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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미술/피터 셍크, 하멜 이후 100년만의 네덜란드 손님

피터 셍크, 하멜 이후 100년만의 네덜란드 손님 - 7

by 공식 2021. 12. 4.

유자의 옷을 입은 마태오 리치. 동양적인 복장과 하프시코드, 성화의 조합이 이질적인 느낌을 준다.

 

모든 예수회 수도사들은 유럽에서 강도 높은 교육을 받는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신학뿐만 아니라 고전문학, 수학, 자연과학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했고 전도 과정에서 이교도의 종교 지도자와 벌일 논쟁에 대비하기 위해 일종의 논쟁 기술까지 교과목으로 편성되어 있을 정도였다.  19살에 예수회에 입교한 마태오 리치 또한 이러한 훈련들을 모두 받은 당대의 엘리트였다. 그가 중국에 체류했을 당시 중국인들이 마태오 리치를 연금술사 내지 학자 정도로 생각했다는 것은 이 선교사가 얼마나 많은 지식을 축적하고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실제로 그는 중국에서 행했던 여러 자연과학적 창작물, 저작들로 오늘날까지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업적으로 가장 먼저 언급되는 <곤여만국전도>의 편찬이나 서양의 기하학을 소개한 <기하원본>와 같은 저서들 모두 리치의 자연과학 지식을 토대로 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에서 그가 어떠한 인물로 인식되었든 간에 본질적으로 마태오 리치는 선교사였다. 교황청의 관점에서 리치는 동아시아의 불모지에 하느님의 뜻을 설파하는 16세기판 12사도였다. 당시 교황청이 해외 선교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종교개혁이 유럽을 둘로 갈라 놓은 이후 연이어 등장한 개혁교황들은 가톨릭의 세력권을 넓히기 위해 해외 선교로 눈을 돌렸다.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를 필두로 성립된 예수회는 바로 이러한 선교 행위를 가장 충실히 이행했던 종파였다. 그들은 유럽인이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가톨릭을 전파했다. 유럽을 중심으로 볼 때 서쪽으로는 신대륙부터 동쪽으로는 황금의 나라로 알려졌던 일본까지 예수회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하지만 여러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포교 활동은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아시아에서의 포교 활동은 그 난이도만을 놓고 볼 때 여타 지역을 넘어서는 무엇이 있었다. 그것은 이 땅에 오래전부터 발달된 문명이 들어섰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유럽인들이 아시아인들에게 가지고 있었던 기본적인 불신도 한 몫 했다. 당시 교황청의 입장에서 아시아 지역의 중요한 포교 지역은 세 군데였다. 하나는 흰두교 군주들과 이슬람 술탄들이 있었던 인도로 일찍이 포르투갈을 비롯한 대서양 연안의 유럽 국가들이 기반을 구축해 놓은 곳이다. 다음으로는 일본이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다행스럽게도 16세기를 전후로 하는 전국시대가 포교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마지막으로 동아시아의 최대 강자이자 폐쇄적인 대외정책으로 악명 높았던 중국, 당시의 명나라가 있었다. 예수회가 본격적으로 선교를 시작하려 할 때 명나라는 여러가지 골치 아픈 문제들을 떠안고 있었다. 흔히 북로남왜라고 부르는 이민족들의 국경 침범이 그것이었는데 이 문제로 인해 명나라는 국가의 존폐가 위협받을 지경에 이른다. 당시 조정의 주요한 핵심 논제는 북로와 남왜 중 어느 세력이 더 위협적이냐는 것이었다. 대신들은 북로로 대표되는 오이라트와 만주 지역의 이민족들, 남왜로 대표되는 왜구 세력과 광동 지역에 들어오기 시작한 서양 세력들 중 국가의 안전을 해치는 쪽이 누구인가에 대해 연일 토론을 벌였다. 물론 이 토론이 별 의미 없는 성과로 끝났음은 역사가 알려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이러한 논쟁의 여파가 동아시아 국제 정세 변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마태오 리치가 마카오로 처음 들어온 때는 명나라가 이러한 이민족들의 위협을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였을 시기였다. 그가 처음 중국 땅에 발을 밟은 때가 1580년. 비록 남왜의 위협은 사그라들었지만 또 다른 위협이 남쪽에서 불어닥치는 시기였다.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의 긴 내전을 끝내고 정치적 통일을 이루어냈고 공공연히 명나라 정복을 위해 조선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요구했다. 조선이 당장은 이 요구를 터무니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거절했지만 몰려오는 먹구름을 피할수 없음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당시의 명나라는 이 먹구름을 피할 곳조차 없는 상태였다. 만력제 ~ 숭정제 연간에 일어난 끊임없는 자연재해는 농민들의 생활을 극도로 궁핍하게 만들었고 이에 따른 농민반란이 속출하고 있었다. 또한 명나라 정부는 만성적인 재정난에 시달려 이를 해결한 능력이 없었다.중앙 정치는 환관에 의해 곪아 썩어가고 있었고 지방 관료들의 부패는 극에 달했다. 당시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보았을 때 이 거대한 공룡은 자기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도 벅찼다. 때문에 일본의 이 같은 움직임은 명나라로서는 큰 악재였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인들이 일본 사람들을 극도로 경계한 것은 당연했다. "중국인과 일본인은 같은 물을 마실 수 없다"는 당대의 비문만 보아도 알수 있듯이 당시 명나라 사람들의 반일 감정은 상당했다. 마태오 리치 또한 이러한 상황을 동료 선교사들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는 여기서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중국인들이 서양인들을 대하는 태도와 일본인을 대하는 태도가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이것은 중국인들 입장에서는 어찌보면 당연했다. 서양인들은 일본인 선원들을 거리낌 없이 중국 항해에 포함시키곤 했으므로 그들이 일본인들에게 중요한 군사적 기밀을 넘긴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태오 리치가  중국에 도착하기 몇 해 전 조난 당한 일본인 선원들이 중국의 관리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었다. 조난 당한 배는 포르투갈의 상선이었고 그 안에는 무어인, 포르투갈인을 비롯한 다양한 인종들이 타고 있었다. 해안에 간신히 상륙한 선원들은 채 몸을 수습하기도 전에 중국 병사들의 과격한 대응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중국 관리들의 이런  태도는 민감하다 못해 과도할 정도였다. 이 사건을 보았을 때 사실상 서양은 왜(倭)라는 말로 두루뭉술하게 통칭되는 새로운 이민족이나 다름 없었다. 비록 외양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있지만 장사속을 밝히며 장기적으로 볼 때 명나라의 안보에 큰 위협을 끼치는 해양 세력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회의 동양에 대한 인식이 좋을 수가 없었다. 당시 동아시아의 포교 전반을 담당했던 알레산드로 발라리노는 인도를 "분별과 재능이 없고 명령하기 보다 봉사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고 평가했다. 일본에 대해서는 초기에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다가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자 일본인들을 "잔인하고 악행과 위선을 일삼는 사람들"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발라리노는 적어도 중국에서 포교의 희망을 보았던 것 같다. 인도와 일본에서의 실패에 낙담한 발라리노는 자연스럽게 중국으로 눈을 돌렸고 예수회의 신임 총장에게 중국의 포교 필요성을 역설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물론 이 편지는 중국에 대한 크나큰 오해와 환상으로 점철된 편지였기에 신임 총장은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 편지의 내용이 어찌되었든 리치는 중국에서의 포교 활동을 위해 마카오로 왔다.

