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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미술/조선시대 미술

진경산수화를 민족주의와 등치시키려는 오래된 망령에 관하여(1)

by 공식 2025. 10. 30.

얼마전 나는 유홍준 국립박물관장과 관련하여 그를 둘러싼 논란 중 하나인 『완당평전』에 대해 짧은 생각을 밝힌적이 있다. 

 

이 글에서 나는 유홍준의 저작이 문제가 많은 글이지만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 자체는 나름 생각거리를 던져준다는 논조의 글을 작성했다. 여기에서 이 주장에 대한 보론을 덧붙인다던가 추가적인 증거를 제시할 마음은 없다.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 글에 대한 여러 반응들 중 내가 흥미롭게 본 것은 소위 진경산수화에 대한 댓글들이었다. 내가 거칠게 이해한 바, 댓글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진경산수는 우리만의 고유한 화풍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향이다. 근데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교육 과정에서 그것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이뤄지고 있다. 심지어 이런 강조는 민족주의와 결합하여 미술사학계 뿐만 아니라 문화계나 문학사를 연구하는 분과학문들에 어떤 "관습"처럼 잔존하며 심지어 "신채호류의 배타적 민족주의"적 의식으로 남아있다. 

 

이러한 댓글 속 주장들이 문화사를 서술한 의무교육 교과서에 대한 주장과 분과학문 일반에 대한 주장을 구별없이 섞어놓고 있다는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민족주의적 경향을 설명하며 너무나도 당연하게 진경산수화를 예시로 든다는 점은 나에게 큰 흥미로 다가왔다. 왜냐하면 그러한 주장은 최소한 40-50년 전 정체성론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탄생했으며 당연하게도 오늘날의 연구 경향들은 그러한 점들을 계승, 비판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길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당장 홍선표나 한정희 같은 학자들이 진경시대론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을 통해 진경산수화와 민족주의의 관계성을 해체한 것이 90년대 중후반의 일이다. 더군다나 2006년에는 한국사상사학회에서 '진경문화 그 실상과 허상'이라는 대규모 심포지움을 열어 기존의 진경시대론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가 이뤄졌다. 근데 그러한 연구성과가 이 댓글들 속에서는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무엇처럼 취급된다. 때문에 나는 그 댓글을 보는 순간만큼은 오래된 망령들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누군가는 이 글이 그간의 진경산수를 둘러싼 오해를 깨부수는 야심찬 글이 될거라 생각하겠지만 그렇지는 않다.미안하게도 나에게는 그럴 능력도 끈기도 없다. 내가 앞으로 2-3편에 걸쳐 작성할 글은 오늘날까지도 몇몇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진경산수화에 대한 이모저모를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방법으로 풀어쓰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니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치졸한 변명 두 가지만 쓰고 넘어가겠다. 첫째, 나는 한국미술사 전공자가 아니다. 나의 전공과 논문은 모두 서양근대미술사, 컨템포러리 미술과 관련이 있으며 현재 하고 있는 일도 그쪽이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나는 한국미술사 쥐뿔도 모른다. 그러니 더 깊이 있는 지식을 원하면 직접 논문을 읽어보시라. 둘째, 내 지식이 이렇게 미천하기 때문에 전달하는 지식도 당연히 그 정도에 불과하다. 미술사학과 학생들은 금방 눈치채겠지만 내가 전달하는 지식의 수준은 기껏해야 학부 2,3학년 정도다. 더 솔직히 말하면 작성한 글에 대해서 추가적인 질문을 한들 나에게서 학부생 수준 이상의 좋은 답변을 기대할 수는 없을거란 말이다. 나는 그저 내가 참고한 논문과 이에 대한 단견을 전달할 수 있을 뿐이다.    

