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동양 미술/한국 근대 미술

한국 근대 미술가 열전 (12) 김주경, 약동하는 생명의 화가

by 공식 2023. 8. 17.

<과물이 있는 정물>, 1927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풍경>, 1929
<가을의 자화상>, 1936
<오지호>, 1937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장, 1948

 

김주경은 1902년 충북 진천에서 빈농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학업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지역에 있는 학교에 다니던 중 1920년 영국 출신 성공회 신부 찰스 헌트의 도움을 받아 당대 최고의 학교였던 경성제일보통고등학교에 입학합니다. 김주경과 미술의 인연은 그가 서울에 상경한 이후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김주경은 최초의 프랑스 유학파인 이종우가 선생으로 있던 고려미술원에서 목탄 데생을 배웠으며 이곳에서 오지호, 김용준 등 식민지 조선에서 주요 작가, 평론가로 떠오르는 인물들과 교우관계를 맺습니다. 이후 1925년 경성고보를 졸업한 그 해 도일하여 도쿄미술학교 도화사범과에 입학합니다. 

 

그의 화가 커리어는 26살이던 1927년에 시작됩니다. 당시 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김주경은 식민지 조선에서 개최되고 있던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에 <과물이 있는 정물>을 출품해 특선을 수상합니다. 이후 내리 3년간 선전에서 특선을 차지하고 1930년에는 심사 없이 작품을 출품해 일약 조선 화단의 젊은 작가로 급부상합니다. 이 시기 김주경은 정물화, 풍경화, 인물화 등 다양한 장르를 선보이며 자신의 실력을 드러냈습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일본 아카데미 풍의 사실적 묘사가 두드러지는데 이러한 경향은 그가 참여한 녹향회 전시에까지 이어집니다. 녹향회는 선전, 협전에 반대해 자유로운 예술, 정치와 사회, 사상에 얽메이지 않는 미술을 표방한 젊은 작가들의 단체였습니다. 하지만 녹향회는 회원들 간의 의견 차이로 갈라지며 1931년 전시를 끝으로 더 이상의 활동을 하지 않습니다. 녹향회가 사실상 해체된 이후 김주경은 오지호와 함께 사생 여행을 떠나는데 이 시기 그의 화풍을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1930년대 중반 김주경은 고려미술원과 유학 시절 인연이 있던 오지호와 함께 한반도와 만주 지역을 사생하며 다수의 풍경화를 완성합니다. 이 때의 사생을 기반으로 완성된 일련의 작품들은 1938년 『오지호·김주경 2인화집』이란 이름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이 화집은 당대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데 한국 근대 미술사에서 최초의 원색화집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화집에서 김주경은 10점의 작품과 「미와 예술」이라는 제목의 비평문을 수록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2인 화집은 한반도와 만주 지역을 사생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풍경화, 그 중에서도 한반도의 산천을 배경으로 한 풍경화를 수록하고 있습니다. 화풍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아카데미의 어두운 색조가 아닌 원색과 보색대비가 강조된 밝은 색조가 두드러집니다. 이 때문에 김주경은 오지호와 함께 한국적 인상주의의 시조격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의 화풍이 한국적 인상주의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반론이 있었습니다. 한 가지 공통된 의견은 작품들의 면면을 보았을 때 그것이 프랑스 인상주의자들과 똑같은 작품이라 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많은 논자들이 두 인물의 화풍을 인상주의의 범주에서 파악하고 있지만 그것이 외국 화풍의 조선적 변형 혹은 무분별한 수용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는 입장입니다. 특히 2010년 이후의 연구 성과들은 그의 작품을 인상주의로 범주화 하는 것을 지양하고 보다 폭 넓은 예술 담론 속에서 위치시키려는 경향이 보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김주경이 한국 근대 미술사에 남긴 또 다른 족적인 미술 비평 활동에 대해 언급할 때 보다 자세히 다뤄보겠습니다. 

 

2인 화집의 센세이션 이후 해방 이전까지 그의 활동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추정컨대 일제의 탄압이 심해진 식민지 공간에서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없었고 그에 따라 다소 소극적인 활동을 했다는 추정만이 가능할 뿐입니다. 그의 족적이 뚜렷해 지는 것은 해방 이후부터 입니다. 이 시기 김주경은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서양화부 위원장, 조선미술가동맹의 집행위원장을 역임했으며 다수의 평론과 글을 발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다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의 교육문화대책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던 중 월북,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게 됩니다. 