 

마태오 리치의 중국 여행, 그는 마카오에서 시작 하여 난창, 남경을 거쳐 마침내 북경의 황제를 알현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마태오 리치는 구입한 집을 사기당하기도 하고 황제의 알현을 거절당하기도 하는 등 수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하지만 그는 성급하게 포교를 하려 하지 않았다. 차근차근 지식인들의 마음을 얻어가며 기회를 엿보던 마태오 리치는 중국 고관의 도움으로 베이징에서 황제를 알현하게 된다. 그는 지독히도 분석적인 성향으로 당시 명나라의 정치,사회적 상황을 냉철하게 바라보고 이를 이용했다. 한번은 운하를 빠르게 이용하기 위해 당시 실세였던 환관을 부추겨 고관 대작들이 이용하는 배를 탄 적도 있을 정도였다. 물론 이러한 그의 수완에는 한눈에 한자 500 글자를 외워버리는 비상한 머리와 훈련 과정에서 터득한 수사학이 한 몫을 했다. 이런 마태오 리치를 보고 중국의 지식인들이 자발적으로 여행 경비를 부담해 준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당시 리치에게 중국의 인상은 발라리노의 그것과 비슷했다. 하지만 곧 현실을 깨닫게되는데 군인들의 형편 없는 대비태세와 그의 관점에서 보기에 지나치게 여성스런 풍습(이런 감상은 마태오 리치가 태어나고 자랐던 이탈리아 지방의 정치적인 영향에 따른 것으로 추측된다.) 등이 이런 깨달음에 큰 일조를 했다. 그러나 선교사의 관점에서 리치는 어떻게 이질적인 문화에 침투해야할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그리스도교 포교를 위해 취한 전략은 크게 두 가지 였다. 우선 해당 문화의 관습을 존중할 것. 이를 위해 리치는 초기에는 승복을 입고 자연스럽게 중국인들 속으로 동화되려 했다. 하지만 곧 승려가 명나라 사회에서 그다지 높은 계급이 아님을 깨닫고 유학자의 모습으로 변모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볼 때 이 전략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명나라는 엄연히 과거로 입신양명 하는 것이 출세의 지름길이었기에 사서 삼경을 읽는 유학자의 모습은 상류층 사회의 표본이었다. 그의 주변에는 명나라의 지식인들이 모여들었고 이를 통해 꽤 많은 지식인들이 그리스도교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

