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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나폴레옹 전쟁과 미술

나폴레옹 전쟁과 미술 (5) 마렝고 전투, 1800년

by 공식 2022. 7. 28.



루이 프랑수와 르죈, <마렝고 전투>, 1800, 베르사유 미술관.

 

2차 이탈리아 원정의 결정적 전환점은 이탈리아 피에몬테주의 마렝고 전투에서 일어났다. 오스트리아군의 기습을 받은 나폴레옹은 이곳에서 큰 위기를 맞았지만 앙리 드제의 구원으로 극적인 승리를 이뤄냈다. 한편 미술사에서 마렝고전투는 19세기 전반 프랑스 미술에서 지배적인 장르 중 하나였던 전쟁기록화의 새로운 흐름을 마련한 전투로 유명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흐름은 아마추어 화가의 한 작품에서 시작되었다. 마렝고 전투 이듬해인 1801년, 군인이자 아마추어 화가였던 루이 프랑수와 르죈은 자신의 전투 경험을 토대로 아직 미완성이었던 <마렝고 전투>라는 작품을 출품한다. 1801년은 나폴레옹이 프로파간다의 수단으로 미술에 대한 적극적인 후원을 장려했던 해였다. 때문에 프랑스의 공식 전시였던 살롱에 대한 대중들의 기대가 어느 때보다 높았던 시기였다. 또한 당시 통령 정부 하에서 국가 단위의 전쟁화 의뢰가 대대적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여러 화가들은 앞다투어 혁명전쟁이라는 주제를 화폭에 담아 출품하였다. 이러한 열기 속에서 르죈이 출품한 작품은 다른 전업 화가들의 대작들을 제치고 대중들의 큰 주목을 받았다. 놀라운 것은 그에 대한 프랑스 대중의 관심이 당시 나폴레옹의 총애를 받고 있었던 앙투안 장 그로를 뛰어넘었다는 점이다. 이 시기 그로는 나폴레옹의 신임을 받으며 정부에서 주문한 여러 대작들을 제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위상에 있어서 여타 다른 화가들과 견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대중들은 1801년 살롱에서 르죈의 작품이 그로의 작품보다 더 훌륭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런 평가의 이면에는 전쟁화를 바라보는 당대의 새로운 시각이 있었다. 이전글에서 살펴보았듯 신고전주의 회화에서 좋은 작품의 척도는 도덕적 교훈을 화폭에 어떤식으로 담아냈는가의 여부에 있었다. 아무리 묘사가 훌륭하고 비싼 재료로 그림을 그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역사,신화의 전거를 토대로 한 교훈적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장식품과 다를바 없는 격이 낮은 작품으로 취급되었다. 그런데 18세기 후반에 들어 도덕적 교훈 전달이 아닌 현장감의 전달이 좋은 작품의 여부를 결정한다는 생각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런 경향의 배경에는 계몽주의 시대 개인의 권리와 체험에 대한 여러 긍정적 관념들이 정립된 사상적인 분위기와도 맥이 닿아있다. 미술 분야에서는 비평가들 역시 역사, 신화가 아닌 개인의 체험 또한 특정 사건의 진실함을 전달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 나아가 비평가들 뿐만 아니라 프랑스 대중들 또한 고전적 구성에 기댄 작위적 작품이 아닌 체험에 기반한 아마추어 화가의 작품이 더 사실적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이러한경향은 특히 현장감을 중요시 했던 전쟁화 장르에 있어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했다.

 

반 데르 묄렌, <로비스에서 라인강을 건너는 프랑스 군>, 1672, 레이크스 미술관.

