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2년 테오도르 제리코는 <돌격하는 황제근위대 엽기병>을 출품한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21살로 화업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맞이한 살롱 전시였다. 1808년 동물화로 유명했던 칼 베르네와 다비드의 제자 중 한 명이었던 피에르 나르시스 게렝의 지도를 받은 제리코는 학생시절 그로의 작품을 모사하며 국가의 위업을 선전하는 역사화를 그리기를 원했다. 언뜻 보기에 그가 출품한 작품은 이런 개인적 야망이 잘 드러나는듯 보인다. 작품은 기마초상화라는 전쟁화의 전형적인 형식들 중 하나를 취하고 있다. 앞다리를 들어올린 말의 모습은 과거 왕들의 기마초상화에서 말의 역동적인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자주 그려지던 포즈이며 가깝게는 다비드의 작품 <생 베르나르 관문을 넘는 나폴레옹>과도 형식적인 유사성이 발견된다. 실제 제리코에 대한 전기를 처음으로 썼던 샤를 클레망은 이 작품이 영광(무엇의 영광인지는 서술하지 않았다)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기 시작하면 일반적인 기마초상화와는 다른 이질적인 부분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당시 관객들은 작품을 보기 전에 도록이나 팜플렛을 통해 작품, 작가의 정보를 사전에 접할 수 있었다. 때문에 그들이 먼저 주목했던 것은 아마도 작품의 제목이었을 것이다. 작품은 오늘날 <돌격하는 황제근위대 엽기병>이란 제목으로 알려져 있지만 전시 당시에 배포되었던 팜플렛에는 <M. D.의 기마초상(Portrait équestre de M. D.)>이라는 제목이 붙어있었다. M. D.가 도대체 누구인가? 관객들이 첫번째로 당황했던 것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 M. D.는 당시 제리코의 작품을 위해 모델을 섰던 알렉상드르 디외도네 중위를 줄여 부르는 이름이었다. 그는 황제근위대 소속 장교로 제리코와 막역한 사이였는데 이 시기에 제리코뿐만 아니라 여러 화가의 기마 초상화 모델을 섰다. 하지만 일반 관객들은 그러한 화가의 개인적 관계까지는 알지 못했기에 가까운 지인이 아니고서야 작품 속 엽기병이 단지 익명의 병사로만 보였다. 이는 당시의 회화적 관례로 보았을 때 매우 생소한 것이었다. 살롱에 출품되는 초상화 작품은 거의 예외 없이 유명인들을 모델로 한 초상화였다. 특히나 당시의 장르상의 위계에서 초상화는 역사화 다음가는 중요 장르였기 때문에 지도자, 명사, 각 분야에서 이름 높은 유명인사 등을 그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만약 그런 사람들을 그리지 않고 익명의 보통 사람들을 그리면 그것은 초상화가 아닌 풍속화로 분류될 가능성이 높았다. 제리코의 작품도 어쩌면 그러한 여과기를 거쳐 단지 풍속화로만 여겨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작품은 언뜻 보기에 근위대 병사의 영웅적인 돌격을 보여주고 있기에 그것이 관객이 모르는 영웅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착각할 소지가 있었다. 더구나 작품은 일반적인 초상화나 역사화와 마찬가지로 등신대 크기로 제작되었다(3.49m x 2.66m). 이런 압도적인 크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작품이 뭔가 고결한 대의를 담고 있는 역사화에 가까운 작품일 것이다라는 지레짐작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작품이 당대의 관객들에게 큰 혼란을 주었던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관객들은 이 작품 속 장면을 독해하는데 큰 어려움을 느꼈다. 예컨대 작품의 인물은 돌격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도망치고 있는 것인가? 돌격하고 있는 것이라면 확신에 찬 것인가 아니면 주저하며 두려워하고 있는 것인가? 오늘날 작품의 제목은 화폭 속의 병사가 돌격하는 모습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명시하지만 당시의 제목은 이 작품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올바르게 독해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런 혼란에는 작품 속 인물이 취하고 있는 애매모호한 포즈에서 기인하고 있는 바가 크다. 작품 속에서 말은 분명 앞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말의 머리와 기수는 뒤를 돌아보고 있으며 들고 있는 사브르 또한 공격을 하기 위한 자세라기 보다는 방어하기 위한 자세에 가깝게 묘사되고 있다. 