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의 마지막에 한 남자가 앉아있다. 17세기를 살았던 이 남자는 시대의 격변을 온몸으로 겪으며 산 역사의 증인이었다. 세간에서 그를 부르는 이름은 다양하다. 많은 이들은 이 노인을 석도(石濤)라고 부른다. 그도 아니면 이 남자가 스스로를 지칭할 때 자주 쓴 할존자(瞎尊者), 즉 눈먼 나한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그는 평생을 선승의 모습으로 살아왔기에 처음 보는 사람들은 노인을 단지 나이든 노승내지 고행을 오래한 수도승쯤으로 여기곤 한다. 하지만 그를 무엇으로 부르던간에 한 가지 확실한 사실 하나는 그가 화가였다는 점이다. 걸인의 모습을 하며 전국을 유랑하며 붓과 종이만 있으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단순히 그림만 그린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독특한 화론을 전개해 후세의 화가들에게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학자들이 그를 수식할 때 으레 서화가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주로 양자강 유역의 강소성 일대에서 활약한 이 화가는 이제 초로의 모습을 하고 나무 속에 들어 앉았다. 지난 삶을 반추하며 자신이 둘러보았던 지역들을 회상하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단지 나무 속에 들어앉아 선승의 도(道)를 수련하고자 한 것일까? 석도 본인은 이 그림을 스스로 평하길 자신의 미래 모습을 담은 자화상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의 본질적인 의미는 석도 자신의 인생사와 관련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후일 석도 자신이 될 그림 속 주인공의 기억 속에는 16~17세기를 살았던 화가의 다사다난했던 생애가 펼쳐질 터였다. 그리고 그 생애 속에는 자신의 불운한 운명 그 자체이자 이제는 잊혀져 누구에게도 불리지 않는 이름 하나가 불쑥 튀어나올 것이다.
주약극. 그의 생애 초반은 사실 기억조차 나지 않겠지만 이 이름 하나만큼은 마음 속에 평생 따라다닌 굴레와도 같은 것이었다. 1644년 봄, 말조차 하지 못하던 3살배기 어린 시절에 그는 불타는 자금성을 빠져나왔다. 농민반란으로 세운 이 나라가 아이러니하게도 똑같은 농민반란으로 끝을 맞았다. 전복된 국가 속에서 기존의 황족들은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황제는 자금성 뒷편 경산에 목을 매달았고 자신의 친척들은 농민반란군의 칼끝에 처참하게 살해당하거나 정절을 지키기 위해 똑같이 목을 매달았다. 단지 주씨가문의 일원이라는 이유 하나가 큰 대역죄가 될수도 있는 시대였다. 그가 화가의 길로 나선것은 어찌보면 시대가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명나라가 더 오래 존속했다면 그는 단지 그림에 관심이 있는 수장가 내지 후원가 정도로 끝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17세기의 격동기는 이 남자의 인생 궤적을 황족에서 천민으로, 통치자에서 환쟁이로, 돈을 주는 사람에서 돈을 구걸하는 사람으로 변화시켰다. 그러나 미술사의 큰 흐름에서 한 개인의 불행은 시대의 축복이 될 수 있음을 주약극의 예가 잘 보여준다. 그가 그린 수 없이 많은 작품들은 현대 중국의 전통회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뿐만 아니라 이제 석도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그의 회화들은 중국을 넘어서 전세계 학자들이 주목하는 작품이 되었다. 특히 최근에 와서 명나라 황족 출신의 화가들에 대한 활발한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석도보다 더 비참한 삶을 살았던 팔대산인에 대한 연구가 바로 그것인데 이 화가는 덕분에 죽은 다음에야 생애와 화풍이 재조명되는 영광 아닌 영광을 누렸다.
석도 또한 이런 재조명 연구의 중심에 있는 사람 중 하나다. 하지만 이런 연구의 초점은 어디까지나 그의 화풍이나 화론에 집중되어 있던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뛰어난 이론가로 화론에 대한 저술을 하기도 했고 그것을 스스럼없이 다른 수장가, 감식가들에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석도가 미래의 자신을 그린 저 그림 속 노인처럼 과거를 회상해본다면 정작 떠오르는 것은 그의 유년기 시절 겪었던 고통일 것이다. 그리고 만약 여기에 석도의 기억 몇 가지를 좀 더 보탠다면 마지막 쯤에 학자들이 찾아 헤매는 의문의 그림 하나가 있을 수도 있다. 물론 석도의 기억 속에 이 그림은 매우 희미할 가능성이 높다. 수 없이 많은 굴곡을 겪어온 사람에게 서양화 하나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머리 속 기억이 사라져도 손은 그 강렬한 충격을 기억한다. 석도가 그린 미래의 자화상에도 그것이 여실히 드러난다. 노인의 얼굴에는 그가 서양의 명암법에 대해서 어느 정도 숙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 그는 빛이 들어오는 위치에 따라 명암이 미묘하게 변하는 것까지 표현하려 했고 심지어 베르메르처럼 눈두덩이와 광대 부분을 흰색으로 하이라이트 시켜 강조하는 기법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수법들은 서양화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을 제외하면 이전의 중국회화에서 보기드문 기법이었다.
