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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나폴레옹 전쟁과 미술

나폴레옹 전쟁과 미술 (6) 노트르담 대성당, 1804년

by 공식 2022. 8. 3.

 

자크 루이 다비드, <나폴레옹의 대관식>, 1808, 루브르 박물관.


새로운 왕의 탄생은 예술가들에게 있어 엄청난 호재다. 왕의 즉위를 기념하는 대규모 작품 주문이 이어지며 곧 이어 왕의 치세를 상징할 각종 화폐, 깃발, 휘장을 만드는 일도 들어오니 부와 명예 모두를 거머쥘 기회가 한꺼번에 찾아오는 것이다. 1804년 나폴레옹이 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의 옥좌에 올랐을 때 예술가들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름을 알릴 큰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기회임과 동시에 큰부담이었다. 부르봉 왕가가 아닌 새로운 황가의 첫 시작으로써 그에 걸맞는 상징 체계를 새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대관식 당시 노트르담 대성당의 모습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열린 나폴레옹의 대관식은 첫번째 시험대였다. 예술가들에겐 과거 부르봉 왕조의 상징적 도안들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황제의 위엄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각적 표상들이 필요했다. 예술가들은 부르봉 왕조 이전 더 먼 과거를 오늘날에 맞게 재창안하는 방식으로 이를 해결했다. 이에 따라 고대 그리스, 로마의 도상들이 대거 차용되었으며 아주 드물지만 기독교적인 도상도 적당한 변형을 거쳐 도입되었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리모델링은 이런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노트르담 성당은 본디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하지만 중세를 상징하는 고딕 양식 성당은 새로운 제국의 첫 시작을 알리는 대관식의 장소로 적합하지 않았다. 예술가들은 이곳을 성당이 아닌 그리스의 신전 혹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으로 탈바꿈 하고자 했다. 가장 먼저 주목했던 것은 기둥이었다. 대관식의 책임자들은 궁륭을 떠받치고 있는 가는 기둥을 스투코를 덧바른 그리스, 로마의 건축 양식으로 개조했다. 또한 성당의 입구에는 고대 그리스의 양식으로 장식된 기둥들과 지붕으로 주랑을 만들어 마치 고대 그리스 신전의 입구처럼 만들었다. 이런식의 대대적인 리모델링은 당대의 관객들에게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는데 대관식에 참석한 한 평자는 "신조차 이곳이 성당인지 몰랐을 것이다"라고 썼을 정도였다. 하지만 단지 장소만을 바꾼다고 해서 새로운 황제에 걸맞는 공간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관식의 가장 중요한 인물, 나폴레옹 그 자신이 과거의 왕조들과 다른 새로운 인물이 되어야 했다. 나폴레옹 또한 이를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는 본래 프랑스 왕들의 대관식에서 사용되던 샤를마뉴의 왕관을 거부하고 그 대신에 황금으로된 월계관을 쓸 것을 고집했다. 이것은 그가 스스로를 부르봉 왕조의 계승자가 아닌 로마 황제의 계승자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실제 19세기 유럽의 왕실에서 황금 월계관을 쓴 사례는 많지 않았다. 특히나 왕들의 초상화에서 황금 월계관을 쓴 모습으로 왕이 그려진 작품은 거의 없다. 또한 새로운 프랑스를 상징하는 동물로 독수리를 채택했는데 독수리는 로마에서 사용되었던 상징임과 동시에 샤를마뉴 대제를 상징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나폴레옹에게 더 없이 걸맞는 동물이었다. 이렇듯 세심한 시각적 장치들이 동원된 나폴레옹의 대관식은 오늘날 다양한 시각매체에 기록되어 그 진행 과정이 상세히 남아있다. 하지만 오늘날 이 대관식을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은 루브르에 처음 전시된 이후 지금까지 그곳에서 관객들을 맞이하고 있는 자크 루이 다비드 작품 <나폴레옹의 대관식> 때문인듯하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 <마리 드 메디치의 대관식>, 1622-1624, 루브르 박물관.