 

변명은 이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글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우선 이 글에서 나는 진경산수화에 대한 정의를 시도할 것이다. 진경산수화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은 논의가 있기에 여기에 모두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나는 학부 단계에서 이 개념을 설명할 때 자주 쓰는 방법인 용어 정리라는 방법을 동원하여 겉핥기 수준에서 진경산수화를 정의하고자 하며 특히 "진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하는 것으로 진경산수화를 접근하고자 한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다음 글에서는 진경산수화의 연구사를 간략히 정리할 것이다. 오늘날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진경산수화론은 최완수가 정립한 소위 "진경시대론"이다. 다음 글에서 자세하게 언급하겠지만 이 이론이 가져온 파급력은 엄청나서 (본인이 관심있는 분야의)최신 역사 지식이라면 전공자들 몫지 않게 알고 있는 2020년대의 역사 동호인들 조차 이 오래된 이론이 현재에도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결론만 성급하게 말하자면 진경시대론은 분명 한국 미술사 연구의 여러 이정표를 세웠으나 재검토가 필요한 이론이며 그러한 재검토 과정이 90년대와 00년대에 걸쳐서 많은 논문들을 통해서 일어났다. 그러니 사실 연구사를 쓰겠다고 밝힌 다음글은 엄밀히 말해 최완수의 진경산수론에 대한 선학들의 의견을 복붙하는 글에 가까울 것이다.

 

현재로서는 쓸 생각이 거의 없는 마지막 세번째 글에서는 첫번째 글에서 개진한 진경산수화의 정의와 두번째 글에서 개진한 연구사를 토대로 진경산수화의 개략적인 전개 과정을 쓸 것이다. 이것도 간략히 말하자면 진경산수화는 오늘날 적어도 두 단계 혹은 세 단계에 걸친 변화 양상이 있으며 각각의 양상을 천기론적 경향, 사의적 경향, 사실적 경향으로 분리해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에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진경산수 말고도 적어도 두 단계의 진경산수화가 존재하며 특히 진경산수의 사의적 경향 혹은 내가 반半사의적 경향이라 지칭하는 것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일전에 유홍준의 『완당평전』에 대한 글에서 나는 시각중심주의의 역사에서 근대 미술이 사실성을 획득해가는 과정으로 정의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근데 그 논리에 따르면 3단계의 전개 과정 속에서 지뢰처럼 튀어 나오는 사의적 경향들은 난데없는 뒷걸음질로 읽힐 수 있다. 결론만 빨리 말하면 이런 혼란은 진경산수를 남종화 혹은 중국 화풍과의 연관관계 속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그리고 동양 미술사의 맥락을 오늘날의 시각적 관습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오해다. 그리고 더 신랄하게 말하자면 진경산수화를 말하며 민족주의를 운운하는 사람들은 연구사를 말할 것이 아니라면 본인들이 비판하는 대상과 똑같은 관점으로 상대방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목표를 밝혔으니 본격적으로 첫번째, 진경산수화의 정의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언뜻 생각하기에 진경산수화는 사경산수화, 실경산수화처럼 대상을 보고 그린 산수화라는 간단한 정의만이 필요할 것 같아 보인다. 물론 그것이 굉장히 깔끔하고 진경산수화를 이해하는데 빠른 길 중 하나지만 20세기 후반의 연구 성과는 이 용어가 가진 변화 과정을 면밀하게 추적하며 이를 단순하게 일반화 할 수 없음을 밝혀냈다.

 

진경산수화의 정의에 대한 질문은 당연하게도 도대체 진경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질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진경산수화를 언급할 때 마치 동의어처럼 사용되는 용어가 있으니 바로 실경과 사경이다. 이 중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넓은 의미를 지닌 단어부터 알아보자. 우선 실경(實景). 사전에 이 용어를 검색하면 "실제의 경치나 광경"이라는 뜻이 나온다. 말 그대로 이 단어는 실제 존재하는 풍경을 지칭하는 가장 범용적이고 보편적인 용어다. 이 단어가 정확히 언제부터 한국어에 들어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미술사에서는 시대, 사조에 상관없이 실제 풍경을 보고 그린 모든 그림을 지칭하는 말로 이 단어를 사용한다. 때문에 우리가 실경산수화라는 용어를 접했을 때 그 안에는 대상에 대한 최소한의 판단만 들어간 중립적 포지션을 취하겠다는 함의를 담고 있다. 다음으로 사경(寫景)은 실경보다는 보다 좁은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다. 사경이란 말은 고려시대, 조선 초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이지만 사경산수화라는 용어 자체를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적 성향의 그림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한 것은 일제 강점기 때의 일이다. 사경은 그 의미를 따졌을 때 경치에 대한 글을 쓴다와 경치에 대한 그림을 그린다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용어로 지칭되는 예술품은 으레 핍진성을 동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베끼다, 본뜨다, 묘사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寫)라는 단어의 의미에 걸맞게 외양을 최대한 비슷하게 재현한 환영주의 성향의 예술작품을 지칭할 때 으레 사용하는 용어이며 그렇기 때문에 리얼리즘의 직접적인 번역어가 되기도 하였다.

