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양 미술/나폴레옹 전쟁과 미술

이집트원정, 1798년

by 공식 2021. 12. 6.

앙투안 장 그로, <나자렛 전투>, 1801, 낭트미술관

 

1801년 나폴레옹 통령정부는 혁명전쟁시기의 여러 전쟁들을 기념하기 위해 대대적인 문화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그중에서 주목을 받았던 프로젝트는 이집트 원정 도중 있었던 나자렛 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대형 역사화의 제작이었다. 이 전투는 그 자체가 동일한 시기의 여러 전투들과 비교했을 때 대단한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새로 들어선 정부가 예술가들에게 공모전 형식으로 작품 의뢰를 맡겼다는 점이 새로운 역사화에 대한 지식인들의 요구와 맞물려 큰 관심을 받았다. 이런 이유로 당대 프랑스에서 역사화로 이름 높았던 여러 화가들이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예비 스케치를 제출했다. 정부는 최종적으로 그로의 스케치를 채택했다. 그로에게 있어 프랑스 정부의 주문은 입지가 높아지고 있었던 자신의 명성을 더욱 확고하게 다져줄 발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제작된 <나자렛 전투>는 공모전 당시의 떠들썩한 분위기와 다르게 초기에 완성한 유화 스케치를 끝으로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했고 끝내 미완성으로 남았다. 주문자인 나폴레옹으로부터 더 시급한 일거리를 받았기 때문이다.

 

1798년 나폴레옹이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고 뒤이어 카이로를 점령했을 때만 해도 이집트 원정은 성공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원정이 진행될수록 머나먼 이집트, 시리아 땅에서의 군사작전이 결코 녹록치 않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영국 해군에 의해 보급로가 막히고 오스만 투르크의 조직적이고 끈질긴 공격이 날로 거세지는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전역을 포기하고 본국으로 돌아간다. 나폴레옹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는 것은 당연했다. 특히나 그가 역병에 걸린 프랑스 군대를 방치했고 심지어는 죽이려고 했다는 소문은 그의 정치적인 입지를 더욱 좁혀놓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이집트 원정을 둘러싼 가장 안좋은 소문을 잠재울 필요가 있었다. 과거 아르콜 다리에서의 신화가 화폭에 담겨 프랑스 대중들에게 전달된 것처럼 이번에도 나폴레옹은 시각매체를 프로파간다의 선봉에 세워 여론을 돌릴 심산이었다. 앙투안 장 그로가 <1799년 3월 11일 역병이 유행한 자파를 방문한 보나파르트>를 그리게 된 것은 바로 이 즈음이었다.

 

앙투안 장 그로, <1799년 3월 11일 역병이 유행한 자파를 방문한 보나파르트>, 1804, 루브르 박물관
앙투안 장 그로, <피라미드 전투>, 1810, 베르사유 미술관
앙투안 장 그로, <1799년 7월 25일 아부키르 전투>, 1806, 베르사유 미술관

 

앙투안 장 그로는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을 주제로 다양한 그림들을 그렸다. 미완성으로 남은 <나자렛 전투>뿐만 아니라 원정을 대표했던 전투인 피라미드 전투와 조아생 뮈라의 기병돌격으로 잘 알려진 아부키르 전투를 역사화로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작품들 중에서 자파에 번진 역병을 주제로 한 작품은 스케일의 측면에서 여타 다른 회화 작품들과 비교가 안될 만큼 거대했으며 작품 공개 당시 그 크기만큼이나 여러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로가 작품을 살롱에 공개했을 당시 나폴레옹은 이미 황제가 된 뒤였다. 그렇기에 작품은 자파에서 있었던 비극적인 사건을 고발하는 것이 아닌 지도자의 과오를 덮기 위해 진실을 교묘하게 왜곡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뛰어난 선전화가로 나폴레옹의 총애를 받았던 그로는 자파의 생지옥을 "위대한 지도자" 나폴레옹의 손길에 의해 정화되는 장소로 변모시켰다. 자파는 이집트 원정 당시 시리아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중요 교통로로 전략적 중요성이 높았던 도시였다. 또한 이곳에 있는 항구를 통해 물자 공급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원정군의 고질적인 보급 문제를 조금이나마 개선시켜줄 수 있는 요충지였다. 하지만 수비군들은 나폴레옹이 보낸 항복 사절의 목을 베어버릴 정도로 완강한 저항의지를 드러냈다. 이에 나폴레옹은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대대적인 포격을 실시했고 그 뒤로 며칠간의 공성전과 약탈, 잔혹한 처형이 이어졌다. 마침내 원정군은 자파를 수중에 넣을 수 있게 되었지만 승리도 잠시 프랑스군을 덮친 역병이 원정을 파국적인 결말로 몰고갔다. 나폴레옹은 바쁘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도 역병으로 신음하는 병사들을 찾아가 그들을 위무하고자 했다. 화가는 바로 이 찰나의 장면을 끌어와 거대한 화폭에 담았다.

