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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19세기 미술 - 확장된 시선

역사적 풍경화의 탄생과 그 배경

by 공식 2024. 11. 21.

아쉴에트나 미샬롱, <데모크리토스와 아브데르의 사람들>, 1817. 1817년 로마상 수상작

 

Steven Adams, ‘The fault of being purely French’: The Practice and Theory of Landscape Painting in Post-Revolutionary France, Art History, 36, 2013 

(순수하게 프랑스적인 것의 결점: 프랑스 혁명 이후 풍경화의 관행과 이론) 

 

 

프랑스의 19세기 초는 혁신과 전통이 혼재하는 시기였다. 왕정 복고 이후 혁명 이전의 전통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보수적 인물들은 혁명으로 인해 열려버린 사회,경제, 정치,문화적 파도를 억제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다. 하지만 그런 수단들은 얼마안가 거대한 해일을 막을 수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전통은 이 격랑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켜야 했다. 19세기 초 역사적 풍경화(Le paysage historique) 장르는 이러한 상황에서 선택된 하나의 대안이었다. 전근대적 미학을 풍경화 분야에서 실천한 역사적 풍경화는 니콜라 푸생과 클로드 로랭이라는 거장의 후광 아래 왕실의 지원을 받았으며 상업화와 떠오르고 있는 중간 계층, 보다 혁신적인 양식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고자 노력했다. 비록 19세기 이후 모더니즘으로 재배열된 역사상이 이 장르를 전통의 범주에 묶어 단순화 했지만 당대에 이것은 전통과 현대, 보수와 혁신으로 깔끔하게 나눌 수 없는 회색지대를 형성하며 프랑스 미술의 토양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스티브 아담스의 논문 ‘The fault of being purely French’: The Practice and Theory of Landscape Painting in Post-Revolutionary France (순수하게 프랑스적인 것의 결점: 프랑스 혁명 이후 풍경화의 관행과 이론)은 20세기 미술사에서 소외된 역사적 풍경화의 기원과 변화 과정을 복원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일견 정체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역사적 풍경화가 19세기 초 프랑스의 변화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밝히고자 했다. 

 

우선 저자는 혁명 전후 풍경화를 둘러싼 예술적 상황에 대해 전반적으로 고찰하며 어떠한 배경에서 역사적 풍경화가 등장했는지 살펴본다. 혁명 이전 풍경화 장르는 수집가들에게 인기있는 수집 대상이었다. 그들은 17세기 풍경화가들의 작품에서부터 단순 지리 정보를 담은 삽화, 동시대의 목가적인 풍경 비롯해 다양한 주제와 장르를 수집했으며 이는 앙시앙 레짐 시기 프랑스 미술계에서 풍경화가 나름의 입지를 구축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당대 프랑스에서 풍경화가 진지한 수집 대상이 되었던 것과는 별개로 풍경화를 뒷받침 해줄만한 이론은 부재했다. 프랑스에서 역사화 장르는 아카데미 설립 이전부터 다양한 논문, 강연 등을 통해 그것의 규범적 틀이나 따라야 할 역사적 전거들이 어느 정도 확립된 상태였다. 하지만 풍경화의 경우 최소 18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그 이론과 역사가 정립되기 시작했다.

 