 

서로 통용되기도 하는 실경, 사경 개념과 달리 진경은 그 용어 사용에 있어 조금은 주의를 요한다. 우선 먼저 이야기할 것은 진경이라는 단어가 당대에 서로 다른 두 가지 단어로 쓰였다는 점이다. 경치 경자를 사용하는 진경(眞景)과 경계 경자를 쓰는 진경(眞境)이 바로 그것인데 두 용어는 당대에도 서로 통용된 것으로 보이지만 시기에 따라 어떤 용어를 더 많이 사용했는지 차이를 보이며 바로 그 지점이 학자들이 주목한 지점이다. 이에 대해 말하기 전에 우선 진경이라는 용어의 기원부터 살펴보자. 진경이라는 용어는 17세기 문학이나 기록들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 때만 해도 아름다운 풍경이라는 뜻을 지닌 선경(仙境)과 통용되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18세기 초, 이 용어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인 인물 한 명이 등장한다. 바로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이다. 

 

18세기 초에 이르러 진경이라는 용어에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난다. 첫째, 몇몇 문헌에서 진경(眞景)이라는 단어 대신 경계 경자를 사용하는 진경(眞境) 사용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둘째, 이러한 용례 빈도의 변화에 발맞추어 진경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 자체도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 변화는 겸재 정선, 그리고 이들과 깊은 교유를 맺었던 소위 낙론계 인사들의 천기론과 관련이 있다. 이에 따르면 진경이라는 용어가 새롭게 정의된 것은 진경산수화를 정의함에 있어 결정적이다. 이 시기 진경은 사실적인 풍경이나 아름다운 풍경을 의미하기도 했지만 그러한 풍경을 본 나의 체험까지 포함하는 용어로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 그리고 이 때 진경의 대상이 되는 산수는 단순히 일상적인 풍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강렬한 체험, 동양적으로 말하면 이理를 깨달을 수 있는 체험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구체적으로 이 시기 정선과 직간접적으로 교류했던 김창협과 김창흡은 천기론이라는 독특한 사상적 지도를 그려나가면서 이를 문학 나아가서는 회화 분야를 비평할 때 적용했다. 때문에 우리는 이 시기 진경산수화를 단지 사실적 외양을 드러내는 작품을 지칭하는 용어로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사실적 외양과 그것에 대한 체험 양자를 모두 드러내는 작품을 지칭할 때 사용해야 했다.

 

그렇다면 진경이라는 용어 변화에 결정적 기여를 한 천기론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이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미리 고백하자면 이 글을 쓰는 나 또한 사상사 전공자는 아니기에 도대체 천기론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 요체를 명확히 밝힐 순 없다. 다만 내가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은 학부생들이 배우는 범위 내에서 그것도 회화 분야에서의 연관성 속에서만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초반 조선문단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문체가 있었으니 그것을 진한의고문풍이라고 부른다. 진한의고문풍은 명에서 이를 주창한 이른바 전후칠자의 영향하에서 탄생했는데 이들 전후칠자는 복고주의적 성향을 가진 문인들로 진,한 시대나 성당 시기의 문학을 그 전거로 삼았던 존재들이었다. 문제는 이들이 당 이후의 문학은 볼 가치도 없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하던 극단적 복고주의자들이었다는 점이다. 명과 조선의 문화 교류 과정에서 진한의고문풍은 조선 문단에 일정 부분 기여하며 그 다양성에 기여했으나 그 영향이 심화되어감에 따라 조선의 문인들 또한 자신의 글을 창조하는 것이 아닌 진한의고문풍을 그대로 모방해서 쓰는 풍조가 성행하기 시작했다. 이렇듯 복고적 경향으로 인한 폐단을 지적하고 자신만의 글과 생각을 그대로 전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물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천기론을 주장한 김창협, 김창흡 형제였다.

