기에 제라르가 역사적 전투를 기념할 회화 제작을 맡게되었다는 것은 이 일을 맡긴 프랑스 정부의 입장에서도 큰 도전이었다.
물론 제라르가 세간의 평가처럼 역사화에 무지한 화가는 아니었다. 그는 자크 루이 다비드의 제자로 학생 시절 그 재능을 인정 받은 바 있으며 또 1800년에는 동문이었던 앙느 루이 지로데와 함께 나폴레옹 부부가 머무는 여름 별장에 역사화를 그리는 작업을 맡은적도 있다. 심지어 이 작업에서 제라르는 함께 작업한 지로데를 제치고 나폴레옹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화가로서의 커리어 초기 공식전이었던 살롱전에서 부진한 성적을 냈으며 혁명 전후로는 여러 유명 인사들의 초상화 작업에 주력했기 때문에 세간의 인식 속에는 초상화를 잘 그리는 화가로 알려졌을 뿐이었다.
이 작업이 제라르 본인에게 매우 중요한 작업이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3년이라는 긴 작업기간은 그가 세밀한 구성 하나하나까지 고심해서 작업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표다. 그렇게 탄생한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이 전투를 시각적으로 재현한 대표적 작품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1810년 살롱에서 그의 작품이 대중에게 처음 공개되었을 때 관람객들은 이 작품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그보다 더 이전인 1808년 튈르리 궁에서 작품을 처음 본 나폴레옹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제라르의 작품이 주문자와 대중 모두에게 긍정적 반응을 이끌어낸데는 여러가지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술사의 관점에서 그의 작품은 전쟁화 장르에 대한 기존의 예술 관례를 거부하면서도 새로운 표현방식을 효과적으로 제시했기 때문에 긍정적인 평가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작품은 일반적으로 파노라마 형식으로 재현되는 전쟁화와 다르게 비교적 가까운 시점에서 현장을 묘사했다. 이로 인해 관객들은 마치 1805년의 영광스런 전투 현장에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작품 하단에 묘사된 몇몇 인물들이 마치 캔버스의 프레임에 잘려나간듯 신체 일부만 표현된 것은 그러한 효과를 더욱 배가시키고 있다. 특히나 당시의 많은 역사화들이 마치 연극무대처럼 관객과 작품 속 공간을 철저히 분리했기 때문에 이러한 효과는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렇게 전장에 초대 받은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다름 아닌 화가가 선택한 장면 그 자체였다. 일반적인 전쟁화 장르에서 가장 많이 채택되는 장면은 무엇보다 전투 장면이다. 기록의 측면에 있어 전투 장면은 작품이 보여주고자 하는 사건의 개요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며 프로파간다 측면에서도 승리의 순간을 기념하기 가장 적절한 장면이다. 또한 작품을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도 생생한 현장감을 전달한다는 측면에 있어 전투 장면에 대한 인기가 높았다. 그런데 제라르는 이러한 관례를 깨고 전투 직후의 장면을 택한 것이다. 이러한 장면 선택의 배경에는 분명 러시아 군이 항복하는 순간을 화폭에 표현하고 싶다는 화가의 욕망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러시아 군의 항복 장면은 당시 전투에 참여했던 인물들의 수기를 통해 널리 알려져 대중들에게도 익숙했기 때문에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효과까지 있었다. 그러나 전쟁화는 어쨌던 전투를 담는 것이 정석이었기에 그것을 마냥 도외시할 수는 없었다. 이에 제라르는 작품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 각각 다른 장면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이를 해결하려 했다. 즉, 전경의 모습은 전투의 장면을 상상할 수 있도록 여러 시각적인 장치들을 배치하고 중경에는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유명한 장면을 배치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겠다는 전략을 채택한 것이다. 이런 전략은 결과적으로 매우 성공적이었다. 비평가들은 이 작품이 서로 다른 두 개의 이야기를 한데 합쳐놓은 그림이라는 사실을 쉽사리 알아챌 수 있었다. 하지만 서로 다른 두 개의 이야기를 한 화폭에 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라르는 그 난관을 구성의 묘를 통해 돌파했다. 자칫 이질적으로 보일 수 있는 두 장면을 인물들을 원형으로 배치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했다. 