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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미술/한국 근대 미술

한국 근대 미술가 열전 (13) 오지호, 한국 인상주의의 대표주자

by 공식 2025. 4. 22.

<임금원>, 1937,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남향집>, 1939,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오지호(1905-1982)는 전남 화순 동복면에서 보성군수를 지냈던 아버지 오재영과 어머니 김의군 밑에서 여덟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고양이, 조랑말, 자화상을 그렸을 정도로 그림에 관심이 많았던 오지호는 16세이던 1920년 전주고보에 입학해 그곳에서 수채화를 익히고 이후 서울에 상경해 휘문고보 2학년으로 편입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최초의 양화가라 불리는 고희동에게 사사받으며 미술에 대한 관심을 이어갑니다. 그 무렵 그의 화가 인생에서 결정적인 사건 하나가 발생합니다. 그가 학생시절을 보낸 1920년대 경성은 막 해외에서 미술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화가들이 각자의 개인전, 단체전을 열며 서양의 새로운 화풍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오지호 또한 그러한 경성의 문화적 배경 하에서 우연히 나혜석의 유화 전람회를 관람했고 이를 계기로 서양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첫 유화 작품인 <사과>를 완성합니다.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서양화를 보다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동경미술학교에 서양화과에 입학(1926년), 후지시마 다케지의 교실에서 수업을 듣게 됩니다. 그는 이곳에서 후일 그의 미술을 규정하는 대표적 미술 사조인 인상주의를 접하게 됩니다. 그가 인상주의를 본격적으로 접한 것은 색채 연구 수업을 듣던 3학년 시절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1976년 『공간』에 게재된 작가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인상주의가 당시 기준으로 이미 지나간 양식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개인적 감각과 잘 맞았기 때문에 인상주의에 매료되었다고 회고한 바 있습니다. 같은 시기 그는 선전에 <창>을 출품해 입선하고 조선인 서양화가 단체인 녹향회를 조직하는 등 학교 바깥으로도 외연을 넓혀 활동을 시작합니다.

귀국 이후 송도에서 생활하게 된 오지호는 정신적 스트레스와 병으로 두문불출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1938년 커리어에 있어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는 『오지호, 김주경 2인화집』을 발표하게 됩니다. 이 화집에서 오지호는 1930년 이후 작업했던 인상주의풍 작품들을 선보일 뿐만 아니라 「순수회화론」이라는 자신의 미술론도 발표합니다. 이 글에서 오지호는 김주경과 마찬가지로 생명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며 생명 본성의 실현이 예술의 본질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는 "생명성적 가공"과 창조를 중요시 했던 김주경과 달리 생명이 자기 자신의 순수한 체험과 합일을 통해서 지각된다고 주장합니다. 가령 그는 바다를 바라볼 때 

우리의 마음은 바다와 한가지로 무한히 넓어짐을 느낀다. 그리고, 이때 우리의 마음은 양양한 광활(廣闊)이 있을 뿐이다. 이때 우리는 바다가 되어가지고 넓어지는 것이다. 이때 바다와 마음 사이에는 양자를 가로막는 아무것도 존재치 않는다. 바다의 일동일정(一動一靜)은 곧 마음의 일동일정이다. 이를 요언(要言)하면 이때 우리는 바다가 되어가지고 사는 것이다. 

오지호, 「순수회화론」, 『오지호·김주경 二人畵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8, 1쪽.