 

그들은 명대 당송고문파와 공안파의 영향 아래에서 기존의 폐단을 개혁할 수 있는 이론을 제시했는데 그것이 바로 천기론이었다. 천기론은 이理의 실재성과 보편성을 주장한 낙론과의 깊은 연관관계 속에서 탄생했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자연적으로 주어진 천리라는 것이 만물에 존재한다고 보며 이를 이해하기 위해 인위적인 것의 한계를 뛰어넘을 때 사물과 사람이 서로 유동하는 천기 또한 발현될 수 있다고 파악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성인과 범인, 사물과 인간 모두에게 공히 차별없이 하늘에서 부여한 자연적인 이理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이 자연스럽고 오묘하게 표출된 상태나 성질이 다름 아닌 천기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천기라는 것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첫째, 천기는 "자연스러움"과 "오묘함"이 표출된 것이다. 그런데 이 때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이의 보편성을 기반으로 천기론을 전개했을 때 그것이 지닌 자연스러움과 오묘함이 인간과 사물 간에 다르게 적용되는 것으로 보였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사물은 감각될 수 있는 것, 즉 아름다운 소리나 웅장한 외양 그것도 아니라면 그들의 습성을 통해서 그것의 자연스러움과 오묘함을 드러낼 수 있지만 인간은 그러한 감각적인 측면 외에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측면 바로 심성이라는 측면이 있기에 이것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했다. 이런 필요성에 따라 천기론은 심성에 있어 순수한 마음 상태가 오묘함과 자연스러움이라고 규정했다.

 

그런데 이렇게 정의한 심성은 그 자체로 기존의 성정론과 큰 차이를 갖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천기가 이理의 표출이라면 인간은 외부와의 관계 없이 단지 자신의 수양만으로 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논리에 따르면 애초에 사물과 인간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천기라는 개념을 따로 설정할 이유조차 없어진다. 천기론에서 사물과 사람이 서로 유동하는 것을 천기라고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 천기는 만물에 있는 이의 구현이기에 두 가지 속성을 동시에 지닌다. 이에 따르면 우선 천기는 천리가 자연스럽고 오묘하게 구현된 것이다. 그러나 단지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천기는 사물과 인간 간의 "흐름" 속에서 탄생하는 무엇으로도 이해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천기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단지 개인의 수양만으로는 부족했다. 사람은 외부에 있는 대상들과 교유하고 그들과 함께 "흘러야" 천기를 구현할 수 있었다. 따라서 천기는 천리의 구현일뿐만 아니라 흐름 즉 사물과 인간의 관계성의 구현이기도 했다. 

 

천기론은 예술의 영역에서 두 가지 목표를 제공해주었다. 첫째, 만약 예술가가 천기를 찾고자 한다면 천기의 성질인 자연스러움과 오묘함을 구현하기 위해 그에 걸맞은 대상을 찾아야 한다. 주의할 것은 이때 일상적인 풍경이나 사소한 대상을 묘사하는 것은 천기와 관련이 없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김창협은 『농암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조물주에게는 완전한 공력이 없고 사람의 재주 역시 치우침이 있기 때문에 우주의 산수가 모두 빼어날 수 없고 사람의 시가(詩歌) 또한 오묘한 것이 드물다. 이 때문에 평범한 경치에서 기발한 말을 구한다면 도움을 받을 수 없고, 조잘대는 소리를 가지고서 아름다운 경관을 묘사하려 들면 조금도 닮지 못할 것이다.
김창협(金昌協), 『농암집農巖集』 권21, 「兪命岳李夢相二生東游詩序」

하지만 천기를 구현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대상을 찾았다고 해서 작품에 온전히 그것을 구현할 수는 없었다. 천기는 사물과 인간의 흐름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 자신도 스스로 그러한 천기가 갖추어져 있어야 했다. 김창협은 자신의 시론을 통해서 이러한 점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생각에 시란 성정(性情)의 산물이다. 따라서 오직 천기(天機)를 깊이 체득한 사람만이 잘할 수 있다. 만약 악착같고 사리에 어두운 사람이 한갓 성병(聲病)과 율격(格律)에 얽매인 채 억지로 생각을 짜내고 수사를 가하여 솜씨를 내보이면서 스스로 시인입네 한다면 그 어찌 다시 진시(眞詩)가 있겠는가?
김창협(金昌協), 『농암집農巖集』 권25, 「松潭集跋」

이에 따르면 천기는 스스로 굴러들어오는 무엇이 아니다. 천기는 흐름이기에 자신 또한 천기가 되어야 하며 그러한 천기가 되기 위해서는 심성을 수련해야한다. 그리고 이런 수련은 단지 옛 문구에만 매달리고 남의 것을 베껴 쓰는 것에 몰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빼어난 산수를 직접 답사해 그것을 체험함으로써 그 천기의 편린을 깨달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한다.     