 

나폴레옹이 역병 구호소를 찾아갔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화폭 속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장면들은 그로 본인의 상상이 가미된 것이었다. 그림 속에서 나폴레옹은 역병이 걸린 환자의 손을 대담하게 어루만지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 장면 자체가 진실인지 아닌지 당대에도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로가 생각하기에 나폴레옹의 제스쳐는 일반 국민들에게 이집트 원정의 실패를 위무하고 (나폴레옹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더없이 적절해보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고 보기엔 진실은 너무 가혹했다. 실제 역사에서 프랑스 병사들은 사실상 버려지고 말았다. 진군에 차질이 생길 것을 대비한 조치였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그로의 그림은 살롱전에 출품되어 관객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반응은 나폴레옹과 그로가 의도한 것처럼 언제나 일관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이 작품에서 나폴레옹이 보여주는 리더쉽과 자애로움에 감탄을 했다. 그런 사람들은 빛으로 하이라이트된 그림의 중앙부, 나폴레옹이 과감하게 역병 걸린 병사를 어루만지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 그림을 처음 본 사람들은 유럽인이면 으레 세계관으로 가지고 있는 기독교적인 그 무엇을 자연스레 떠올렸다. 시리아(심지어 지역조차 그런 연상 작용을 돕는다)의 한 역병 구호소에서 나폴레옹과 그의 장군들은 마치 예수와 12제자의 그것과 유사한 모습처럼 비쳤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저 멀리 언덕 위에 나무 끼는 프랑스의 국기를 보라. 아무리 세속화가 진행된 프랑스라 하더라도 그것은 프랑스 대중들에게 마치 예루살렘의 골고다 언덕과 같은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자파에서 벌어진 극단적인 폭력과 비정함을 나폴레옹과 예수의 이미지를 겹쳐놓음으로써 감춰놓은 것이다.

 

하지만 이와는 조금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도 존재했다. 일부는 이 그림이 몇 가지 측면에서 전통적인 역사화 장르에 위배된다는 점을 깨달았다. 비평가들은 특히 작품에서 묘사되고 있는 프랑스 병사들이 너무나도 비참한 모습으로 그려졌다는 점을 비판했다. 심지어 그들 중 몇몇이 누드로 그려졌다는 점은 더 큰 논란을 낳았다. 이런 표현은 어쩌면 후퇴 당시에 본인이 역병 환자가 아닌 일반적인 부상병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옷을 벗어 상처를 보여줬다는 일화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일반 관객들에게 그것은 단지 미술의 관례적 규범을 위반하는 무엇으로 보였을 뿐이다. 당시의 신고전주의 양식 전통에서 남성의 누드는 용맹함과 조직의 건강함을 상징하는 도상이었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 남성의 누드는 그런 목적이 아닌 단지 고통에 신음하는 병사들을 묘사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한다. 작품 속에서 프랑스인들의 모습은 나폴레옹을 제외한 그 어떤 인물도 용맹 따위와 같은 고대의 덕목과 어울리지 않는다. 만약 역사적인 맥락을 전혀 모른다면 회화 속에 묘사된 프랑스인들의 모습은 점령군의 모습이 아닌 패배자의 모습으로 보일 정도다. 고통에 신음하는 병사들에 비해 복장을 갖추고 프랑스인들을 간호하는 시리아 현지인들(당대의 문헌에서 이들은 투르크인, 이집트인, 아랍인 등 중동의 여러 민족들을 지칭하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의 모습은 그런 생각을 더욱 부추긴다. 이미 당대의 몇몇 비평가들은 혁명의 이상을 전파는 프랑스 병사들의 모습이 "동방의 야만인들"보다 못하게 묘사되었다는 점에 분개했다. 비록 그들은 나폴레옹에게 항복한 피정복민이지만 그들은 국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군복조차 벗어던진 채 고통에 신음하는 프랑스 병사들과 비교했을 때 훨씬 더 고귀한 존재처럼 보였던 것이다. 심지어 어떤 관람객은 프랑스인과 현지인들이 별다른 민족적 구분 없이 그려졌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특히 왼쪽에 모여있는 일군의 인물들은 당대의 많은 비평가들 조차도 이들이 프랑스인인지 아니면 현지 사람들인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러한 오해는 물론 작품 속 프랑스인과 현지인을 그릴 때 동일한 모델을 참고한 화가 본인의 선택으로 인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점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당대 프랑스인들의 반응은 분명 서구중심적인면이 있었다.