혁명 이전 전쟁화는 전쟁터를 배경으로 서있는 지휘관들과 장군들의 모습을 기념한다는 성격이 강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의 모습을 그리는데 있어 뚜렷한 중심인물들이 두드러지게 강조되었고 전투는 단지 배경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혁명이 일어난 이후 그려진 일련의 그림들 또한 그 대상이 왕에서 영웅적 시민으로 바뀌었을뿐 그 변화없이 경향이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화에서 개인의 경험이 중요한 요소로 떠오르자 이제는 특정 인물에 대한 기념이 아닌 당시 전쟁 상황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중요한 요소로 여겨졌다. 그것은 형식의 측면에 있어 전경에 강조되던 주요 인물들을 전쟁의 혼란 속으로 밀어넣는 새로운 구성으로 나타났다. 벨기에 화가 반 데르 묄렌의 1672년 작품 <로비스에서 라인강을 건너는 프랑스 군>과 르죈의 작품은 좋은 비교가 된다. 반 데르 뮐렌의 작품은 루이14세의 주문을 받아 상속 전쟁 당시 왕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루이14세는 반 데르 묄렌에게 작품을 주문했을 때 전투 그 자체의 현장감보다 전투로 인해 확립된 자신의 권위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것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화폭에서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당연하게도 전경에 위치한 루이14세다. 흰 말을 타고 전장 너머를 가리키고 있는 루이 14의 모습은 배경이 전장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기마초상화의 그것과 흡사한 구성으로 그려져 있다. 또한 작품에서 전투는 중심인물인 루이14와 함께 녹아들지 못하고 단지 배경으로만 존재하고 있다. 작품 속에서 가장 격렬하게 전투가 일어나고 있는 지점은 누가 보아도 중경에 위치한 스페인과 프랑스 기병대의 충돌임에도 그러한 사건이 마치 루이14세와는 무관하다는 듯 별개의 구성으로 처리된 것이다. 이는 작품이 오직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만 기능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후 뮐렌의 작품은 17~18세기에 걸처 프랑스 화가들에게 전쟁화의 전형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이것은 어느 정도 화가 본인의 선택이라기 보단 화가의 주된 주문자인 왕실의 기호가 반영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르죈의 작품에서 전쟁화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선다. <마렝고 전투>가 이전의 전쟁화와 비교할 때 두드러지는 것은 중심 인물들의 크기에 있다. <마렝고 전투>에서 중심은 인물은 화면 왼쪽 말을 타고 있는 나폴레옹과 참모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묄렌의 작품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크게 그려지지 않았으며 되려 멀리서 보았을 때는 다른 병사들의 모습과 별 다를바 없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이렇듯 전투라는 주요한 사건 속에 들어간 인물들의 모습은 작품의 주문자를 강조하는 전쟁화의 전통에 위배되었지만 전투의 상황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에 있어서 관객들에게 이 그림이 실제 전투의 현장을 직접 경험하고 작품을 완성했다는 느낌을 들게 해주었다. 여기에 더해 르죈의 경력은 그의 작품이 전투의 현장감을 살리고 있다는 생각에 일조했다. 앞서 언급했듯 그는 전업 화가가 아닌 군인의 신분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1793년 포병 하사관으로 입대한 이후 줄곧 군대에서 경력을 밟고 있었고 마렝고 전투가 벌어졌을 당시에는 마찬가지로 전투에 참여했던 알렉상드르 베르티에의 전속부관으로 있었다. 이런 개인의 경력사항은 많은 경우 살롱 전시 기간 동안 알려졌기 때문에 다른 화가들에 비해 훨씬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대의 호의적인 비평 또한 이러한 르죈의 직업적인 배경을 주된 이유로 삼고 있다. 이것은 르죈에게는 꽤나 행운이었다. 왜냐하면 사실 그는 군대에 입대하기전 아카데미의 일원이었던 궁정화가 피에르 발랑시엔의 사사를 받았기 때문이다. 즉, 그는 기교적인 측면에서는 결코 다른 화가들에게 뒤지지 않았지만 전쟁 당시에는 군 경력을 밟고 있었기 때문에 직업 화가에 대해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비평가들의 매서운 칼날도 어느 정도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르죈에 대한 호의적 평가는 단순히 그의 직업적인 배경에만 머무르는 것은 아니었다. 1801년 살롱 개최 당시 비평가들과 대중들은 전쟁화의 범람에 따른 폭력성의 문제를 어떻게 봐야할 것인가를 두고 광범위한 논쟁을 벌였다. 다시 말해 전쟁이 필연적으로 동반하고 있는 폭력,죽음,좌절과 같은 부정적인 요소를 화폭에 어느정도까지 표현해야하는지에 대한 광범위한 논쟁이 있었던 것이다. 화가들 또한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었다. 전투의 현장감을 재현하기 위해서 폭력성은 분명 필요한 사안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될 경우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교훈적인 주제가 묻힐 우려가 있었다. 이런 문제에 있어 가장 논란이 되었던 것은 앙투안 장 그로가 출품한 일련의 작품들이었다. 그가 비록 나폴레옹의 신임을 받고 있는 화가였지만 비평가들이 보기에 그의 작품에서 표현된 폭력성은 고귀한 도덕적 교훈을 담아야할 역사화의 범주를 한참이나 넘어버린 무엇이었다. 더구나 고전고대의 성지인 이탈리아에서 오랫동안 수련한 다비드의 제자가 이러한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비평가들에게 좋은 먹잇감이었다.