라고 말하며 자연대상과 일체화 된 상태를 가지는 것이 생명을 느끼고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홍지석은 자신의 논문에서 이런 차이가 2인 화집에 수록된 작품에서도 드러난다고 주장합니다. 일례로 그는 2인 화집의 마지막에 실린 김주경의 작품 <오지호>를 분석하며 자연 그 자체에 몰입한 오지호의 모습과 달리 김주경은 언제나 오지호의 뒤에서 그림을 그렸다는 점에 주목해 합일과 창조라는 두 화가의 예술관 차이가 작품 속에서도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작품 속에서 오지호는 자연 그 자체에 몰입한 듯 앞으로 나와 있지만 그보다 한 발 떨어진 김주경의 시선은 감각된 자연을 자신의 언어로 재창조하려는 예술적 목적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석은 당대에 2인 화집을 보았던 비평가들의 눈에도 포착되었습니다. 1938년 동아일보의 사설에서 유진오는 오지호의 작품이 “허심탄회하게 대상 속으로 자신을 몰입시켜 끈기있게 그 정체를 탐색하는데 있다”고 보고 김주경은  “그의 대상은 이데의 제조물이라 화면의 분방한 구성과 붓질이 따른다"고 보았는 데 이는 후대 학자들의 분석과도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오지호에게 있어 1930년대는 그를 둘러싼 평가들의 기반이 되는 대표 작품들이 탄생한 시기입니다. 앞서 언급한 2인 화집 속 인상주의풍 작품들 이외에도 1939년에는 오늘날까지도 그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남향집>(1939?)이 완성했는 데 이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한국적 인상주의의 대표작으로 평가받습니다. 해방 이후 이 작품을 미술사적 관점에서 처음 주목했던 김윤수는 "오지호가 개성에서 머물고 있을 무렵 살았던 초가집을 대상으로 〈남향집〉을 그렸다"고 언급하며 그의 작품이 전형적인 인상주의풍이면서도 민족의 정취와 풍경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그 독자성을 평가했습니다. 또한 이경성의 경우 혹평을 내렸던 초기의 입장과 다르게 7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철두철미 인상파의 흐름 속에서 인생을 지내온 사람"이라 언급하며 그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위상을 재확인해주었습니다. 이러한 평가는 90년대에도 유효해서 김영나의 경우 오지호가 "진정한 의미에서 인상주의적 풍경화를 실현시킨 유일한 화가"라 평가한 바 있습니다. 이렇듯 <남향집>은 비단 한 개인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한국의 서양 미술 수용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진 작품으로 여겨지며 2013년 등록 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남향집>은 이견의 여지 없이 오지호의 대표작이며 한국 인상주의 수용 역사를 언급할 때 중요한 기점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 제작 시기와 평가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먼저 <남향집>의 제작 시기는 여전히 논쟁의 영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미 과거의 여러 논문들이 밝힌 바 있듯이 남향집은 1930년대 오지호가 그렸던 다른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이질적인 형식적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동시기 그려진 또 다른 대표작 <임금원(사과밭)>과 비교하면 그 터치가 비교적 자유롭고 과감한 색면 표현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이는 작품이 1930년대에 그려진 것이 아닌 포비즘에 가까운 후기 작품군에 속하는 것이 아니냐는 논란을 낳았습니다. 또한 홍윤리는 자신의 논문에서 <남향집>을 동시기로 비정된 타 작품들과 비교하고 서명 시기, 재료, 작품 속 인물을 분석해 이 작품이 1960년대에 제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오지호의 작품이 민족주의적 분위기에 맞물려 재평가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실제 오지호는 1957년 정규가 『신태양』에 「한국 양화의 선구자들」이라는 글에서 그를 인상주의자로 소개한 이후 오랫동안 화단에서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 여러 비평가들이 그에 대한 비평을 시도하며 다시금 한국 화단에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이 시기 박정희 정권은 독재로 인한 정치적 불안을 잠재우는 수단으로 민족 의식을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당대의 미술 비평가들은 친일이나 월북 등 당대에 문제가 될 수 있는 여러 이력으로 쉬이 조명하기 어려운 많은 서양화가들 속에서 민족의 풍경을 묘사하며 민족 미술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옹호한 실천적 지식인이자 화가 오지호를 주목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적 맥락은 오지호 한 개인에 대한 평가를 넘어 한국 인상주의의 수용사에 있어서도 커다란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오지호는 너무나 당연하듯이 한국적 인상주의의 대표격으로 소환되었고 그것은 꽤 오랜 세월 동안 의심의 여지 없이 정론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하지만 최근 10년-20년의 연구에서 이러한 경향은 어느 정도 균열이 발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가령 2024년 전북도립미술관에서 열린 오지호 탄생 120주년 회고전에서는 주로 해방 이전 1930년대 작품으로 한정된 작가에 대한 관심을 해방 이후로까지 넓혀 그가 60-70년대에도 끊임없이 탐구하고 형식적 변화를 시도했던 화가라는 점을 주목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최근 발간된 오지호에 대한 논문들은 오지호를 단순히 한국적 인상주의로 단정하는 것이 아닌 그가 지닌 모더니스트적인 측면 혹은 후기 인상주의적 측면에 주목합니다. 또한 2인 화집과 해방 이후 다양한 곳에 기고했던 미술이론들, 개인 단독 저서들을 토대로 그의 예술론을 본격적으로 조명한 연구들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최근 오지호를 둘러싼 여러 논문들은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민족 미술, 인상주의에 가려졌던 그의 여러 모습들을 주목하는 것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실제 현존하는 작품들을 보았을 때 대표작이 모여있는 1930년대 작품들 보다 해방 이후 완성된 작품이 많다는 점에서 앞으로 많은 연구들이 등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해방 이후 활발한 미술 평론으로 많은 글을 쓴 작가이기도 했기 때문에 이쪽 방면으로도 더 많은 측면들이 조명받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최근 한국 근대미술은 기존의 분석틀에서 벗어나 다양한 방식으로 연구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그 시절의 복잡다단한 측면들이 역사적으로 규명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오지호의 작품 또한 그러한 지형도에 한 축을 차지하며 새로운 생명을 얻길 바래봅니다.   

 

 

※ 참고문헌

강혜승. (2016). 한국 인상주의 회화의 탈민족주의적 모더니티 : 1930년대 작품의 한국적 표상에 대한 다층적 논의 [석사학위논문, 홍익대학교]
김이순. (2025, 2). 《오지호와 인상주의 : 빛의 약동에서 색채로》. 월간미술, 481, 126-131.
김영나 『20세기의 한국 미술』, 예경, 1998.
김영나 외, 『한국 서양화단의 거목 '오지호의 삶과 화업'』, 광주문화재단, 2020.
노형석, 인상파 대가 오지호 명작 ‘사과밭’과 ‘남향집’의 엇갈린 뒤안길, 2025-02-04 13:25,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180658.html
홍윤리. (2014). 오지호의 <남향집> 연구. 한국근현대미술사학, 28, 317-345.
홍지석. (2019). 오지호와 김주경: 생명의 회화와 데포르메 - 『오지호 · 김주경 二人畵集』(1938)을 중심으로. 인물미술사학,(14·15), 93-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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