그 결과 작품은 두 개의 이야기를 전달함에도 마치 하나의 이야기, 즉, 러시아군의 항복 소식을 알리는 장 랍의 일화만을 전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비평가들이 주목했던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일부 평론가들은 제라르의 작품이 훌륭한 작품임에는 틀림없지만 인물의 배치에 있어 전통적인 방식과 다르다는 점을 지적했다. 작품 속에서 인물들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우선 오른쪽에 말을 타고 있는 나폴레옹과 참모들의 모습이 있고 반대편에는 러시아의 볼콘스키 대공을 데려오는 장 랍의 모습과 맘루크 기병대의 모습이 보인다. 마지막으로 작품 하단에 쓰러진 병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문제가 된 것은 나폴레옹의 위치였다. 역사화의 인물 배치 관습에 있어 중심 인물은 원근법상의 소실점 근처에 배치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소실점은 나폴레옹와 장 랍 사이의 빈공간을 향하고 있어 일반적인 법칙에 어긋나 있다. 이것은 특히 나폴레옹이 입고 있는 복장 때문에 더욱 강조된다. 제라르는 작품 준비과정에서 당시 나폴레옹을 수행했던 인물들의 증언을 적극적으로 참고했는데 그러한 증언에서 일관적으로 나타났던 것이 다름 아닌 나폴레옹의 수수한 옷차림이었다. 이것은 화폭 속에서 화려한 옷을 갖춰입은 나폴레옹의 참모들과 비교적 장식이 덜 된 모자와 옷을 입은 나폴레옹의 대비로 나타났다. 이러한 대비는 분명 나폴레옹이 외양에 치중하지 않는 검소한 인물이라는 점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프로파간다적인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위에서 지적했던 인물 배치로 인해 작품 속에서 나폴레옹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져 보일 우려도 있었다. 제라르 또한 작품을 제작하는 단계에서 그런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기타 다른 회화적 장치들을 이용해 나폴레옹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이를 해결하고자 했다. 가령 하단에 쓰러져 있는 맘루크 병사는 그 방향이 명백히 나폴레옹을 향하고 있으며 장 랍의 하단에 위치한 흉갑기병 또한 나폴레옹을 바라보고 있다. 결정적으로 빛의 방향 또한 이런 강조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렇듯 작품은 아주 완벽하다고 볼 순 없는 몇 가지 형식적인 결함이 보였지만 그것을 상쇄할 여러 시각적인 장치들로 인해 호평을 받았다. 초상화가로 알려졌던 제라르는 이제 역사화가로서도 그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또한 그는 이 작품을 기점으로 프랑스 화단에서 주요 작가로 명성을 떨쳤다. 작품을 살롱에 선보인 직후인 1811년 그는 에콜 데 보자르의 교수로 부임하는데 이 자리가 단순 교수 자리가 아닌 당대 프랑스의 유명한 화가들에게 주어지는 명예로운 직책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화단 내에서의 입지 또한 그만큼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재밌는 것은 그의 명성이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에도 꺾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록 역사화 분야에서 주목할만한 작품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초상화 분야에서는 부르봉 왕가의 초상화 작업에 봉사하며 그 명성을 이어나갔던 것이다. 1820년대 다비드가 벨기에로 자발적인 망명을 떠나는 등 굴곡진 삶을 살았던 것에 비하면 그의 말년은 비교적 평온했다. 심지어 제라르는 나폴레옹 집권기에 받았던 작위를 그대로 유지했고 학술회의 회원 자리 또한 유지했다. 예술계 내에서도 그는 나름 원로 대접을 받으며 부와 명예 모두를 거머쥘 수 있었다.
하지만 사후 그의 명성은 생전에 누렸던 것만큼이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가 죽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라르라는 인물의 존재는 프랑스 예술계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뒤이어 19세기 후반 모더니즘의 물결이 유럽과 미국을 덮치고 곧이어 전세계로 번지자 그가 추구했던 미술은 아카데미즘이라는 모호한 딱지와 함께 사라져 박물관의 카탈로그에서나 그 이름을 볼 수 있는 작가가 되었다. 그가 다시금 재조명된것은 21세기에 들어서였다. 2000년대 중반 왕정복고기 전후로 하는 미술들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활발하게 일어나면서 프랑수와 제라르의 작품 또한 주목을 받았다. 재밌는 것은 그가 처음 주목을 받은 것이 19세기 초반 초상화 연구 분야에서였다는 것이다. 그가 평생에 걸쳐 벗어나고 싶었던 초상화가라는 딱지는 역설적이게도 그의 작품 세계가 재조명 받는 것에 일조를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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