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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미술/조선시대 미술

윤증 초상으로 보는 조선후기 초상화의 문화정치

by 공식 2021. 12. 4.

 

장경주, <윤증 초상>, 1744, 비단 채색, 종가 소장.(변량 작의 이모본)

 

 

초상화는 조선시대 미술을 대표하는 장르입니다. 조선 초중기 공신 초상화와 조선 후기 관복초상을 비롯해 왕의 모습을 화폭에 담은 어진까지 초상이라는 한정된 분야에서 다양한 종류의 그림들이 그려졌으며 당대 지배층 또한 이를 제작, 평가, 수집했었다는 점이 여러 문헌들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비단 당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초상화는 작품이 가진 사실성과 결부되어 관람객들에게 큰 관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가령 2011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특별기획전 <<초상화의 비밀>>展에 대한 관심은 오늘날 관람객들에게 조선시대의 초상화가 큰 관심을 불러모으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관심과 별개로 초상화가 조선시대 미술의 역사에서 꽤나 많은 부침을 겪은 장르라는 점은 잘 알려지지 않은듯합니다. 성리학이 조선에 정착하고 사림들이 점차 중앙정계에서 주도권을 잡아가던 시기 초상화는 그것이 가진 불교적 기원으로 인해 지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초상화는 중종,명종대 어진이 그려진 것을 끝으로 숙종대까지 왕실, 사대부들의 예술 세계에서 점차 밀려나는 추세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숙종연간을 전후로 변화하게됩니다.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 불교적 속례라는 인식은 이 시기 송시열과 같은 노론 중심의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초상화 다양한 기능을 강조하면서 변화하였고 주자가례에 대한 이해가 점차 심화됨에 따라 초상이라는 것이 비단 불교적 풍습일뿐만 아니라 주희와 같은 성인들이 빈번히 즐기고 평가했던 장르라는 점이 점차 부각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처럼 조선후기 초상화의 지위가 복권된 것은 그것이 단지 배향 이외에 또 다른 목적으로 활용될 가능성 또한 열어주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제의 이외에도 인물의 기록이라는 수기적 기능, 동일한 사상을 가진 인물들끼리의 시각적 상징물의 공유라는 정치적 기능을 담당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조선 후기 다변화된 초상화의 기능 중 본 글에서는 초상화가 가진 정치적인 기능을 <윤증 초상>에 관한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명재 윤증의 모습을 그린 <윤증 초상>은 1711년 그가 83세가 되던 해 도화서 화원 변량(卞良)에 의해 처음 그려졌습니다. 도화서 화원이라는 출신성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작품은 뛰어난 묘사로 비단 외양을 넘어 대상의 성격까지도 드러내는듯한 사실적 묘사가 두드러진 작품입니다. 하지만 세간에는 작품 속 인물의 세밀하고 사실적인 묘사 뿐만 아니라 제작 도중 벌어진 극적인 사건들로도 유명한듯 합니다.

 

윤증 초상의 제작 과정에 대한 기록은 『영당기적影堂紀蹟』에 자세하게 나와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윤증의 초상화 제작을 적극적으로 주도한 인물은 윤증의 종손이자 제자였던 경암 윤동수(尹東洙)였다고 합니다. 윤동수는 당시 다른 학파가 그러하듯 스승의 초상을 제작하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윤증 본인이 징사徵士를 자처하며 은거하는 삶을 추구했기 때문에 이를 거부할까 두려워 화원을 선비 복장으로 위장시켜 3개월에 걸쳐 몰래 그림을 그리게 했다고 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윤증의 제자들이 그의 초상화를 몰래 그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영당기적』에는 이에 관한 자세한 사정이 나와있습니다. 처음 윤동수는 윤증에게 여러차례 초상을 남기고 찬을 쓴 주희의 사례를 들며 초상화 제작의 의중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윤증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선생(윤증, 이후 괄호는 모두 역자주)이 답하길 중국 사람들은 화법畵法에 정통한 사람이 많아 비슷하게 할 수 있으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능히 그러지를 못한다라고 하였다. 또 (윤동수가) 묻기를 그러하다는 것은 혹시 이것(초상화 제작)을 하더라도 도리에 해가 되는 것은 아닌것입니까라고 물으니, 선생은 입을 다물고 침묵沉吟하여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영당기적(影堂紀蹟)』

 

추측컨대 윤동수는 스승의 침묵을 암묵적 동의로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이 대화 이후 윤동수는 명재 문하에 있던 이진성을 통해 변량이라는 화원화가를 데려와 초상화 작업에 착수합니다. 하지만 이를 본 윤증은 제자들의 예상과 전혀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제자들이 (초상화 제작을) 여쭈어 아뢰니 선생이 명령하길 돌아가신 선친도 초상화를 만들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끝내 그것을 엄히 금지했다. (제자들은) 이것을 감히 다시 청하지 않고 의논하여 바깥에서 외모를 본뜨고자 했다.