1788년 클로드 앙리 와터렛(Claude-Henri Watelet)와 피에르 샤를 르베스크(Pierre-Charles Levesque)가 쓴 <회화, 조각, 세공 사전 Dictionnaire des arts de peinture, sculpture et gravure>은 풍경화의 역사와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초기 사례다. 저자는 이상적인 풍경에 대해 논하면서 그것이 고전 문학 연구를 통해 탄생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프랑스의 화가들이 이를 따라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고 말하는데 실천의 단계에서 프랑스의 기후와 환경, 역사적, 문화적 요소들이 고전의 사례를 받쳐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프랑스 풍경화가들이 고전 문학의 전거를 빌려 풍경을 그리고자 한다면 그들이 살고 있는 프랑스의 자연 환경으로 인해 나태해지고 '모방의 모방'에 머물며 종국에 가서는 매너리즘에 빠질 것이다. 지적이고 이상적인 풍경화는 화가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이탈리아의 자연 환경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요약하면 프랑스 화가들이 이상적인 풍경화를 그리고 싶다 하더라도 그들이 처해 있는 환경으로 인해 그것을 성취하는 것은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이상적이고 지적인 풍경화를 포기하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면 된다. 저자는 프랑스 화가들에게 걸맞는 것은 감각에 치중하며 일상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대상을 묘사한 풍경화라고 주장한다. 와터렛의 백과사전은 당시 문화 소비 계층이었던 귀족들의 전반적인 취향을 반영한 것이었기 때문에 동시대 풍경화의 제작, 수집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1791년에 백과사전 2판이 나왔을 때 그것은 이전과 정반대의 주장을 개진했다. 공동 저자에서 시작해 이제는 편집자가 된 르베스크는 풍경 부분을 보완하며 이전의 서술을 강하게 비판한다. 그는 와터렛의 풍경화 취향이 민족적 성향에 지나치게 매몰되었다고 비판하며 프랑스 풍경화는 고전고대의 취향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2판의 서술 방향 변화는 당대의 정치적인 상황과 큰 관련이 있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감각적인 것을 중요시 했던 귀족 취향은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졌고 고전적 미덕이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따라야 할 모범으로 여겨졌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적 평등을 지향하는 정치적 분위기는 그에 걸맞는 새로운 예술 작품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형성했다. 과거 와터렛이 프랑스의 역사적, 문화적 요소들을 언급하며 그것이 이상적 풍경화를 그림에 있어 방해가 된다고 했다면 그것이 일소된 현재의 프랑스는 이상적 미를 추구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갖추어진 것이 아닌가? 고전고대에 대한 심도깊은 연구들과 맞물린 프랑스 지식인들의 태도 변화는 곧 새로운 풍경화에 대한 요구로 이어졌다. 프랑스 비평가 앙투안 크리소스톰 콰트르메르 드 퀸시(Antoine Chrysostome Quatremère de Quincy)와 아카데미 원근법 교수였던 피에르앙리 발랑시엔느(Pierre-Henri de Valenciennes)가 풍경화에 대한 새로운 이론적 토대를 구축한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1806년 콰트르메르는 보수 성향의 잡지 <Archives littéraires de l'Europe>에 <로마 풍경화의 역사 Essai historique sur l'art du paysage à Rome>를 발표한다. 여기서 그는 풍경화 발전 과정을 서구 미술의 흐름 속에 위치시키며 고대부터 현재까지 그것이 어떠한 변천과정을 겪어왔는지 분석하고 있다. 콰트르메르에 따르면 그리스, 로마 시기에는 장식적인 목적 이외에는 풍경화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는데 이 시기 예술은 윤리적 계몽의 목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고대 시기에 예술은 사회와 강력하게 밀착되어 있었지만 오늘날 그러한 유대가 깨져있기 때문에 이를 복원해야만 했다. 그런 점에서 17세기 푸생은 풍경화 장르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화가라고 할 수 있었다. 콰트르메르가 보기에 푸생은 단지 전문 풍경화가가 아니었는데 푸생에게 있어 풍경화는 자연의 재현 수단이 아닌 고전적 미덕을 표현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회화에서 풍경은 고전고대의 환경, 역사, 문화, 가치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시이며 그렇기 때문에 단지 외양의 기계적인 재현이 아닌 지적인 창조의 결과였다. 하지만 푸생의 전통은 18세기에 와서 감각적인 것에만 몰두하는 전문 풍경화가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리고 이것이 콰트르메르가 설정한 역사관에서 풍경화 장르가 쇠락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는 쇠락한 풍경화 장르가 다시 예전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는 17세기의 전거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단지 외양에 대한 재현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고전고대에 대한 지식에 기반하여 윤리적 목적에 봉사하는 풍경을 창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그는 고전고대를 묘사하는 방식을 설명함에 있어 고대의 역사적 사실을 활용하는 것을 넘어 지리적인 측면 또한 강조했다. 1795년에 쓰여진 한 글에서 콰트르메르는 푸생이 로마 인근의 지리적, 문화적 요소들에 천착했다는 점을 높게 평가하며 인간의 발명 능력은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적 배경에 따라 차등적으로 발달한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그는 1748년 샤를 몽테스키외가 주장하고 이후 빙켈만이 인용한 주장에 근거해 적도 근처에  살고 있는 화가들은 자연과의 유사성에 매몰되지 않는 반면 태양이 상대적으로 덜 강렬하여 "창조적 재능이 영원히 불임 상태에 놓인" 추운 기후에서는 화가들이 단지 모방에만 그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지리적 조건과 함께 콰트르메르는 19세기 초의 상업화 물결 또한 경계했다. 그는 예술이 공적 자리가 아닌 부르주아의 저택과 같은 사적 공간에 머물게 된다면 그것이 본래 가지고 있어야 할 지적 요소들이 사라질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런 지적 요소들이 사라진 공간에는 감각적인 요소들만이 나타나며 18세기 풍경화의 쇠락 과정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그의 걱정은 어느 정도는 동시기 예술적 상황에 대한 반응이기도 했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 풍경화 장르는 중간 계급의 수요 증가와 함께 성행하게 되었는데 이때 완성된 작품들은 고전고대의 미덕을 재현하는 매체라기 보다는 자연 풍경에 대한 기계적 재현에 몰두한 것이거나 풍경을 픽쳐레스크적으로 묘사한 것에 가까웠다. 아트딜러, 의사, 전현직 정부 관료, 전직 군인 등 사회적 변화에 따라 전문 계층을 형성했던 부르주아 계급들은 새로운 수집가 집단을 형성하며 풍경화 구매에 몰두했다. 그들의 입장에서 풍경화는 부르주아의 저택에 걸 수 있을 정도로 적당한 크기를 가지고 있었고(혹은 그러한 요구조건에 맞추어 얼마든지 크기를 바꿀 수 있었고) 별다른 지적인 배경 없이도 쉽게 즐길 수 있는 장르였다. 콰트르메르로 대표되는 보수적인 인물들에게 이런 변화는 쇠락의 징후였지만 아트 딜러들에게 있어 그것은 보다 광범위한 소비 계층에게 작품들을 공급할 수 있다는 뜻으로 독해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10년 처음 출간되고 1820년 공식 출간된 발랑시엔느의 논문 < 예술가들이 사용할 수 있는 실용적 원근법 요소들과 회화, 특히 풍경에 대한 성찰과 조언 Elemens de perspective pratique à l’usage des artistes, suivie de reflexions et conseils à un Elève sur la Peinture et particulièrement sur le genre du Paysage> 은 풍경화가 고전을 어떠한 방식으로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여러 지침들을 제공해주었다. 