천기론에 따르면 진경이라는 것은 단지 대상을 똑같이 그리는 것이 아니다. 진경은 천기를 표현하는 것이며 이 때 천기라는 것은 자연스럽고 오묘한 대상을 천기를 체득한 자가 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예술에 있어서 대상에 대한 체험과 그것에 대한 표현으로 풀이되었다. 즉, 우리는 어떤 대상을 똑같이 그렸다고 해서 그것을 진경이라 표현해서는 안된다. 대상을 보고 그것에 대한 나의 흥취와 감상을 표현하는 것이 진경이다. 중요한 것은 과거 사의화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실재하지 않는 무엇을 표현한 작품을 진경으로 부를 수는 없다는 것이다. 흥취와 감흥은 반드시 실제 대상과의 접촉 과정 속에서 탄생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좀 더 철학적으로 요약하자면 진경은 주체와 대상의 상호작용 속에서 탄생한 대상에 대한 주관적 표현 방식이라고 요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선, <박연폭도>

 

겸재 정선의 그림이 진경산수의 대표적 사례로 지목되며 그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진경 산수 연구가 발전해 나간 것이 바로 이러한 학문적 맥락과 관련이 있다. 당대인들의 글에서 겸재의 그림은 천기, 진경을 표현한 그림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그러한 점은 그가 기행을 통해 실제 대상 앞에서 사생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을 단지 똑같이 그리는 것이 아닌 느낌을 함께 표현하려 했다는 점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이와 관련해 동시대인들과 후대의 학자들이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괴체감(塊體感)이나 과장된 표현을 지적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겸재 정선의 작품 〈박연폭도〉을 보면서 동시대인들이 감탄을 금치 못했던 것은 그것이 핍진하게 묘사되었다는 점이 아니라 조금은 왜곡되어 보이더라도 마치 눈 앞에 있는 듯한 현장감과 느낌을 화폭에서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직으로 뻗어있는 과장된 동세와 강렬한 농담 대비, 거대하게 조성된 바위의 표현, 주변 경관을 생략한 채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것에만 집중한 선택과 집중의 전략은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괴체감과 과장성의 핵심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일 것이다.   

이렇듯 경계 경자를 사용하는 진경이라는 단어는 정선의 등장 이후 오랫동안 조선 문화계에서 진경산수화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으며 자연스럽게도 진경산수화를 정의하는 용어를 규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진경이라는 단어의 복잡성은 그것이 시간을 지나며 변화했다는 점에 있다. 18세기 중후반, 진경이라는 단어는 다시 한번 변화한다. 천기론적 관점이 반영된 진경(眞境)이 아닌 진경(眞景)이라는 용어가 재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기 등장한 진경(眞景)이라는 용어는 진경(眞境)과 달리 대상에 대한 사실성을 강조하며 사물을 인간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닌 사물 그 자체로 바라보는 관점을 반영한다. 주로 근기남인들 사이에서 통용되었던 진경(眞景)은 추상적인 이理 대한 탐구보다는 사물 그 자체에 고유한 가치를 부여고자 했던 사물관과 연결된다. 그들은 예술에 있어서도 사물을 바라본 인간의 감정보다 사물의 외양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에 관심을 두었다. 이에 따르면 천기론적인 진경론은 단지 사물을 수단으로 기쁨만을 쫓는 방법에 불과했다.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을 온전하게 그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런 생각의 연장선으로 18세기 중반 근기남인들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화가들은 상경, 즉 일상적인 풍경을 그리는 것을 중요시 여겼다. 화가들은 더 이상 명승지, 명산을 유람하는 것을 좋은 그림을 그리는 선결조건으로 파악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그리느냐가 아니고 그것을 어떻게 그리느냐에 있었다. 당시의 진경론을 대변하는 대표적 인물인 강세황의 글이 이런 생각을 반영한다.   