(좌) 앙투안 장 그로, <아부키르 전투>, 1807, 베르사유 미술관 // (우) 루이 프랑수와 르죈, <마렝고 전투>


흥미로운 것은 비평가들이 그로의 작품을 르죈의 작품과 비교하며 비판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르죈의 작품이 충분한 사실성을 담보하고 있음에도 그러한 폭력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반면 그로의 작품은 폭력성 자체에 너무 매몰되어 되려 작품의 목적 자체를 망각했다고 보았다. 이런 비판은 분명 그로에게는 부당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대의 기준에서 르죈의 작품은 애초에 역사화라고 부르기 애매한 지점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가령 그로의 <아부키르 전투>는 돌격하고 있는 인물들을 강조해 군인들의 용기라는 덕목을 관객에게 전달하고 있다. 즉, 전경에 배치된 쓰러진 병사들의 모습을 통해 전투의 폭력적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기는 하지만 교훈을 전달한다는 대전제 자체는 결코 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르죈은 전,중,후경에서 모두 동일한 정도로 전투의 모습을 담고 있어 교훈을 주기보다는 마치 사진을 찍은듯 기계적인 사건의 재현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더구나 지역적 특성을 드러내는 배경의 세부에 집착한 나머지 인물들의 행위가 상대적으로 두드러져 보이지 않았다. 요컨대 그것은 단순 기록화일뿐 역사화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비판은 분명 타당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와는 별개로 르죈의 작품은 대중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으며 프랑스 전역에서 소비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 비평가는 이런 인기를 다음과 같이 짧게 논평했다."전혀 아름답지는 않지만 그것은 진실이다. 그리고 오직 진실된 것만이 사랑받을 수 있다." 유럽의 미술은 이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과거 아카데미는 도덕을 미와 동일시했다. 그들에게 있어 도덕적인 것을 표현하는 것이 곧 좋은 작품을 만드는 최상의 길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에 더해 진실을 전달하는 것 또한 좋은 작품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런 변화는 유럽의 예술 취향을 결정했던 아카데미의 공고한 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이것이 완전히 무너지는 것은 반세기가 지나서였다. 하지만 속도를 늦출순 있을지언정 아카데미가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은 19세기 내내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는 르죈의 행보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그의 작품은 판화로 재복제되어 혁명전쟁을 다루는 삽화로 쓰였으며 이후에 출판된 참전 병사들의 회고록에서 르죈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대중적인 인기뿐만 아니라 예술계 내에서도 그의 인기는 나폴레옹 전쟁 기간 내내 지속되었다. 특히 이집트 원정을 다룬 일련의 작품들은 <마렝고 전투>만큼이나 큰 주목을 받으며 그를 주요작가의 지위로까지 올려놓았다. 아이러니한 것은 르죈이 이집트 원정을 참가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작품들이 사실적인 현장감을 반영하는 그림으로 높이 평가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그림이 실제 전투에 참여했는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하나의 장르 규칙으로 자리매김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규칙은 19세기를 넘어 20세기까지 생명력을 유지하며 기록화의 주요 양식적 특징으로 남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