『영당기적(影堂紀蹟)』

 

이렇듯 제자들은 스승의 허락도 없이 초상화 제작에 착수해 그해 5월 스승이 술자리에 참석한 때를 노려 화원화가 변량을 유복으로 변장시킨 뒤 모습을 본뜨고 이후에도 몇 번이나 몰래 스승을 모사한 끝에 6월 정면상 한 점과 측면상 두 점의 초상화를 완성합니다. 하지만 스승이 초상화 제작을 엄격히 금지했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을 윤증에게 알릴 수는 없었고 결국 윤증은 죽을때까지 자신의 초상화가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모른채 세상을 떠나게됩니다. 초상화는 윤증의 3년상이 끝난 1716년 그가 거처하던 유봉정사에 봉안했습니다. 이후 시간이 흘러 초상화의 훼손이 심해지자 몇 대에 걸쳐 대대적인 이모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이렇게 그린 작품 중 일부는 현전해 개인소장자와 공립박물관의 컬렉션으로 남아있습니다.

 

윤증의 초상화 제작을 둘러싼 흥미로운 일화는 단순히 흥미로운 일화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지닙니다. 초상화 제작을 거부한 윤증. 그리고 이러한 스승의 반대에도 끝내 초상화 작업을 강행한 제자들의 모습은 조선 후기 초상화가 단순히 대상의 얼굴을 기록한다는 측면을 넘어 보다 복잡한 사회적 관습와 연관관계가 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학자들 또한 이러한 점에 주목해 조선시대 초상화를 둘러싼 문화적 양상들을 연구한 바 있으며 그 결과 작품이 단순히 감상의 대상을 넘어 사회, 정치적 연관관계 속에서 새롭게 읽힐 수 있다는 점을 밝혀낸 바 있습니다.

 

이러한 연구들에서 주목한 지점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윤증은 왜 초상화 제작을 반대했는가? 둘째, 스승의 명령을 어길 정도로 초상화 제작이라는 것이 당대에 중요한 행위였는가?

 

첫번째 지점과 관련하여 윤증이 초상화 제작을 반대한 논리는 이 일화를 관심있게 연구하던 사람들에게 꽤나 흥미로운 지점이었습니다. 윤증은 초상화 제작을 반대하며 크게 두 가지 논리를 들었는데 하나는 조선의 화법이 중국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아버지 윤선거(尹宣擧, 1610 ~ 1669)가 초상화를 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도 초상화를 제작할 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이중 두번째 주장은 당대의 윤리관과 가문의 역사를 생각해보았을 때 일견 납득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 윤선거는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가 함락되자 자결을 결심했으나 끝내 그러지 못했고 이로 인한 죄책감으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채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이러한 가문의 역사는 비단 윤선거 한 개인을 넘어 그의 집안 전체에 절의에 대한 멍에를 씌웠습니다. 추측컨대 윤증이 초상화 제작을 반대한 것은 자신의 이미지를 배향하고 유통시키는 것이 은거하며 세상에 나아가지 않는 가문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가문의 역사와 절의론의 연관관계 속에서 두번째 논리가 나름의 합리적인 추측이 가능한 반면 첫번째 논리는 그가 유학자라는 점을 생각했을 때 기묘한 논리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유학자라면 으레 초상화를 반대하는 논리로 화법의 정밀함이 아닌 일호불사론에 의거한 영정제의론을 먼저 언급하는 것이 당연해보이기 때문입니다.

 

