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곡 고희동(春谷 高羲東, 1886~1965)은 한국근대미술사에서 '최초'라는 타이틀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화가입니다. 최초의 서양화가, 최초의 예술원 원장, 최초의 국전 심사위원장, 최초의 화가 출신 정치인 등등. 그가 가지고 있는 최초라는 타이틀 자체가 한국근대미술의 역사라 할 정도로 한국 미술사에서 굵직한 대소사에 그의 이름이 첫 번째로 등장합니다. 그는 많은 작품 활동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근대 미술사의 첫 페이지에 그의 이름이 꾸준히 등장하는 것은 단지 최초의 타이틀뿐만 아니라 근대적 의미의 미술 개념이 뿌리 내리지 못했던 식민지 치하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그것을 정착시키려 했던 노력들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고희동은 역관 출신의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14세때 한성법어학교에 입학해 불어를 배운 후 1904년 궁내부 예식원의 관료로 일하게 됩니다. 하지만 대한제국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 속에서 그는 곧 진로를 변경해 화가로서의 생활을 시작합니다. 사실 그가 처음부터 서양화를 배운 것은 아닙니다. 화가 생활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이후 그가 처음으로 찾아간 것은 당대에 동양화의 대가였던 안중식과 조석진이었습니다. 여기서 중국 화보를 임모하는 도제식 수련을 거치게 되는데 오광수 선생님의 경우 그가 이 시기 배웠던 동양화의 도제 방식에 환멸을 느껴 서양화로 진로를 변경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후 커리어에서 지속적으로 동양화를 그렸다는 점은 이러한 주장이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최근의 연구에서 고희동이 서양화를 배우게 된 계기는 크게 두 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우선 한성법어학교 시절 그곳에 체류하던 프랑스인 레미옹(Lemion)이 그리던 서양화에 영향을 받았고, 더 결정적으로는 관료 시절 궁내부 직속상관이었던 코히마 미호마쓰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코히마 미호마쓰는 당시 궁내부 차관이자 이토 히로부미의 사위로 영친왕의 교육을 맡은 궁내부의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고희동은 이 인물을 통해서 '미술 연구를 위한 출장'의 목적으로 당대 일본 미술계 인사들과 접촉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서양화를 배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실제 이러한 주장은 당시 예식원의 업무 중 하나로 황실 예식에 사용되는 서양화를 관리 감독하는 업무가 있었다는 점을 통해 뒷받침됩니다. 또한 그가 일본 미술계에 아무런 연이 없음에도 당시 일본 서양화단의 중심인물이었던 구로다 세이키의 주선을 받아 동경미술학교에 가입할 수 있었던 이유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1909년 4월 11일 그는 위와 같은 경로를 통해 서양화과 선과에 입학하게 됩니다. 이것은 1908년 박진영(이 인물의 활동과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이 일본화과 선과에 입학한 이후 두 번째였습니다. 조선보다 앞서 서양화를 받아들였던 중국의 경우 1905년 황보주가 서양화과 선과에 입학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비교적 빠른 시기에 조선인 유학생이 탄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동경미술학교는 조선인 서양화가들의 주된 엘리트 코스 중 하나로 부각되며 유학 시절 서양화가들이 배웠던 교육 방식은 후일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교과과정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러한 과정에 대해서는 1910년대 동경유학파들에 대해 먼저 다루고 난 이후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1915년 고희동은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이후 식민지 조선으로 돌아옵니다. 이후 그는 활발한 활동을 보이는데 신문 삽화를 그리거나 어렸을적 동양화를 배웠던 인연으로 최초의 근대적 한국화 미술 단체인 서화협회의 창설에 관여하기도 합니다. 또한 1922년 조선총독부 주관의 관전인 <조선미술전람회>가 열린 이후에는 서양화부와 동양화부 양쪽에 작품을 출품하며 활발한 활동을 보입니다. 1910년부터 1920년대까지 고희동이 어떤 화풍으로 서양화를 그렸는지에 대해서는 현존하는 자화상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고희동의 대표작 중 하나인 <부채를 든 자화상>은 그의 화풍과 작가 의식 모두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입니다. 그림 속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왼쪽 위에 보이는 영어로 된 서명과 양장본의 책들입니다. 이것은 그가 뚜렷한 근대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로 언급되고는 합니다. 실제 그는 집안의 환경으로 인해 일찍이 서양의 문물에 익숙했으므로 이러한 물품들을 자신이 사는 공간에 배치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오른쪽 후경에 보이는 풍경화에서도 나타나는데 그것이 수묵화가 아니라는 점은 이 화가가 서양화에 친숙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구로다 세이키 등에 의해서 널리 전파된 소위 외광파 기법, 즉 외부의 빛을 이용해 공간의 명암을 표현하는 아카데미 기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것은 화원이 아닌 근대적 화가로써의 모습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보여집니다. 하지만 이러한 근대적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까지 '화가'라는 직업에 대한 뚜렷한 자의식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그림을 그리는 모습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서구 혹은 일본 서양화가들의 자화상과 다르게 자신을 마치 선비처럼 그려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또 다른 예로 <정자관을 쓴 자화상>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고희동의 동경미술학교 졸업 작품 중 하나인데 동시기 다른 서양화가들이 자신을 화가로 표현한 것과 달리 정자관을 쓴 모습으로 표현했다는 점은 이 화가의 지향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의 자화상들에서도 알 수 있듯 고희동에게는 강한 선비 의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때문에 그가 1920년대 이후 서양화에서 동양화로 전환했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또한 그가 1920년대 이후 남화풍의 사의화를 집중적으로 그리게 되면서 사실상 서양화에서 멀어진 것도 이러한 의식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외에도 여러 현실적인 이유 또한 작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언급할 기회가 생기면 언급하겠지만, 식민지 조선 하에서 서양화를 한다는 것은 큰 위험을 동반했습니다. 우선 서양화는 당대에 동양화에 비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기에 작품 판매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또 서양화를 그리는데 필요한 일련의 재료들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경제적 측면과 인식의 측면 모두에 있어 서양화가는 자신의 작업을 지속하기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1910년대 서양화를 배워온 최초의 서양화가들은 많은 경우 절필을 하거나 동양화로 종목을 바꾸어 화업을 지속합니다.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최초의 서양화 유학생이었던 고희동 또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는 다작을 한 작가는 아닙니다. 오늘날 현존하는 고희동의 서양화는 채 5점이 안되며 서양화, 동양화 전체를 합쳐도 채 50여점을 넘지 못합니다. 하지만 서양화에 대한 인식이 전무했을 시절 (비록 일본의 지원이 있었지만) 일본으로 유학을 가 서양화를 배워온 것은 한국근대미술의 시작에 있어 이정표가 될만한 사건이며 그렇기에 오늘날에도 기억될만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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