다비드는 대관식 직전 프랑스 정부로부터 작품 의뢰를 받았다. 이를 위해 튈르리 궁에서 진행된 행사 리허설에도 참가했으며 대관식 당일 성가대 좌측에 위치한 자리에서 행사의 모습을 스케치하는 것도 허락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이러한 준비만으로는 부족했다. 대관식 이후 그는 더욱 철저하게 사전 작업에 돌입했다. 다비드의 <나폴레옹의 대관식>은 그 준비과정부터 관객들의 반응까지 비교적 상세하게 남아있는 편이다. 우선 대관식의 모습을 온전히 담기위한 최적의 구도를 찾기 위해 오페라 무대 디자이너를 고용해 노트르담 성당 내부 모형과 참석자들의 인형들을 제작한 후 마치 디오라마처럼 당시의 모습을 재현했다. 또한 행사 참석자들을 작업실로 초대해 각 인물들에 대한 상세한 드로잉 작업을 남기기도 했다. 그렇게 1여년간의 준비작업을 마치고 실제 작업에 들어간 것은 1805년 12월에 이르러서였다. 하지만 철저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넘어야할 산이 많았다. 대관식 장면을 옆에서 바라본 그림을 그릴 것인가 아니면 비스듬하게 위에서 올려다본 모습으로 그릴 것인가? 그렇게 구도를 잡았다면 인물들은 어느 정도까지 상세히 묘사할 것인가? 또한 대관식의 여러 순서 중 어떤 장면을 화폭에 담을 것인가? 등등. 다행스럽게도 다비드에게는 훌륭한 전거가 있었다. 루벤스의 작품 <마리 드 메디치의 대관식>이 바로 그것이다. 다비드는 루브르에서 본 이 작품을 참고삼아 캔버스를 완성해갔다.

 

자크 루이 다비드, <조세핀의 왕관을 쥔 나폴레옹>, 1805, 루브르 박물관.


전체적인 윤곽이 잡힌 이후에는 중심인물, 특히 나폴레옹의 자세가 문제가 되었다. 당초 다비드는 한 손은 검을 쥐고 있고 다른 한 손에는 조세핀의 왕관을 치켜 올린 나폴레옹의 모습을 그리고자 했다. 이런 제스처는 검을 통해 나폴레옹의 군사적인 위업을 강조함과 동시에 능동적인 행위자로 대관식을 주관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그는 얼마안가 이 구성을 포기한다. 나폴레옹이 이런 구성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나폴레옹이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은 교황의 모습이었다. 무릎에 손을 올린채 마치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황제를 쳐다보는 교황의 모습은 나폴레옹이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조세핀에게 왕관을 수여하는 나폴레옹의 모습은 유지하되 세부적인 부분에 있어 수정이 가해졌다. 나폴레옹의 팔의 각도가 보다 낮아졌고 교황은 나폴레옹 부부를 축복하는 모습으로 수정된 것이다. 작품 속 주요 인물들의 구성이 끝나자 이제는 세부 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문제가 되었다. 이 과정은 화가에게 엄청난 인내심을 요구했다. 특히나 작품 속 등장 인물들의 지속적인 클레임은 작업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였다. 한 번은 대관식에 참석했던 오스만 투르크 대사가 찾아와 자신의 모습을 작품에서 빼달라고 요청했다. 교회에 있는 것이 코란의 율법에 반하기 때문이었다. 다비드는 대사를 설득해 작품 속에 포함시킬 수 있었다. 또 한 번은 나폴레옹의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가 편지를 보내 자신과 형인 조세프 보나파르트의 위치를 변경해 달라고 요구했다. 작품과 달리 자신은 제단쪽에 있었으며 설사 그것을 묵과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모습이 형인 조세프에게 가려져 알아보기 힘들다는 이유였다. 다비드는 "모든 인물배치가 정교하게 계산된 것이기에 조금이라도 위치를 옮기면 전체적인 균형이 망가진다"는 이유를 들어 이 요구를 거절했다. 하지만 요청한 사람의 지위가 지위였던만큼 그 요구를 완전히 거절하기는 어려웠는지 루이와 조세프를 약간 떨어트려 조세프가 루이의 모습을 가리지 않도록 했다. 가장 황당한 것은 카프라라 추기경의 요구였다. 그는 작품 속에서 자신이 예식용 가발을 쓰고 있는 모습으로 나오길 원했다. 다비드는 그 요청을 단칼에 거절했다.