조선 중기 이후 사림들은 초상을 그리는 전통을 불교적 폐습과 연결시킨 바 있습니다. 이때 유학자들은 송대의 유학자 정이가 제기하고 주희가 기록했던 주장을 활용했는데 제의 때 영정을 봉안하는 전통이 일호불사 편시타인(一毫不似 便時他人), 즉 터럭 한 올이라도 같지 않다면 그것을 진짜로 볼 수 없다는 정이의 주장과 배치되며 이로 인해 초상화에 배향하는 것이 조상을 모시는 것이 아닌 우상을 모시는 속례라고 비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유학, 그것도 주자의 학문에 정통했던 윤증은 초상화 제작의 반대 논리를 들며 이러한 점을 언급하지 않고 단지 기술적인 측면에서의 한계점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바로 반박이 가능할만큼 빈약한 논리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스승의 대답을 들은 윤동수가 "그렇다면 초상화 만드는거 자체는 도리에 어긋난 것은 아닌겁니까?"라고 묻자 윤증이 침묵했다는 대목은 윤동수 또한 이러한 논리적 약점을 알고 있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초상화 제작에 대한 강력하고 전통적인 반대논리인 일호불사론이 아닌 형식적 한계를 지적했던 것일까요? 이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이 가능하지만 조선 후기에 일호불사론이 초상화 반대 논리로 그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점을 우선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서 이야기 했듯 조선 후기는 초상화의 다양한 기능에 주목해 초상화 제작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시기입니다. 특히 이 시기 송시열을 비롯한 유학자들은 『근사록』, 『주자가례』에 기록된 신주론과 초상화를 직접 만들고 그것을 활용해 배향까지 했던 주희의 실제 삶 사이의 괴리를 깨달으며 초상화가 단순히 속례를 넘어 성리학적 논리 하에서도 긍정적인 기능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게됩니다. 이러한 점은 보다 경직된 방식으로 주자의 이론을 이해했던 이전 시기 유학자들과 달리 송시열을 비롯한 유학자들이 (비록 그 정도는 서로 달랐고 그로 인해 학문적, 정치적 논쟁이 벌어졌지만) 보다 유연한 관점에서 주자의 이론을 해석, 적용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정제의론의 변화는 18세기에 들어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들이 초상을 제작하고 이를 제사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변화로까지 이어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의 영향은 은거를 추구했던 윤증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비록 윤증 자신은 가문의 제약으로 인해 초상화 제작에는 반대했지만 당대 유학자들이 초상화 제작을 통해 제자들의 결속을 도모하고 나아가 자신들의 지향점을 내비치고자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는 윤증과 친밀히 교류했거나 안면이 있었던 박세당(朴世堂), 남구만(南九萬)과 같은 인물들 또한 유사한 목적으로 초상화를 제작했다는 사실을 통해 간접적으로 증명되는 사안입니다. 요컨대 이 시기에 들어서 일호불사론은 주희 이론에 대한 이해의 심화로 말미암아 더 이상 초상화를 반대하는 강력한 논리로 기능하고 있지 않았으며 그렇기에 윤증 자신은 이를 제외한 다른 논리를 들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한시각, <송시열 상>, 1683, 비단채색, 종가 소장

 

이렇듯 18세기 초상화의 유행은 왜 제자들이 스승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초상화 제작을 속개했는지에 대한 단서 또한 제공해줍니다. 윤증의 제자들이 초상화 제작을 결정한 18세기 초, 정치적으로 반대에 있었던 노론의 유학자들은 이미 송시열의 심의초상을 제작해 그것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희가 검은 띠를 두른 심의와 복건을 착용한 초상을 두 차례 제작했다는 점과 주자가례에서 심의가 유학자들의 전통적인 복장으로 언급된다는 점에서 착안해 송시열 또한 동일한 복장을 입은 모습으로 묘사하고자 했습니다. 그렇기에 송시열 생전에 그린 세 점의 초상화들에서 이러한 심의복건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자신의 기호를 넘어 그의 학맥이 주희의 사상과 세계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다는 학문적, 정치적 메세지를 전달하는 것에 가까웠습니다. 이와 관련해 최근의 연구에서는 송시열 초상이 비단 주희의 학문적 계승자를 자처한 정치적 메세지를 던지는 것뿐만 아니라 유학자로서 자신을 중앙정계에 진출한 관료가 아닌 재야에 존재하는 지식인이자 산당계열의 인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이미지였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송시열의 생전에 관복을 입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여러차례 피력했다고 전해집니다. 가령 아래와 같은 기록은 관복에 대한 송시열의 생각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선생은 뒤따라 장차 대궐에 가려 하시므로 시자(侍者)가 관대를 갖다 드릴 것을 청하자 선생은 물리치시면서 “대궐에 이르러 입은들 어찌 해롭겠는가”라고 하셨다. 이때 마침 내가 옆에 있자 선생은 희롱하시면서, “이런 관복 같지 않은 것을 입고 동보와 같은 고사(高士)를 보니 또한 부끄럽다”고 하셨다

『송자대전부록(宋子大全附錄)』

 