 

자크 루이 다비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1784, 루브르 박물관

 

한편 작품의 독해 측면에 있어 당대인들의 반응 또한 일반적인 작품의 감상 방법과 다르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한 지점이 있다. 살롱에 출품된 역사화를 감상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평가 기준은 작품이 그것이 드러내고자 했던 교훈적 주제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표현했냐는 것이었다. 이때 작품의 디테일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한 화폭 안에 너무나도 많은 이야기들이 등장하는 것은 좋지 못한 역사화의 전형으로 여겨졌다. 그러한 세부적 디테일에 집중한 회화는 으레 로코코적인 것 혹은 역사화보다 위계가 낮은 풍속화와 유사한 것으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신고전주의 역사화의 전형으로 꼽히는 다비드의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역사화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작품은 국가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개인들이라는 주제를 위해 여타 세부적인 디테일들을 모두 생략했다. 우측에 슬퍼하는 여인들이 약간의 디테일을 보태곤 있지만 그것조차도 온전히 작품의 주제 의식을 전달한다는 큰 목표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이 작품은 마치 연극무대의 배경같이 후경의 모습을 어둡게 처리하고 기둥을 통해 화면이 확장되는 것을 차단했는데 이 또한 중심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형식적인 장치였다. 하지만 그로의 작품 속에서 초인적 인간 나폴레옹의 모습은 좌우에 나열된 여러 가지 디테일로 인해 그 중요성이 희석되고 있다. 물론 빛의 처리와 구도, 이슬람 양식의 건물이 배치된 양상을 볼 때 나폴레옹이 중심인물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을 방해하는 너무나 많은 요소들이 화폭 곳곳에 산재해있어 중심 주제를 집중력 있게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듯 역사화의 감상 기준에서 보았을 때 작품에는 몇 가지 결함이 존재하지만 무슨 일인지 당대의 비평에서 그러한 점은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비평가들은 이러한 점을 지적하는 대신 곁가지에 불과한 주변 인물들에 대한 분석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이것은 아무리 프로파간다를 목적으로 한 작품이라 하더라도 감상자가 가지고 있는 정치, 사회적 견해에 따라 작품이 전혀 다른 층위로 해석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 대한 좋지 못한 소문들은 그가 황제에 오르고 나서도 계속되었고 그것은 황제의 강력한 위세와 검열 속에서도 여전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작품의 비평 과정에서 화가가 의도한 주제를 회피하고 작품의 주변 요소들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로의 그림은 여러모로 그 당시 프랑스의 상황을 표상한다. 그것은 정치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그러하였다. 나폴레옹에 대한 예술계의 인식, 동양에 대한 인식, 그리고 조국 프랑스에 대한 인식이 이 그림에서 드러난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보았을 때 그로에 대한 평가가 어떠하였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로는 당대에 매우 유명한 화가였고 심지어 자신의 스승이자 나폴레옹이 임명한 공식화가였던 다비드보다도 유명했다. 젊은 나이에 프랑스 미술계의 주요작가가 되었고 그 명성에 힘입어 당시 미술계에서 최고의 공식전시였던 살롱전에 연이어 출품했다.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그의 성공가도는 또래 화가들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였다. 이렇듯 어용화가의 일생과 같은 그의 삶을 보았을 때 선전물에 가까운 각색을 거쳐 그린 작품은 비난 외에 다른 평이 필요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그에 대해서 마냥 비판적 시선을 보낼 순 없다. 철저하게 각색된 그림일지라도 사건에 대한 일말의 진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전경 왼쪽에 턱을 괴고 관람객을 응시하는 인물은 어둠 속에 잠겨있고 현지인인지 프랑스인인지 불분명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그 당시 역병에 고통스러워하는 인물의 감정을 더없이 효과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 만약 관람자가 이탈리아 미술에 대해 박식한 인물이라면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서 지옥으로 끌려가는 인물의 포즈를 떠올리며 나폴레옹의 전쟁을 기독교적 죄악과 연결시켰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미술사는 아이러니하게도 두 개의 서로 다른 궤적을 발견한다. 그로는 비록 고전적인 기법, 구도를 차용해 그림을 그린 신고전주의 화가였으며 나폴레옹을 찬양하는 그림을 여럿 그렸지만 세부적인 디테일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고통,죽음,절망과 같은 것들을 가감 없이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이 이후 낭만주의라는 사조로 꽃 피워서 나타났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로는 자신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이후 세대의 화가들에게 새로운 전거를 제공해준 셈이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최후의심판> 세부, 1534~1541, 시스티나 성당

 

앙투안 장 그로, <1799년 3월 11일 역병이 유행한 자파를 방문한 보나파르트> 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