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0년 프랑스의 제1통령이었던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군을 상대하기 위해 위험천만한 모험을 감행했다. 비탈길과 칼바람으로 서 있기 조차 버거운 알프스 산맥을 돌파하기로 한 것이다. 포위당한 프랑스 군을 구해주기 위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진로를 잡은 것이다. 이런 모험 끝에 그는 제노아에 도달했고 비록 그곳에서는 패배하지만 이후의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롬바르디아 지방에서 프랑스의 주도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당시 그의 군사적인 행동은 이전 시대 알프스를 넘었던 전설적인 장군들을 떠올리게 했는데 그것은 작품 하단에 있는 바위에 한니발과 샤를마뉴가 새겨져 있다는 점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혁명기를 통틀어 프랑스에서 가장 영향력 있었던 화가인 자크 루이 다비드 또한 이 코르시카 출신의 장군에게 깊은 감동을 받았다. 본디 그는 부르봉 왕조에 충성하던 화가였다. 흔히 혁명 이념을 화폭에 표현했다고 알려진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또한 그것의 시작은 왕실 주문으로 제작된 그림이었다. 혁명 이전, 그림 속의 호라티우스 형제들은 왕실을 수호하는 존재들로 비쳤고 실제로도 그러하였다. 하지만 혁명이 프랑스를 덮치자 그 그림은 왕실의 안녕이 아닌 혁명의 이상을 설파하는 작품으로 해석되었다. 1789년 구기장에서의 선언 이후 다비드의 인생은 멈출 줄 모르는 상승 곡선을 그렸다. 그는 일련의 그림들 명성을 얻은 이후 혁명 정부의 예술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각종 공공집회, 제복, 메달, 기념비 등 이미지가 필요한 사업이면 무엇이던 관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혁명기 프랑스의 문화 예술계에서 그의 영향력이 미지치 않는 곳이 없었다. 이 화가의 영향력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정치적으로도 수완을 발휘해 당대에 인기 있는 정치가들의 신망을 토대로 자신의 입지를 넓혀나가기도 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에게 돈을 지원해 주었던 루이 16세의 처형에도 가담했다.

혁명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다비드에게 있어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은 낭만주의적 영웅의 화신이자 혁명 이상의 실천을 대리해줄 구원자로 보였다. 하지만 다비드와 나폴레옹의 첫 만남은 생각보단 유쾌하지 않았다. 둘은 1797년 12월 10일 다비드의 스튜디오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이탈리아 원정을 마친 나폴레옹은 이미 국민적 인지도를 얻은 상태였고 다비드 또한 혁명 이후 프랑스 화단을 대표하는 화가로 명성이 높았던 시기였다. 스튜디오에 찾아온 나폴레옹에게 다비드는 존경의 표시로 차기작의 모델이 되어달라 부탁했다. 나폴레옹은 이를 흔쾌히 수락했지만 이후 다가올 끔찍한 고역에 대해서는 몰랐던 모양이다. 당시 초상화는 작품의 대상이 되는 인물을 몇 시간 심지어는 며칠 동안 세워놓고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물론 여러 현실적인 이유로 마네킹을 사용하거나 대리모델 등을 고용하기도 했지만 초상화를 의뢰한 주문자가 직접 모델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 자체는 변함이 없었다. 문제는 모델을 서는 것이 상상을 초월한 인내심을 요구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나폴레옹에게는 이런 고역을 감당할 인내심이 부족했다. 한쪽을 응시한 채 부동자세로 서있기를 3시간째,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온갖 불평불만을 늘어놓던 나폴레옹은 결국 지루하다는 핑계를 대고 스튜디오를 빠져나왔던 것이다. 그렇게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의 첫 초상화는 지금까지도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다비드 본인은 이 그림에 만족했다. 얼굴과 상반신 일부만이 완성되었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프랑스의 위대한 영웅을 보여주는데 손색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이 다시 다비드의 스튜디오를 찾아간 것은 1801년의 일이었다. 이 당시 나폴레옹은 1799년의 브뤼메르 쿠데타 이후 프랑스 내에서 넘볼 수 없는 지위를 누리고 있었던 상태였다. 반면 다비드는 테르미도르 반동의 여파로 수감되었다가 풀려난지 얼마 안 된 상태였고 스튜디오에 칩거하며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라는 작품을 제작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런 때에 나폴레옹은 다비드에게 두 번째 이탈리아 원정을 기념하는 전쟁화를 주문하기 위해 찾아왔던 것이다. 만약 다비드가 평범한 화가였다면 최고 권력자의 이런 제안을 별다른 생각 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다비드는 화가로서뿐만 아니라 정치가로의 경력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폴레옹의 제안 대신 스페인의 카를로스 4세로부터 의뢰받은 나폴레옹의 초상화(당시 카를로스 4세는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에 감명을 받아 다비드에게 나폴레옹의 초상화 한 점을 주문해놓은 상태였다)를 역사화의 형식으로 개작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이는 과거 초상화에 대한 안좋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나폴레옹에게는 다소 불편한 제안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시기 나폴레옹은 이미 <아르콜 다리의 나폴레옹>과 같은 예술 작품이 엄청난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기능한다는 사실을 체감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모델을 서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제안을 수락했다.