 

김주경의 북한에서의 행적은 오랫동안 베일에 쌓여 있었습니다. 단편적인 정보를 통해 그가 1947년 평양미술전문대학의 초대학장으로 부임했으며 그곳에서 1957년까지 재직했고 북한의 국장을 디자인한 인물이라는 점이 알려졌을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남한에서 사실상 잊혀진 월북 작가는 1980년대 후반 이후 해금조치가 이뤄지며 다시금 조명되었습니다. 해금조치가 이뤄지기 전인 1987년 최열의 연구를 시작으로 1990년대와 2000년대 작가의 여러 면모가 재발굴되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1930년대 근대 미술사를 설명함에 있어 그의 존재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 화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김주경은 오랫동안 오지호와 함께 한국적 인상주의를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가 동시대 연구자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요컨대 최열은 김주경의 비평문을 근거로 그를 심미주의자로 명명했으며 김이순은 조선 향토색의 맥락에서 그가 자연주의에 가깝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애선은 김주경의 세잔 수용에 대해 살펴보며 그의 화풍이 인상주의보다는 후기인상주의에 가깝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논자마다 김주경의 화풍을 다르게 비정하는 것은 그가 작성한 예술 비평과 이론 때문이 아닐까합니다.

 

일찍이 김주경은 1927년 선전에서 이름을 알렸던 시기 현대평론 제9호에 첫번째 미술 비평문인 「평론의 평론」을 발표합니다. 이후 그는 작품 활동 몫지 않게 꾸준히 미술 비평을 기고하는 데 그것이 집약적으로 드러나는 글이 2인 화집에 실린 「미와 예술」입니다. 

 

이 글은 오늘날 연구자들이 김주경의 예술 세계를 분석할 때 반드시 활용하는 텍스트이자 1930년대를 전후로 한 추상과 전위 미술 유행에 대한 당대 지식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인 가치 또한 있는 글입니다. 이 글에서 김주경은 자신만의 미학론을 전개하며 미를 생명의 자연상, 다시 말해 생명을 가진 자연적인 어떤 형태로 정의합니다. 이렇듯 미에 대한 정의를 시도한 이후 생명을 자아 존재를 드러내냐 감추느냐에 따라 현현적 형태와 엄폐적 형턔로 분류해 전자의 것을 아름다움, 쾌와 연결시키고 후자는 추함, 불쾌, 우울과 관련된다고 주장합니다. 가령 꽃, 과일, 웃음, 노래, 춤 같은 것은 "자아의 미를 선전하는 자력본위의 적극적 수단을 취하는 것"이므로 현현적 형태이나 벼룩, 빈대, 회충 등 기생하는 특성을 가진 것이나 고목과 유사한 뱀, 흙에 유사한 지렁이 등 무생물화한 것은 자아를 부정하는 태도를 지녔기 때문에 엄폐적 형태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화가가 미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꽃, 과일, 웃음과 같은 소재만을 그려야 하는 것일까요? 김주경에 따르면 무생물도 생명의 성질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따르면 무생물 또한 "자력을 대신하는 타력을 빌리는"식으로 생명, 더 나아가서는 미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생명성적 가공"이라고 명명한 이 과정에서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것이 바로 광채입니다. 즉, 바위와 같은 무생물도 빛을 받아 "선율적 광채를 보일 수 있는 질과 형태"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김주경은 예술의 역할이 이 생명성적 가공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예술은 추를 미로 바꾸는 가공 과정이라는 것이죠. 

 

다소 복잡한 김주경의 글은 왜 그가 야외 사생을 통한 풍경화 제작에 몰두했는지 보여줍니다. 그에게 있어 미는 자연에 대한 탐구에서 비롯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자연을 그대로 모방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것은 무생물이나 기생충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추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예술가의 임무는 자연에 내재한 추의 요소를 미로 환원하여 화폭에 담는 것이며 그러한 환원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다름 아닌 빛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분명 빛의 기록(비록 객관적, 과학적 방식의 기록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에 천착했던 프랑스 인상주의와는 다른 태도입니다. 되려 김주경의 화풍은 자연이라는 재료에서 미를 창출하는 것에 가까운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를 단지 한국적 인상주의의 개척자라고 단언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 참고문헌 

金伊順, 한국 근대의 ‘자연주의적’ 풍경화에 나타난 이중성, 미술사연구, vol.27, 2013

신수경, 김주경의 해방 이전 민족미술론 연구.인물미술사학, vol.9, 2013

이애선, 1920~1930년대 한국의 후기인상주의 수용 양상 : 김주경의 폴 세잔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 미술사논단, vol.49, 2019
홍지석, 이상적 자연주의, 생성의 회화론.인물미술사학, vol.12, 2016
홍지석, 오지호와 김주경: 생명의 회화와 데포르메 - 『오지호 · 김주경 二人畵集』(1938)을 중심으로.인물미술사학, vol.14-15, 2019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