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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미술/한국 근대 미술

한국 근대 미술가 열전 (5) 나혜석, 여성과 미술 그리고 사회

by 공식 2023. 7. 25.

<천후궁>, 1926년
<스페인풍경>, 1928
<김우영 초상>, 1928
<자화상>, 1928

 

1910년대 최초의 양화가들을 장식하는 마지막 인물은 근대 미술사에서 첫 자리에 등장하는 여성 미술가 나혜석입니다. 최근에는 여러 언론 매체들을 통해서 그녀의 존재가 많이 알려졌고 학술적으로도 수 천 페이지에 달하는 개인 연구서가 있을 정도로 다양한 측면이 조명된 화가지만 정작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이 작가의 많은 부분은 베일에 싸여 있었습니다. 이것은 당대에도 마찬가지였는데 개인사에 있어 큰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이혼을 기점으로 사실상 문화계에서 잊혀졌고 그 결과 말년에는 궁핍한 생활을 면치 못했습니다.

나혜석은 1896년 지금의 수원에서 부유한 집안의 둘째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집안은 어렸을 때부터 신교육을 배웠는데 그 결과 일찍이 양화를 접할 기회가 있었고 이것은 1913년 동경여자예술학교 서양화부에 입학하는데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나혜석은 1919년 졸업 후 귀국하는데 이후 10년이 나혜석에게는 미술 커리어에서나 개인의 인생사에서나 최고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 그녀는 교토제국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던 김우영과 결혼하며 그를 따라 만주로 가기도 하고 세계 여행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예술적 커리어에 있어서도 1920년 내청각이라는 곳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가진 것을 시작으로 1921년부터 1926년까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과 특선을 반복하며 화가로서의 입지를 탄탄히 다집니다. 

 