그렇게 완성된 <생 베르나르 관문을 넘는 나폴레옹>은 그의 제자였던 그로와 마찬가지로 위정자를 찬양하기 위해서라면 진실을 왜곡하는 것도 서슴지 않겠다는 화가의 태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실제 나폴레옹은 알프스 산맥을 넘을 당시 현지인의 안내를 받아 말이 아닌 노새를 타고 갔으며 날씨 또한 청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그려진 그림들 중 이 주제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게 된 것은 왕정복고 이후의 일이었다. 그 이전까지 프랑스의 화가들, 심지어 적국이었던 영국의 화가들조차도 이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물론 두 국가의 화가들에게 있어 극적인 표현은 상반되는 두 개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프랑스 화가들의 입장에서 극적 표현은 나폴레옹이 온갖 역경을 딛고 공화국 프랑스의 이상을 실현시키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이런 설정은 비단 화풍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의 개인적인 인생사와도 맞닿아 관람객들이 작품의 의도를 쉽게 눈치챌 수 있게 했다.
다비드의 그림 속에서 주인공은 누가 보아도 한 명의 인물, 나폴레옹이다. 다비드는 다소 과장되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말을 크게 그렸고 인물의 동세를 세로축으로 설정해 관람자의 시선이 나폴레옹이 타고 있는 말에서 시작해 그의 손가락과 마렝고 전투 당시 입었다는 펄럭이는 망토에서 끝나도록 유도하고 있다. 만약 제목이 없다면 이 그림은 배경 속 산이 알프스 산이지 알기 힘들 정도로 인물이 크게 그려졌다. 일반적인 역사화의 관점에서 이 작품은 역사화라기보다는 차라리 황제들의 기마초상화에 가까워 보인다. 실제 다비드는 그러한 점을 염두해 두고 작품을 제작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역사화의 일반적인 특징에서 벗어난 이 작품이 오늘날 역사화의 범주로 분류되는 것은 나폴레옹이라는 인물 자체가 낭만주의 회화의 역사에서 영웅적인 주제 그 자체로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혁명 이전 역사화에서 고전고대의 인물들, 가령 다비드의 호라티우스 같은 인물들에게서 느꼈던 숭고함, 영웅에 대한 찬미가 오롯이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에게 투영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비드는 엄밀히 정의하면 "현대의 역사화"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이 그림이 다비드가 1801년 당시 제작하고 있던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와 같이 전시되었다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는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혁명의 이상이 피의 숙청과 혼란으로 점철되고 있었던 시기에 제작된 작품이다. 작품 속에서 사비니와 로마의 싸움을 중재하는 여인들의 모습은 당시 정치적인 숙청이 반복되던 프랑스 사회에 보내는 일종의 메시지로 여겨졌다. 그런데 이 작품 바로 옆에 <생 베르나르 관문을 넘는 나폴레옹>이 전시되었다는 것은 그러한 프랑스 사회의 혼란을 종결시킬 영웅이 바로 나폴레옹이라는 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더구나 다비드는 나폴레옹을 그리기 이전까지 역사화라는 장르에서 살아있는 동시대의 영웅을 그린적이 없었다. 그가 그렸던 역사화 형식 속의 영웅들은 대부분 고전고대의 영웅들(호라티우스)였거나 죽은 동시대의 순교자들(마라) 뿐이었다.

적국이었던 영국 화가들의 경우 극적 표현을 통해 정반대의 효과를 노렸다.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는 터너의 1812년의 작품은 그것의 전형이다. 작품 속에서 인물은 다비드의 그림과 다르게 부차적인 요소로 남아있다. 다비드의 그림과 터너의 그림을 비교해보라. 비록 동일한 인물은 아니지만 한니발의 일화를 그린 이 작품은 다비드의 그림에 대한 안티테제처럼 느껴진다. 앞서 말했듯, 터너의 그림에서는 되려 인물들을 구별하기 힘들다. 때문에 그의 그림은 다비드의 경우와 달리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로마 시대를 배경으로 한 그림이라는 것을 알 수 없을 정도다. 사실 터너의 입장에서 로마시대의 복장 고증에 충실했냐 혹은 역사적 기록에 충실하게 그림을 그렸냐는 중요하지 않다. 1812년이라는 시대 상황은 그에게 한니발이라는 인물의 위대함보다는 그의 군사적 모험이 가져왔던 위험천만한 행위를 부각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의도의 기저에는 당연하게도 동일한 행위를 했던 나폴레옹에 대한 반발심이 나타나 있었다. 몇 차례의 대불동맹이 나폴레옹의 선전과 동맹국들 간의 셈법으로 결렬되고 그 사이에 프랑스는 꺾일 줄 모를 기세로 러시아 침공에 들어갔다. 때문에 작품은 비단 고대로마를 위협했던 한 장군의 일대기를 다룬다는 측면을 넘어 나폴레옹의 오만함과 독선을 꼬집으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터너의 그림에서 화면을 이끌고 있는 주체는 화면의 2/3를 차지하고 있는 눈폭풍이다. 매섭게 몰아치는 눈보라로 인해 한니발의 병사들은 한 치 앞도 전진할 수가 없다. 터너는 내심 나폴레옹의 러시아 진격이 이런 결과로 치닫기를 바랐을 것이다.