지나치게 클로즈업된 화면도 그러한 혼란에 더욱 일조한다. 이렇듯 인물을 클로즈업 시켜 묘사하는 것은 당시 전쟁화 장르에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었던 현장감을 살리는데는 유용했지만 역으로 사건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없게 만든다는 단점이 있었다. 제리코의 작품은 그러한 단점이 극단적으로 구현된 사례다. 관객들은 아주 한정된 장면만을 가지고 화면 속 이야기를 추측해야 했다. 그들에게 주어진 정보라고는 중심인물과 좌우측에 묘사된 기병과 대포 잔해 그리고 화폭 전체를 집어삼킬듯 묘사된 연기와 화염뿐이다. 이런 제한된 정보 속에서 많은 관객들은 이 작품이 용감한 돌격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전쟁의 두려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장면이라고 여겼다. 19세기 중반 역사학자 쥘 미슐레는 이 작품을 감상하고 나서 "기병은 우리를 바라보며 "나는 꼼짝없이 죽겠구나"라고 생각하고 있다"라고 적었다. 보다 더 후대의 학자들은 연기와 화염이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불어오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에 따르면 이 장면은 우측에 보이는 대포에서도 알 수 있듯 포대를 공격하는 기병대의 모습을 담고 있다. 공격은 성공적이었을까? 작품 속 정보만으로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이 작품의 모델을 섰던 디외도네 중위는 러시아 원정 중 전사하고 만다. 하지만 굳이 그런 정보를 알지 못했더라도 당대의 많은 사람들이 작품 속 인물의 최후를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작품 그 자체가 아닌 당시의 사회상황이 만들어낸 독해였다. 사실 제리코의 작품은 그러한 해석을 어느 정도 의도한 측면이 있다. 작품 속에서 사건은 캔버스의 프레임 바깥에서 벌어진다. 화염과 연기, 기병이 돌격하고자 하는 목표 모두가 캔버스의 프레임 바깥에 존재하고 있다. 이 말은 바꿔 말하면 작품에 대한 전체적인 스토리를 온전히 관객의 상상에 맡긴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러시아 원정에 대한 부정적인 소식들이 들어오는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이 작품이 긍정적으로 해석될리 없었다.

1812년 살롱 당시 제리코의 작품과 나란히 전시되었던 앙투안 장 그로의 기마초상화와의 비교는 관객들이 느꼈을 당혹감을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나폴리의 왕이었던 뮈라 원수를 그린 기마초상화는 과거 왕들의 기마초상에서 보여주었던 양식적 특징들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제리코가 견습생 시절 그로의 예술 사상에 공감하며 그의 작품들을 연구했다는 사실이 무색하게 두 작품은 앞다리를 들어올린 말의 자세를 제외하면 공통점이 없다. 우선 캔버스 크기에 있어 두 작품은 등신대 초상화에 가깝지만 한쪽은 수평적인 축이 강조된 반면 다른 한쪽은 수직적인 축이 강조되고 있다. 이런 차이는 곧 바로 배경 묘사의 차이로 이어진다. 그로의 작품이 후경을 통해서 장소의 지리적인 특징과 전투의 전반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반면 제리코의 작품은 연기와 화염에 가려 장소를 가늠하기 어렵다. 또한 그로의 작품이 과거 초상화에서 그리하였듯 전투 장면과 주인공을 분리시키고 있는 반면 제리코의 작품에서 주인공은 전투의 현장 한 가운데에 들어가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붓질의 측면에서 그로의 작품이 표면을 매끄럽게 처리해 신고전주의의 형식적 특징이 드러나는 것에 비해 제리코의 붓질은 보다 거칠고 마무리가 덜 되었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이렇듯 기마초상의 전형을 보여주는 그로의 작품과 달리 제리코의 작품은 분명 관객들의 반발을 사기에 충분했다. 작품 전반에서 느껴지는 전쟁에 대한 염세주의적 분위기와 더불어 기존의 관례를 깨는 파격적인 형식 실험은 프랑스 관객들이 소화하기 힘든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나폴레옹이 엘바섬에 유폐되었던 1814년 그는 이 작품을 다시 들고 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이 무렵 완성한 신작 <전장을 떠나는 부상당한 흉갑기병>을 나란히 전시했던 것이다.