 

니콜라 푸생, <폴리페모스가 있는 풍경>, 1649, 캔버스에 유채, 에르미타주 박물관

 

발랑시엔느의 논문은 빙켈만이 주장한 고전고대의 이상적 미(ideal beau)를 어떻게 풍경화 분야에 도입할 수 있을까 고민한 결과였다. 그는 이상적 미를 추구함에 있어 단지 고전고대를 모방하는 것에서 머물러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중요한 것은 고전적 소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소재를 이용하여 고전이 제시하고자 하는 어떤 비전을 묘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푸생의 작품 <폴리페모스가 있는 풍경 Landscape with Polyphemus>을 모범적 사례로 제시한다. 여기서 후경에 있는 일몰은 1차적으로는 자연에 대한 관찰을 기반으로 한 예비스케치에서 따온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작품 속에 들어왔을 때 그것은 단순한 자연 현상의 묘사가 아닌 전경에 놓인 페르세포네의 강간을 암시하는 하나의 신호로 해석된다. 발랑시엔느에게 있어 이상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자연 그 자체에서 오는 무엇이라기 보다는 자연을 매개로 고전이 전달하는 윤리적, 교훈적 부분을 어느 정도까지 암시하냐에 따라 결정되었다. 발랑시엔느에게 있어 풍경은 사색할 가치가 있을 때에만 아름다운 것이었다. 설사 풍경화가들이 주변 풍경에 대한 관찰을 기반으로 몇몇 자연적 요소들을 따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향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사색할 가치가 있는 무엇, 바로 고전고대여야 했다. 쉽게 말해 자연은 그들이 판단하기에 이상적인 가치 혹은 대문자 자연을 위해 감각적인 것을 희생하고 고전고대에 봉사해야 했다. 때문에 콰트르메르와 마찬가지로 발랑시엔느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것은 감각이 아닌 관념이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관념은 예술에 흔들리지 않는 본질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수단이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그리고 왕정 복고를 거치며 프랑스의 사회, 정치, 경제, 문화적 요소들은 너무나 빠르게 변화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술은 더 이상 동시대의 것을 참고하여 높은 윤리적 이상을 표현할 수 없었다. 그것은 너무나 불충분 하거나 너무나 빠르게 변했고 심지어는 상업에 굴복해 타락했다. 그렇다면 화가는 이 변화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눈 앞에서 명멸하는 감각적인 것들을 무시하고 고고한 이상이 아직 온전하게 기능했던 시대, 즉 고전 문학에서 묘사된 그리스, 로마 시대의 것을 묘사해야 했다.