사후에 제작된 일련의 초상화에서 관복상이 아닌 심의복건초상으로 묘사된다는 점 이러한 송시열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합니다. 송시열은 생전에 여러번 관직을 받았고 또 중앙정계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에도 자신 스스로가 정체성을 관료가 아닌 재야의 지식인으로 설정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송시열이 어떠한 목적으로 초상화를 제작했건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스승의 초상화를 제작하는 것은 단순히 미적인 의미를 넘어 스승의 학문적 지향을 시각화하거나 동일한 정치적 성향을 가진 인물들끼리의 결속을 도모한다는 정치적인 의미 또한 내포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비록 『영당기적』에는 초상화 제작에 소수의 인물들만이 참여한 것으로 나와있지만 당대에 윤증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었던 몇몇 인물들이 후원이라는 방식으로 초상화 제작에 참여했을 것이며 따라서 <윤증 초상>은 소론의 정치적 입지를 시각화하는 대표적인 작품이었다고 추측하는 것은 이러한 시대적인 분위기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한 정치적인 함의에 더해 제자들이 다른 때도 아닌 1711년 윤증의 초상을 제작하려고 했다는 점 또한 여러가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1709년 숙종은 지나친 당쟁으로 인한 폐해를 지적하며 그간 정치적으로 탄압 받았던 인물들에 대한 복권을 단행합니다. 이 과정에서 윤증 또한 큰 수혜를 입게됩니다. 그 해 1월 숙종이 얼굴조차 모르는 윤증을 우의정에 제수한 것은 왕의 정치적 지향점이 어디로 향해있는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조치였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인 1711년 아버지인 윤선거가 영의정에 제수되고 시호까지 받은 일은 소론이 더 이상 정치적 탄압에서 벗어나 중앙정계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 신호로 해석되었습니다. 이러한 당대의 상황 속에서 초상화의 제작은 정치적 복권이 진행되던 윤증 가문의 상황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또 다시 송시열과 윤증의 초상은 뚜렷한 형식적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찍이 회니시비(懷尼是非)를 비롯한 여러 갈등 국면에서 다른 정치적 지향점을 추구했던 두 인물은 초상이라는 장르 상에서도 서로 다른 모습으로 재현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심의복건이라는 도상을 취하고 있는 송시열의 모습과 달리 윤증의 초상은 직령과 흑대를 착용하고 방건을 쓰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윤증이 당대에 일개 유학자가 아닌 한 당파의 영수였다는 점을 고려해 보았을 때 이러한 이미지는 어떠한 메세지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당대에 심의복건은 유학자들의 복장으로 널리 알려진 상태였기 때문에 그가 이러한 도상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묘사되었다는 것은 작품 속에서 복장과 관련된 또 다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도상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설이 없는 상황입니다. 가장 합리적인 해석은 직령방건의 도상이 산당으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했던 송시열의 심의복건상과 다른 징사의 이미지였으며 이를 통해 소론의 지향점이 노론과 달랐다는 점을 보여주는 시각적 결과물이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점은 보다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어보입니다. 직령방건의 도상은 당대에 윤증 이외에 다른 유학자들 또한 많이 착용했으며 이 때 직령과 방건은 소탈한 선비의 이미지를 드러내기 위한 대표적인 상징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재야에 머물렀던 윤증을 제자들이 그러한 모습으로 묘사한 것은 이러한 당대의 상징 체계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보다 타당해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의 갈래들보다 중요한 것은 초상화라는 것이 단순히 대상의 얼굴을 묘사한다는 기록의 측면을 너머 당대 사회와 보다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윤증 초상>을 둘러싼 에피소드와 이에 관한 해석들은 바로 이러한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011년 초상화의 비밀展에서 조선미는 조선시대 초상화를 요약하며 "실제 인물 이상의 회화적 효과도, 또한 특징의 강조를 통한 의도적 과장도 추구하지 않았다"라고 말하며 조선시대 초상화가 형식적인 일관성을 가진다는 점을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일관된 형식적 특징을 보인다는 것이 그것의 해석에 있어서 단편적 해석만 가능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윤증 초상>둘러싼 함의는 그러한 점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관객들에게 초상화는 심미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하나의 그림일지도 모르지만 그 안에는 당대의 사회, 정치, 문화적 함의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초상화는 당대의 시대적 맥락을 포착할 수 있는 더 없이 훌륭한 사료이자 시대의 증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문헌

 

강관식, 「명재(明齋) 윤증(尹拯) 초상의 제작 과정과 정치적 함의」, 미술사학보 34, 2010.

「우암 송시열의 화상 기문과 주자성리학적 영정 제의관」, 미술사학 33, 2017.

김기완, 「노론의 학통적 맥락에서 본 송시열 초상화찬」, 열상고전연구 35, 2012.

심경보, 「조선후기 노론계 深衣肖像의 형성과 계승」, 미술사학 38, 2019.

이성훈, 「송시열 초상화의 제작과 ‘대현(大賢)’의 이미지 구축」, 미술사와 시각문화 26, 2020.

국립중앙박물관 편, 『초상화의 비밀』, 국립중앙박물관,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