엉성한 울타리와 조그만 집들이 이웃하여 있고 채소밭과 과수원이 거닐기에 충분하다면, 그것이 천만 개 배곡이 바다 위에 꽂혀 있는 것(금강산)보다도 나을 수가 있을 것이다. 
강세황, 김종진 역, 『표암유고』, p.343. 

 

김홍도, <구룡폭도>

 

 

강세황의 생각은 그의 제자였던 김홍도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가 그린 〈구룡폭도〉에서 과거 겸재의 그림에서 보이는 과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상에 대한 사실적 묘사에 주력한 김홍도의 회화는 겸재 작품에서 생략되었던 주변 풍경이 화폭 안에 들어오고 있다. 이러한 사실성의 강조는 김홍도가 왜 풍속화를 그리게 되었는지에 대한 한 가지 단서를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익의 학문적 계보를 이은 남인들은 사물에 대한 탐구가 현실 개혁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개인의 감정이나 관념적 논쟁은 주변의 풍경을 포착하고 그것을 통해서 정치,사회,경제적 변화의 가능성을 모색한다는 목적과 비교할 때 부차적으로 보였다. 철저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한 그들의 사상은 교조화된 성리학에 대한 반발과 함께 변화하는 국제적 관계, 신분 변동, 화폐 경제의 성장 등과 공명하면서 회화 분야에 새로운 길을 닦았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러한 경향들 속에서 서양화풍의 도입과 서화고동 취미의 성행을 동일한 관점에서 파악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근기남인들의 예술론과 그들이 진경산수에 기여한 바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 조선 문단을 주도하던 두 그룹 중 낙론계와 다르게 근기남인들은 21세기에 들어와서야 그 중요성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기존의 논의에서 그들은 풍속화, 서양화, 남종문인화의 싹을 틔운 그룹으로 인정받았지만 이것들이 본격적으로 유행하는 것이 18세기 중반 이후의 일인 바 진경산수의 탄생과 그것의 용어의 기원에 대한 논의는 겸재 정선과 낙론계 노론 인사, 더 최근에 와서는 소론계 일부 인사들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하지만 윤두서의 회화를 풍속화적 관점에서 재검토하는 논문이 등장하고 그들의 금강산 여행기가 대거 발굴, 번역되기 시작하면서 진경(眞景)이라는 단어의 연원을 정선이 활동하던 18세기 초까지 올려 잡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논의들이 시작되고 있다. 어찌되었든 진경산수화라는 장르는 최근 10-20년의 연구성과로 말미암아 큰 개념적 변화 함께 많은 연구 성과가 축적되었고 그러한 연구 성과는 90-00년대 대중들에게 널리 유통되던 진경산수화론과는 상당히 다른 맥락을 우리에게 제공해주고 있다.  