 

두 인물이 정초한 역사적 풍경화는 부르봉 왕정 복고 시기 국가의 예술 정책과 맞물리며 날개를 달았다. 새롭게 들어선 왕정은 이전 시기를 정치적, 도덕적으로 오염된 것으로 파악했다. 그들에게 소위 좋았던 시절은 아직 구체제가 온전하게 존속했던 시기였다. 역사적 풍경화가 왕가의 입장과 충분히 조응할 수 있다는 것은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이 시기 콰트르메르는 아카데미의 종신 비서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817년 에콜 데 보자르에는 역사화와 마찬가지로 역사적 풍경화 장르에도 로마상이 신설되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예술계의 반응은 싸늘했다.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역사적 풍경화가 주장하고 있는 이상적 미에 대한 이론들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설사 그것을 수용한다 하더라도 풍경화가 시도할 수 있는 여러 선택지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지 양립 불가능한 무엇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는 화가들 또한 공유하고 있었는데 실제 살롱에서 역사적 풍경화를 시도했던 많은 풍경화가들은 역사적 풍경화를 그림과 동시에 대중의 취향에 맞는 풍경화를 출품하기도 했다. 

 

아쉴에트나 미샬롱, <롤랑의 죽음>, 1819, 캔버스에 유채, 루브르 박물관

 

콰트르메르와 발랑시엔느의 바람과 다르게 역사적 풍경화는 풍경화 분야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리지 못했다. 정부의 주문은 화가들의 생계를 책임지기에는 부족했고 상업적인 활로를 여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왕실은 역사적 풍경화를 정치적 실용주의의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했지만 이 장르의 이론적 기반을 닦은 콰트르메르에게 있어 그것은 나폴레옹 정권이 역사화에 가했던 치명적 손상을 재현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렇듯 역사적 풍경화는 내외적인 몰이해에 직면했다. 1회 로마상 대회에 출품했던 화가들의 행보는 이 장르가 처한 곤경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로마상 수상자인 아쉴에트나 미샬롱(Achille-Etna Michallon)은 다른 참가자들에 비하면 역사적 풍경화의 이론적 토대와 원칙에 충실한 사람이었지만 1822년 살롱에 출품한 <롤랑의 죽음 Death of Roland>(1819)에서도 알 수 있듯 고전고대가 아닌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은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 풍경화를 그리기도 했다. 대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던 앙투안 펠릭스 보이세이어(Antoine-Félix Boisselier)와 알렉상드르아실 푸파(Alexandre-Achille Poupart) 또한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한 풍경화에 주력했다. 특히 푸파의 경우 트루바두르 회화(중세를 배경으로 한 역사 장르화의 일종) 뿐만 아니라 당시 살롱에서 인기있었던 파리와 프랑스 시골 지역의 모습을 담은 회화 작품들을 출품하기도 했다. 학생 시절 로마상 대회에 참가하며 두각을 드러냈던 대부분의 화가가 이와 같은 길을 걸었다.

 

1830년대 부르봉 왕조가 루이 필리프의 오를레앙 왕조로 바뀌자 역사적 풍경화를 뒷받침 해주던 정치적인 기반 역시 소멸되었다. 7월 왕조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다양한 사조들이 시도되었고 근대적 풍경화의 등장은 이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풍경화 장르로 두각을 드러냈다. 풍경화 장르를 타락으로부터 지켜줄 구원자로 등장했던 역사적 풍경화는 이제 타락의 진원지로 인식되었다. 1831년 폴 위에(Paul Huet)는 아카데미 풍경화가 예술계에서 폐위되었다고 선언했으며 1859년에 샤를 보들레르는 역사적 풍경화가 죽은 자들의 찬송가와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다. 20세기에도 역사적 풍경화는 19세기 예술계의 진보적 인사들이 비난했던 수사적 문구들로 지칭되었다. 그것은 이견의 여지 없이 반동적이었으며 정체되어 있는 장르이자 현대 예술의 시작이라 불리는 인상주의로 가는 길목에 있는 거대한 장애물로 여겨졌다. 하지만 스티브 아담스의 논문에서 역사적 풍경화는 시대적 변화에 맞서 나름의 내적 논리를 개발한 변화무쌍한 장르로 묘사된다. 이는 19세기 미술이 단지 이분법적으로 나누기 힘든 다양한 층위를 가지고 있다는 하나의 사례로 독해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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