물론 석도가 서양화의 영향을 받았는지 확실하게 말할수는 없다. 일단 본인의 저서에는 서양화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사항이 없다. 그가 주로 활동 했던 지역이 서양 문물이 들어왔던 강남 일대이기는 하나 특유의 방랑벽으로 인해 이 새로운 문물을 접하지 못했을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석도가 직간접적으로 서양 화법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주장한다. 특히 최근 몇 년간 일부 학자들은 서양화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 중 한 사람으로 석도를 거론하기도 한다. 그리고 필자가 보기에 이 의견은 꽤나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석도가 살았던 시대에 서양화를 알고 있었던 사람이 결코 적지 않았다. 왕조가 교체되기는 했지만 사람은 아직까지 그대로였다. 17세기 중국을 인종적으로 묘사하면 단지 한족이란 거대한 용광로에 만주족이 들어와 섞여져 있을 뿐이었다. 한족출신의 강남 독서인 계층들은 화북의 정치적 변화와 관계 없이 문화적인 부흥을 누렸다. 물론 이들은 후일 이 지역에 남명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시대의 변화를 뼈저리게 체험한다. 그러나 당장은 그러한 위협을 느끼지 못했다. 따라서 많은 강남의 상류층 인사들은 문화활동과 더불어 신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열성이 되어 있었다. 이 때 이들이 받아들인 신문물은 단순히 서양의 것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가깝게는 조선의 문화에서부터 멀게는 동남아 지역의 문화에 이르는 다양한 문물들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석도 본인이 당대 강남의 여러 문인들과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 또한 이러한 문화 교류에서 떨어져 있었을리가 없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빼놓고 생각하더라도 일단 석도의 그림 자체에 서양화의 영향이 남아있다. 얼굴 표현에 있어서 명암을 활용한 것이나 선원근법을 적용시켜보려고 실험한 흔적이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이처럼 피터 솅크 동판화의 여정을 추적하는 첫 시작을 석도로 잡은 것은 단순히 그의 굴곡진 삶에서 기인한 것은 아니다. 실상 그가 생애에 겪었던 역경 만큼이나 피터 솅크의 동판화 또한 조선으로 들어가는 데 많은 역경을 겪었다는 점 외에는 공통점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그는 국제문화교류사의 관점에서도 조명되어야 할 작가이고 앞으로 그것이 우리 세대 연구자들이 해야 할 몫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를 매개로 해 명청 시대의 서양화 수용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그 자체로도 의미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피터 솅크가 이 동판화를 상선에 태워보낸 것은 17세기 말이었다. 하지만 중국에 도착한 네덜란드의 동판화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려면 시간을 돌려 17세기 초반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중국의 서양화 수용의 시작은 이때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서양화라는 새로운 미술을 접한 중국 지식인들의 태도는 피터 셍크의 동판화가 어떠한 경로로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이들의 태도에 따라 조선에서 서양화를 접한 사대부들의 태도도 천차만별로 갈리기 때문이다. 당장 우리에게는 서양문물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던 소현세자의 사례와 그보다 더 후대의 인물들이며 서양 문물에 폐쇄적이었던 위정척사파 사대부들의 상반된 사례를 알고 있다. 이들의 입장은 사실 그들이 스스로 입장을 구축한 것도 있지만 청나라와 같은 주변국 영향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특히 명,청대의 지식인들이 보여주었던 서양 문물의 상반된 태도는 조선의 서양 문물 수용 태도와 견주어 비교해볼만한 사례로 꼽히고 있다. 따라서 중국의 서양화 수용의 발자취를 기원부터 추적하는 것은 피터 셍크의 동판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다.
무대의 시작은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마카오, 시기는 유난히도 습했던 1580년 어느 날이었다. 이탈리아 출신의 한 예수회 선교사가 상선을 타고 마카오로 들어왔다. 그는 입교할 때 부터 중국을 가톨릭의 나라로 개종시키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물론 그의 이러한 꿈은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가 남긴 족적은 중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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