비단 정치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회화 장르의 측면에 있어서도 두 작품은 대척점에 서 있다. 한쪽은 인물을 전면에 내세운 역사화이며 기법적으로 신고전주의적인 작품으로 분류된다. 서구 미술의 위계에 있어서 역사화는 오랫동안 최고의 지위를 누려왔다. 비록 이 시기에 들어서 기존의 역사화는 동시대의 옷을 입고 17세기 기존의 규범을 탈피했으며 때로는 낭만주의와 손을 잡기도 했지만 적어도 기본적인 사조는 고전주의에 기대고 있다. 반면 터너의 그림은 상대적으로 그 지위가 낮았던 풍경화에 가까운 그림이다. 그림 속에서 주된 주제는 역사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것의 주된 묘사 대상은 인간이 아닌 자연이다. 이러한 방식은 그것이 가진 낭만주의적 함의를 제외하면 동시대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신고전주의 양식보다는 왕정복고 이후 등장한 역사적 풍경화(paysage historique)라 불리는 장르와 더 친연성이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이 낭만주의라 분류된 것은 그것이 지닌 함의 때문이다. 그림 속에서 터너는 당대의 정치적인 함의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라는 복잡한 관계를 역사적 일화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자연의 불가항력적인 힘에 맞서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낭만주의 풍경화에서 오랫동안 탐구해왔던 이러한 주제가 작품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그림은 역사적 사실에 기댄 역사화이면서도 본질은 풍경화다.
이렇게 보면 두 그림은 나폴레옹 전쟁기 화가들의 상반된 태도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다비드와 터너는 사실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그 둘은 대척점에 있는 것 같지만 실은 한 인간의 서로 다른 두 측면이고 따라서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유사성이 보인다. 가령 다비드의 그림 속에서 너무나도 작게 표현된 병사들의 모습을 주목해보자. 육중한 말 아래 병사들이 힘겹게 산맥을 넘어가고 있다. 다비드는 애써 이 사실을 은폐하려는 듯 병사들을 어두운 색조로 표현해냈다. 그들이 넘어가고자 하는 산맥은 이 병사들이 앞으로 겪어야 할 고난을 예견해주는 듯하다. 이 그림에서 알프스 산맥의 모습은 산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거대한 벽처럼 보인다. 그 질감은 산이 넘을 수 있는 무엇이기보다는 견고한 강철판 같다는 인상을 줄 정도다. 실제 알프스 산을 넘으면서 병사들이 느꼈던 현실은 바로 이것이었을 것이다. 낭만주의가 빈번하게 묘사했던 소수자들, 일반 대중들, 지친 병사들의 모습은 여기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1800년이라는 시기는 아직 다비드가 혁명에 대한 이상으로 한껏 달아올랐던 시절이었다. 전쟁에 휩싸인 프랑스가 앞으로 이 병사들을 화폭의 전면에 등장시키려면 아직까지도 수 만, 수 십만의 목숨이 더 희생되어야 했다. 거대한 나폴레옹의 모습에 억눌려 화폭의 구석으로 달아난 이 존재들은 이제 "공화국 만세!"가 아닌 "황제 만세!"를 외치게 될 터였다. 다비드 본인에게 있어 <생 베르나르 관문을 넘는 나폴레옹>는 실추된 위신을 회복할 기회였다. 그는 이 작품을 계기로 나폴레옹의 신임을 한 몸에 받게 되었으며 1804년에는 황실의 첫 번째 공식화가라는 지위까지 누리게 된다. 황제의 대관식을 비롯한 각종 문화적 행사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게 되었으며 훈장, 의복과 같은 이미지가 요구되는 여러 일들을 도맡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한편으로 자신의 화업이 나폴레옹이 일으키게 될 전쟁과 궤를 같이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말년에 다가올 위기, 즉 나폴레옹의 유배와 다비드의 망명이라는 불행의 시작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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