글을 마무리하기 전 그렇다면 대체 우리가 알고 있는 진경이라는 단어의 용례는 어디서 온 것일까 짧게 서술해볼까 한다. 18세기 중반 이후 변화된 진경(眞景) 개념은 오늘날 진경산수화를 정의함에 있어서도 큰 영향을 미쳤다. 진경은 20세기 초반 조선 후기 미술사를 정리하던 논자들에게 다시 소환되었는데 이때는 한국의 실경 산수 전통과 한국 미술의 독자성, 우수성을 설명하는 용어로 동원되었다. 그런데 이때 등장한 진경 개념은 엄밀한 개념정의가 시도되지 않은 채 조선 말기에 사용되던 용례를 무비판적으로 가져온 바, 후대 학자들이 이것을 이해함에 있어 큰 혼란을 초래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사변적이고 중국의 영향(낙론계 인사들이 사행 과정에서 양명학의 영향이 짙게 밴 당송고문파와 공안파의 영향을 받은 것은 꽤나 많은 논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지점이다)이 농후한 것으로 보이는 천기론적 진경산수화론이 사장되어 버리고 18세기 중반 이후의 용례를 그 이전 회화에까지 소급해서 적용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리고 해방 이후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익숙한 서사, 민족주의와 진경산수화의 연관관계라는 서사가 등장하는 것이다. 70-80년대 진경 산수화에 대한 연구 성과가 본격적으로 축적되던 시기 첨예한 논쟁 지점은 그 제작 배경에 있었다. 당시 학자들은 크게 외재적 요인과 내재적 요인의 관점에서 진경산수화의 발생 배경을 추적했다. 여기서 어떠한 관점이 진경에 대한 대중적 오해를 더욱 촉발시켰는지 첨언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진경산수화의 정의는 내재적 요인을 강조하던 논자 특히 최완수의 진경산수론에서 도출된 것이 많으며(당신이 조선중화주의, 노론 등을 떠올렸다면 바로 그것이 최완수의 영향이다) 그렇다고 해서 외재적 요인을 거론하던 사람들(당신이 서양화풍의 습득과 같은 서사를 접했다면 바로 이것이 외재적 요인의 영향이다)도 이런 오해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점만을 짚고 넘어가겠다. 내재적 요인을 진경산수화의 탄생 배경으로 꼽은 논자들은 우리 고유의 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조선 후기의 미술을 진경산수화의 발달과 연결시켰다. 그들에게 있어 진경산수화는 조선 문화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한 사례였는데 이때 진경이란 용어는 근대기에 사용되었던 용례 그대로 사용되어 단지 사실적인 회화를 지칭하는 용어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비록 80년대에 이르러 각각의 화가, 작품들에 대한 연구 성과와 함께 그러한 신화가 산산히 조각났지만 "서양과 유사한 사실적인 회화가 한국에도 진작에 있었다!"라는 식의 서사는 유령처럼 떠돌아 다니며 한국미술사와 이를 받아들이는 대중들의 관점을 사로잡았으며 그 과정에서 진경산수는 그것의 역사적 실체가 명확히 밝혀지 않은채 단지 동원되었다. 진경산수화를 둘러싼 다양한 역사적 결은 그렇게 근대성을 선취했다는 미명 아래 희석되어 버렸다.

 

오늘날에 와서 진경은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을 지칭하는 말보다는 조선 후기의 산수화 경향을 아우르는 특정 경향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는 경향이 강하며 그것을 사용함에 있어서도 시기별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실제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18세기 이전에 등장한 사실적 화풍의 산수를 실경산수로 지칭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점을 볼 때 용어 정의에 있어 진경은 조선 후기의 실경 산수를 지칭하는 용어로 한정하는 것이 오늘날 학자들의 대체적 견해가 아닐까 한다. 

 

글을 요약해보자. 진경산수화를 언급함에 있어 진경의 개념은 그것의 역사젹 변천과정을 이해함에 있어서 중요하다. 진경은 18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그 의미가 변화하는데 본래는 천기론에 기반한 진경산수화론이 조선 화단에서 유행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18세기 중반 이후 대상에 대한 사실적인 외양을 획득하는 것에 관심이 집중되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진경산수화에 대한 인식이 탄생했다. 18세기 후반 이후 진경산수화는 그 이전에 사용되던 진경(眞境)이라는 의미보다는 진경(眞景)이라는 의미로 더 많이 쓰였으며 이것은 근대와 해방 이후를 거쳐 70-80년대 진경산수화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성과들이 축적되던 시기에까지 이어졌다. 

 

진경은 여러 연구자들이 밝히고 있듯이 복잡한 사상적 맥락을 가진 용어다. 또한 그것은 역사적 용어이기에 그 변화 과정 속에서 여러 의미를 획득한 다의적인 용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이것을 사용함에 있어 많은 사람들은 이것의 의미를 납작하게 만들어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본인들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든 용어 그 자체 뿐만 아니라 그것이 지칭하는 18세기 조선 시대 미술상에 대한 크나큰 오해를 초래했다. 이런 경향이 진경에 대한 연구 성과가 상당부분 축적된 오늘날에도 여전하다는 점에서 누군가는 연구 성과의 대중적 소개를 게을리한 미술사학계에 잘못을 돌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이 글이 목적하는 바가 아니다. 다만 나는 최대한 내가 이해한 것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소개하며 그 오해를 줄이고자 할 뿐이다. 다음 글은 기약이 없다. 왜 그러냐고 묻는다면 단지 귀찮기 때문이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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