작품은 1812년 그가 그렸던 엽기병이 어떤 최후를 맞이했을지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날뛰고 있는 말의 모습은 이 인물이 자신이 타고 있는 말조차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위험한 상태라는 것을 보여준다. 적을 베어야 할 검은 다리를 지지하는 부목으로 전락했으며 병사의 표정은 자신감 보다는 절망감, 두려움이 먼저 보인다. 화면을 전반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회색, 검은색의 색조는 그러한 분위기를 더욱 배가시켜준다. 재밌는 것은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다르게 흉갑은 마치 강렬한 태양에 반사된듯이 번쩍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반된 갑옷의 묘사는 오랫동안 학자들의 큰 관심거리였다. 어떤 연구자는 이것이 화가의 보상심리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본다. 프랑스 제국의 굴욕적인 패배를 화폭에서 감추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로 인물의 장신구나 갑옷등을 과도한 디테일로 묘사했다는 것이다. 또 어떤 연구자는 당시의 환경적인 요인을 지적하며 그가 고증에 충실한 것일뿐이라고 본다. 이 시기 고증은 화가들에게 중요한 미덕이었지만 그것이 항상 지켜지지는 않았다. 특히나 금전적으로나 시간적 사정으로 정확한 고증이 어려운 경우에는 많은 부분 화가의 각색과 창작이 가미되었고 그 결과 당시의 시대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는 엉뚱한 복식과 무기들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작업에 착수했을 당시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군복에 대한 화집들이 널리 유통되어 비교적 쉽게 군복에 대한 자료들을 접할 수 있었다. 더구나 당시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그들을 가까이에서 관찰할 기회 또한 많았다. 이런 환경 속에서 제리코는 그가 묘사하고자 하는 병과의 복장을 과도할 정도로 충실하게 재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흉갑기병이 제목과 다르게 별다른 부상이 없어 보인다는 것도 많은 의문을 낳는다. 부상의 흔적은 관자놀이와 목덜미의 오른쪽에 보이지도 않을만큼 희미하게 보이는 핏자국 정도가 전부다. 이것은 그의 상처가 단지 육체적인 것만이 아니고 정신적인 것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작품은 당시 프랑스 전반에 깔려있던 암울한 분위기에 대못을 박는 작품이었다. 관객들은 이 작품을 보며 냉혹한 러시아의 겨울로부터 도망친 패잔병들의 대열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나폴레옹의 프랑스가 패배했고 국가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한 때 최강을 자랑하던 프랑스의 흉갑기병이 전장을 떠났을 때 느꼈을 수치심과 절망감은 당대 프랑스인들이 느꼈을 정서를 반영하고 있다. 이 작품은 살롱에 공개되자마자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그 비난의 초점은 표면적으로는 형식적인 부분에 집중되었다. 과거 그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이 주제와 맞지 않게 너무나도 큰 캔버스에 그려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 이외에도 작품이 건들고 있는 주제 자체가 프랑스인들에게 매우 민감하게 다가왔을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1814년에 제리코가 받았던 비난은 그가 이탈리아로 도망치듯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 제리코는 견습생 시절 제2의 그로를 꿈꿨다. 하지만 그의 회화 작품은 결국 다비드나 그로가 될 수 없었다. 그는 선배들의 길을 따라가기에는 너무 늦게 태어났고 그에 따라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만 했다.



살롱에 출품한 두 점의 작품 이외에 제리코는 1810년대에 기병을 소재로 하는 작품 3점을 완성한다. 이 작품에서도 앞서 살롱에 선보인 일련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군인의 용맹함이나 긍지는 그렇게 그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귀국 이후 그는 사회의 소수자들을 묘사하는데 주력했으며 죽을 때까지 동시대 전쟁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유사한 주제의식과 소재는 다른 화가들에 의해 계속해서 등장한다. 오라스 베르네가 그런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1819년 살롱에 <전장의 프랑스 척탄병>이라는 작품을 출품한다. 제리코의 작품이 전쟁에 대한 공포와 패배의 굴욕감을 보여주고자 했다면 베르네의 작품에서 인물은 전투 이후의 무력감과 절망을 시각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여기저기 널려있는 병장기의 모습과 중경에 널부러진 시체 그리고 멀리 후경에 보이는 십자가는 치열했던 전투의 현장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 손에 턱을 괸 전형적인 멜랑콜리 포즈를 취하고 있는 병사의 모습은 전쟁이 가져온 피로와 무력감을 드러내고 있다. 결정적으로 땅에 처박힌 독수리 깃대는 나폴레옹이 이끌던 프랑스 대육군의 영광이 한낱 먼지로 돌아갔음을 보여주는 시각적 장치다. 이렇듯 지휘관이 아닌 일반 병사의 시선에서 전장의 모습을 재현한 작품들은 1810~1820년대 전쟁에 대한 염세적인 분위기와 더불어 빈번하게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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