 

두 번째 전략은 이미지와 관련된 것으로 성화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미지를 포교에 이용하는 수법은 비단 중국이 아니더라도 포교에 보편적으로 쓰이는 방법 중 하나였다. 심지어 유럽 내에서도 문맹률이 극히 높은 농민 계층을 포교할 때 이 방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마태오 리치는 성화를 통한 포교가 외국 문물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지식인 계층에게 먹힐수 있을거라 여겼다. 실제로 그림은 중국 지식인들의 서화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유럽인들의 관점에서 포교용 성화라는 것은 사실 조잡한 면이 있음에도 새로운 기법이 지식인들의 눈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마태오 리치가 남경과 북경에 체류하며 지식인들과 교류했던 1600년대에 들어서면 이미 지식인들 간에 "진짜 같은 그림"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호기심 많은 지식인들은 앞다투어 리치의 집에 몰려들었고 그때마다 리치는 그림의 의미와 함께 넌지시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설파하곤 했던 것이다.

 

포교 전략으로 보았을 때 리치의 방법은 아주 세련되었고 또 주변 문화와도 잘 동화되었다. 이것은 예수회가 아우구스투스회, 도미니크회,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과 달리 효과적으로 포교 활동을 할 수 있었던 이유기도 했다. 물론 결과적으로 중국은 리치의 희망처럼 그리스도교화 되지는 않았다. 사실 마태오 리치 본인도 결코 이러한 생각을 꿈꾸지는 않았을 것이다. 본인 스스로가 한 때 중국의 황제인 만력제를 개종시키겠다는 강한 열정에 불타올랐기도 했지만 황제가 자신이 가져온 물건을 단지 신기한 구경거리로만 여긴다는 것을 알고 이 뜻을 강력하게 내비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리치의 이미지를 통한 포교 전략은 문화적 측면에서 중국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서양화를 접한 중국 지식인들은 초기에는 이 그림을 경이의 눈으로 쳐다보았다. 후일 예부상서로 추존되며 <천주실의> 간행에도 참여하는 이지조, 내각대학사로 명나라 말기 외교 문제에 깊숙히 관여했던 서광계를 비롯해 후일 예수회로 입교하는 지식인들이 이 그림의 신비함에 단번에 매료되었다. 특히 서화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수장가들에게 이 그림은 잔잔한 연못에 떨어진 돌덩이와도 같았다. 이로 인해 명말 청초의 많은 화가들이 직간접적으로 서양화의 기법을 따라하고 심지어는 서양화의 모티프를 연구하기에 이른 것이다.

 

서광계(徐光啓, 1562 ~ 1633)

 

마태오 리치는 생애 말년에 베이징에서 황제를 알현한 후 선무문 안에 천주교당을 건설하는 것을 허가 받았다. 중국 도착 초기에 돈이 없어 가진 물건을 팔아 근근히 연명했던 때에 비하면 괄목할만한 성장이었다. 그가 세운 천주교당은 후일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에도 가톨릭 세력의 주요 거점이 되었다. 미리 한 발 앞서 이야기 하자면 서양의 물건을 들여온 소현세자 또한 북경에서 이 건물을 보았을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 이미 정두원이라는 사람이 명나라로 사절로 가며 이 건물과 서양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가기에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있다. 하나는 서양화가 실제로 중국 회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것, 그리고 중국, 정확히는 명나라, 청나라와 조선의 문화교류 양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