이렇게 완성된 <나폴레옹의 대관식>은 다비드의 예술적 역량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린 대작이었다. 그는 이 작품이 영광스런 현장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자 프랑스 제국의 주요 일원들을 모두 담은 집단 초상화의 역할을 하길 원했다. 작품의 제작 과정에서 실제 모습과 약간 다른 부분을 추가한 것은 그러한 이유였다. 가령 작품 속에는 나폴레옹의 어머니 레티치아 라몰리노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당시 그녀는 아들과의 불화로 인해 로마에 머물고 있었다. 또한 추기경 카프라라의 경우 대관식날 병에 걸려 참석하지 못했지만 작품 속에서는 교황 비오7세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완성된 작품은 대관식 당시의 풍경을 정확하게 재현한 그림으로 보긴 어려웠다. 그럼에도 그 웅장함과 정확한 세부묘사는 대관식의 주인공이었던 나폴레옹은 물론이고 프랑스 대중들에게 큰 호평을 받았으며 프랑스 제국의 예술적 역량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여겨졌다.

 

(좌) 장 오귀스트 앵그르, <옥좌 위의 나폴레옹>, 1806, 프랑스 국립 군사 박물관. // (우) 프랑수아 제라르, <로브를 입은 나폴레옹 1세>, 1805, 퐁텐블로 박물관. 1805년 앵그르의 황제초상화는 혹독한 비평을 들었는데 황제의 포즈가 헨트 제단화에서 예수의 포즈와 흡사해 보인다는 이유 때문이다. 앵그르 본인은 황제의 포즈가 헨트 제단화가 아닌 비잔티움의 모자이크에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나폴레옹의 경우 같은해 제라르가 그린 초상화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좌) 로베르 르페브르, <로브를 입은 나폴레옹>, 1806, 옹플뢰르 국립 박물관. // (우) 자크 루이 다비드, <로브를 입은 나폴레옹>, 1806, 릴 미술관. 1806년 다비드는 이탈리아의 항소법원에 보낼 황제 초상화를 완성한다. 하지만 이 초상화는 나폴레옹으로부터 혹평을 들었으며 이에 실망한 다비드는 작품을 미완성으로 남겨두었다. 당시 나폴레옹은 다비드의 초상화보다 로베르 르페브르의 초상화를 더 선호했다.


하지만 프랑스 예술계 내부의 일부 구성원들은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마냥 긍정적인 시선으로 보지는 않았다. 주된 쟁점은 당연하게도 현재의 프랑스가 혁명 이후 추구했던 이상들에 걸맞는 국가인가에 있었다. 논쟁의 불씨는 아이러니하게도 다비드의 제자들에게서 먼저 나타났다. 여전히 나폴레옹을 공화국의 영웅내지 프랑스의 보배로 여겼던 사람들은 이전과 비슷하게 신고전주의 형태를 고수했다. 이 입장을 지지했던 화가들은 나폴레옹이 집권했을 당시 국가의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황실의 주문을 받아 황제 나폴레옹을 미화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장 오귀스트 앵그르의 <옥좌 위의 나폴레옹>은 이런 경향을 가졌던 화가들이 황제를 묘사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이 그림을 그렸을 당시 앵그르의 나이는 불과 25세였다. 옥좌위에 앉은 황제의 정면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작업은 젊은 화가에게는 영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물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능숙한 표현법으로 나폴레옹을 재현했다. 대관식과 마찬가지로 앵그르는 이 그림을 구상하면서 부르봉 왕가의 초상화와 다른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야 했다. 신고전주의 화가인 앵그르는 그것을 고대 그리스, 로마로부터 찾았다. 그림 속에서 나폴레옹의 자세는 고대 그리스의 조각가인 페이디아스가 조각했다는 제우스 상의 자세와 동일하다. 공화국 영웅 나폴레옹은 이제 그리스 최고신에 준하는 황제가 된 것이다. 앵그르가 취했던 태도는 명확했다. 그는 한 인물을 우상화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카펫에 수 놓아져 있는 독수리 문양과 샤를마뉴 대제가 사용했다고 알려진 검, 황금빛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복장은 앵그르가 이 인물을 묘사할 때 무엇에 주안점을 두었는지 보여주고 있다.

 

앙느 루이 지로데, <프랑스 영웅들의 혼령을 맞이하는 오시안>, 1802, 말메종 국립미술관.