그녀는 활동 초기 일본에서 배워온 것과 마찬가지로 외광파에 기반한 풍경화를 주로 선보입니다. 하지만 이후 화풍이 점차 바뀌게 되는데 1928년에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화상>과 남편을 그린 <김우영초상>은 이런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 예입니다. <자화상>은 앞서 보았던 고희동과 김관호와 비교할 때 확연히 다른 형식적 특징을 보여줍니다. 그림은 마치 돌로 깎아낸 듯 각진 인물을 보여주며 대상을 입체감 있게 재현했다기 보다는 평면적으로 그려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배경을 살펴보면 파랑, 빨강, 노랑의 세 가지 색이 두텁게 칠해진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20세기 초반 야수주의 화풍이 나혜석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게 합니다. 특히 배경을 하나의 색면으로 두텁게 처리하는 것은 동일 년도에 그린 김우영의 초상에도 나타나고 있어 이것이 우연이 아닌 의도적 표현 기법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붓질과 색채가 강조되는 야수주의 화풍은 1930년대 화풍에서도 확인되는 바, 1910년대 초기 양화가들처럼 외광파를 고수하지 않고 새로운 형식 언어를 찾아가려고 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유화 분야 이외에 이 시기 나혜석은 신문 삽화 등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피력해 문화계의 주목을 받기도 합니다. 오늘날 알려진 것처럼 그녀는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조선 여성들의 불합리한 가사 노동이나 차별 등을 비판하는 삽화를 개제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나혜석의 페미니스트 사상은 오랫동안 학술적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지점입니다. 왜냐하면 초기 연구에서 그녀는 페미니스트 사상이 아닌 유미주의자로 해석되며 여성 해방이 아닌 자유주의에 기반한 퇴폐적 에로티시즘의 관점을 가진 인물로 평가되기 때문입니다. 1999년 나왔던 김홍희의 연구는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글에서 김홍희는 나혜석이 페미니스트 사상가가 아닌 “민족주의와 자유주의가 결합된 계몽적 자유주의자”였다고 주장합니다. 실제 나혜석이 귀국 이후 주로 그렸던 작품이 인물화가 아닌 외광파에 기반한 풍경화라는 점, 보다 원숙해진 화풍을 보여주는 20년대 후반 30년대에도 페미니즘 미술이라 읽힐 수 있는 어떠한 형식적 근거도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 했습니다. 그러나 보다 최근의 연구에서 윤범모를 비롯한 몇몇 학자들은 나혜석의 <천후궁>, <정원>, <나부> 등의 작품에 주목해 페미니스트로서의 나혜석을 조명합니다. 가령 <나부>에서는 늘어난 유방을 모성성으로 해석해 남성에 의해 보여지는 여성성에 대한 반발로 읽고, <천후궁>과 <정원>에서는 정신분석학을 활용해 작품 내 시각적 장치들에서 페니스적 은유를 읽고 이것을 나혜석의 개인사와 당대의 정조 관념과 연결시키는 연구를 진행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나혜석과 관련해 언론에서 나오는 “최초의 페미니스트”이자 “여성 운동가”로의 모습은 00년대 이후 학계에서 페미니스트 미술가 나혜석의 면모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밝혀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20년대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나혜석에게 1928년 파리 체류 시기는 인생의 큰 변곡점이었습니다. 여기서 그녀는 김우영의 지인이자 중추원 참의인 최린과 만나며 그 결과 1931년 이혼을 당하고 맙니다. 이것은 단순히 가정사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1931년부터 1934년까지 나혜석, 김우영, 최린을 둘러싼 스캔들은 세간의 화제거리였고 이 과정에서 나혜석은 사실상 문화계 전반에서 퇴출, 그 이후 화단과 문필계 양쪽에서의 활동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릅니다. 이후 나혜석은 자신의 학교를 개설해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치고 조선미술전람회에도 출품하는 등 활동 의지를 불태우지만 사회적 냉대는 그녀가 더 이상 작품 활동을 할 수 없도록 했습니다. 1935년 10월 진고개 조선관에서 열린 마지막 개인전을 끝으로 그녀의 화가 생활은 종지부를 찍습니다. 1910년대 유화를 배워왔던 초기의 서양화가들과 비교할 때 그녀는 꽤 오랫동안 유화를 버리지 않고 작품 활동을 이어갔으며 그 성적 또한 준수했지만 가정 문제와 이에 대한 사회적 비난으로 인해 작품 활동을 하지 못한 독특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말년에 그녀는 사실상 잊혀진 상태였습니다. 문화계에서는 1938년을 끝으로 사실상 활동을 접으며 잊혀졌고 가정사에 있어서도 슬하에 자식들과 여러 이유로 연락이 끊겼으며 엎친데 덮친격으로 병을 얻어 죽기 직전까지 고생해야 했습니다. 1948년 그녀는 신경쇠약증세에 걸려 무연고자들을 수용하는 병원에 입원하며 그곳에서 최후를 맞습니다. 이후 1974년 이구열 선생님이 나혜석에 관련된 책을 출판하기 전까지 미술계에서는 나혜석이란 존재가 완전히 사라졌는데 책이 나오기 전에 그녀가 한국전쟁에서 행방불명되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은 이를 보여주는 예입니다.

 

 이 화가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 여러 관점에서 조명되고 있습니다. 1990년대 나혜석에 대한 조명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문학사 분야에서 주목 받았고 이후에는 미술가 나혜석에 대한 여러 방면의 연구가 진행되었습니다. 보다 최근에는 3.1운동을 비롯해 그녀가 참여했던 여러 독립운동들을 조명하는 연구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연구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장 50여점에 달하는 나혜석 작품들에 대한 진위논란이 2010년대부터 재점화되어 지금까지도 수 많은 전칭작들이 위작으로 판명되고 있습니다. 작가에 대한 조명과 별개로 연구 초기에 진행되었어야 할 작품 진위 연구가 현재까지도 진행 중이라는 것은 아직까지 나혜석에 대한 연구가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증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