 

한편 나폴레옹이 전쟁을 지속함에 따라 제정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도 존재했다. 그들은 제정 초기만 하더라도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러시아에서의 패배가 뚜렷해진 시기에 가서는 노골적으로 정권에 대한 염증을 표현했다. 이런 경향의 그림들 중에서 이른 시기의 작품으로 앙느 루이 지로데가 그린 작품이 주목 할만하다. 그는 앵그르, 그로와 마찬가지로 다비드의 제자였으나 스승이나 몇몇 동문들과는 상반된 길을 걸었다. 그림 속에서 화면의 중앙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그가 전략적으로 실패를 맛보았던 이집트 전역에서의 병사들이다 그를 맞이하고 있는 사람은 전설 속에 등장하는 스코틀랜드의 시인 오시안이다. 나폴레옹은 당시에 오시안이 썼다고 알려진 서사시들을 애독했다고 한다. 오시안은 낭만주의 시대에 널리 알려졌는데 비단 나폴레옹뿐만 아니라 당대의 지식인들, 특히 낭만주의로 분류되는 사람들에게 있어 오시안은 북방의 호메로스로 인식될 정도였다. 지로데는 이 그림 속에서 프랑스 영웅들과 오시안을 동일한 장소에 놓음으로서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혼들에게 찬사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의도는 그림의 속 뜻을 온전히 파악한 것이라 할 수 없다. 당시 다비드가 정확히 지적했듯이 이 그림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고 표현에 있어서도 "섬뜩하기" 그지 없었다. 강렬한 빛의 표현으로 인해 배경의 인물들이 수정처럼 보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정체를 알 수 없는(아마도 천상으로 추정할 수 있는) 장소가 그런 상상을 더해주고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그림은 나폴레옹이 애써 기억하려 하지 않는 불편한 진실인 이집트 원정과 전략적 실패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양심의 가책 때문일까? 나폴레옹은 정작 이 그림을 호평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볼때 이 그림을 대할 때의 진실은 나폴레옹보다는 다비드의 반응에 가까웠을 것이다. 1802년이라는 상당히 이른 시기에 제작된 이 그림은 선전을 목적으로한 그림이 애써 감춰온 진실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작품이다.

 

폴 들라로슈,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1853, 워커 아트 갤러리.


두 경향은 나폴레옹 시기 전체에 걸쳐서 화단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사조였다. 비록 신고전주의가 좀 더 나폴레옹의 문화정치에 부합하는 측면이 있었으나 낭만주의라고해서 완전히 배척받지는 않았다. 나폴레옹 그 자신이 오시안의 서사시를 애독했다는 것은 그 조차도 낭만주의적인 사조의 한 귀퉁이에 존재하는 인물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재밌는 것은 왕정복고기 그는 신고전주의가 아닌 낭만주의의 영웅으로서 그려졌다는 점이다. 살아있을 때는 신고전주의의 그림 속에서 우상화된 나폴레옹이 죽어서는 낭만주의의 그림 속에서 비극적 영웅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1840년 나폴레옹이 앵발리드에 안장된 이후 그려진 들라로슈의 작품은 이것의 전형이다. 이 그림은 일전에 다비드가 그린적 있었던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을 주제로 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다비드의 작품과 달리 이 작품은 지나치게 현실적이어서 되려 서글프게 보일 정도다. 그림 속의 나폴레옹은 앵그르나 다비드가 묘사하고자 했던 나폴레옹과 극단적으로 대비된다. 이들이 그린 나폴레옹은 제우스에 버금갈 정도의 신과 같은 무엇이었고 역사적으로는 카이사르에 비견될만한 무엇이었다. 하지만 낭만주의자들에게 나폴레옹은 비범하지만 평범함도 지니고 있으며 종국에 가서는 실패하고야 마는 그런 인간으로 묘사된다. 사실 이 인물의 진짜 모습은 우상화된 나폴레옹과 인간 나폴레옹의 중간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그림은 대상을 진짜처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화가 자신의 해석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은 그 자체로는 온전한 역사적인 사실을 보여주지 않는다. 고의든 아니든간에 역사적 사실은 화가가 쳐놓은 은유의 장막을 걷어낼때만 드러난다. 특히 이 시기의 예술은 이전시대에 있었던 정치적, 사상적 충돌의 여파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았다. 따라서 완벽에 가까운 핍진성을 표현한 그림은 없다. 그저 해석만이 있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