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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미술/한국 근대 미술

한국 근대 미술가 열전 (7) 1920년, 새 시대의 문턱

by 공식 2023. 7. 27.

나혜석, <만주 봉천 풍경>, 1924
이종우, <응시>, 1926
김주경,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풍경>, 1929


미술에서 1920년대는 여러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이한 시기입니다. 제도적으로는 해방 이전까지 가장 권위 있는 공식 전람회인 선전이 개최되고 그에 발맞추어 여러 개인전들을 개최하는 경향 또한 늘어납니다. 특히 선전은 1932년 서양화가 야마구치 다케오가 회고했듯 “옆으로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미술의 인식과 저변 확대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교육의 측면에 있어서도 동양화 일변도의 한정적인 교육 범위를 넘어 지방에서 활약하는 지역 작가들을 중심으로 서양화 학교 개설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이런 경향이 특히 두드러지는 지역은 일찍이 서양화가 유입된 평양과 대구였습니다. 평양의 삭성회, 대구의 영과회와 향토회 등은 이 시기 대표적인 지역 작가 단체이자 교육 단체로 여기에 속한 화가들이 비단 지역 전시뿐만 아니라 선전 같은 전국구 단위의 전시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며 지역 기반 작가들이 주류 미술에 편입되는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한편 국내 교육뿐만 아니라 해외 유학생들의 수도 늘어나는 경향을 보입니다. 주목할 점은 1910년대 유학 경향이 일본, 그 중에서도 관립학교인 동경미술학교 유학생들로 한정되었던 반면 1920년을 전후로 하여 구미 유학생들과 일본 사립학교 유학생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교육 경로의 다변화는 1920년대 중반 이후 국내로 쏟아져 들어오는 다양한 출신 성분을 가진 화가들의 원류가 되었습니다.

끝으로 미술계 내부의 변화는 문화사 전반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미술 애호가 층이 일반인들에게까지 확장되고 화가들을 후원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는 경향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선전 출품작들의 판매 경로에 대한 최근의 연구들입니다. 연구에 따르면 1920년대 초반 선전 출품작들은 주로 이왕가, 조선총독부, 일본 궁내부, 식산은행, 조선은행 등 일부 기업에 판매되는 경향을 보이며 가격 또한 비쌌기에 일반인들의 접근이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925년 이후 조선 총독부가 입선자들의 스케치, 소품들을 싼 값에 팔 수 있도록 하는 즉매회라는 것을 열고 민간에서 열리는 전람회에서 작품 판매를 시작하자 일반인들의 미술품 구매량이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192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 미술의 주요 구매 계층이 소위 중간층이라 불리는 경성에 살고 있는 전문직 종사자, 소상인들에게 까지 확대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비단 구매뿐만 아니라 전시회 관람 문화도 확산되었는데 1922년 제 1회 선전에는 약 2만명 정도의 관람객이 다녀갔으며 이후 1939년을 제외하면 평균적으로 2~3만명 정도의 인원이 전람회를 관람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단시 경성의 인구를 생각했을 때 꽤 높은 비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람 계층의 경우에는 1920년대를 거치면서 다변화되는 양상을 보이기는 하지만 비싼 성인 입장료를 포함해 여러가지 제약 사항으로 인해 관람 계층은 대중화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의 다변화된 양상을 보여주는 못합니다. 그럼에도 학생(물론 여기에는 학무국의 입김이 작용했습니다), 미술 동호인들의 관람이 이전보다 확대되었고 무엇보다 미술 감상의 소외 계층이라 할 수 있는 여성 관람자가 늘어났다는 것은 변화하는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제경향이 1920년 이후 총독부가 문화통치로 통치 기조를 바꿨기 때문인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또한 이것이 경제사적 측면에서 1910-1929년 사이의 경제 성장의 반영인지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확실한 점 하나는 미술사의 영역에서 1920년이란 기점은 과거 이 시기 이후를 근대로 보는 소위 ‘1920년대 기점설’이 등장할 정도로 중요한 시기란 점입니다.

이렇듯 큰 변화를 맞이한 1920년대 미술계에서 첫 번째로 등장하는 작가들은 1920년대 구미 유학파로 통칭되는 작가들입니다. 이들은 1910년대 선배 혹은 동기 작가들이 일본에서 유학하는 것을 보고 새로운 배움의 길을 찾아 나선 사람들입니다. 거의 대부분이 지주, 기업가 등 부유한 집안 출신이며 국비 유학으로 일본에서 미술을 배우다 서구권으로 넘어가 학업을 지속한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서양화 유입 과정에 있어 구미 유학파들은 일본을 따라 배우는 아류에서 벗어나 양화의 본질을 직접 흡수하겠다는 의식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경제적으로 여건이 있었고 서양화에 대한 나름이 의식이 있다고 해도 구미 유학으로의 길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초기 구미유학파들은 자신들의 당초 예상보다 유럽에 오래 머물거나 학교에 들어가서도 정규 교과 과정을 초과하면서까지 졸업을 유예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언어, 문화 등 낯선 지역에서 서양화라는 낯선 과목을 배운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유학생들의 대부분이 어떤 개인 혹은 단체나 정부의 지원을 받은 뒤에야 유학을 떠났으며 혈혈단신 유럽으로 찾아가 아무런 지원 없이 공부를 마친 이가 매우 소수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고난의 시기를 마치고 조선으로 들어온 작가들은 화단의 중심에서 활약하게 됩니다. 또한 이들 중 일부는 해방 이후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교육 분야에서는 서울대학교, 홍익대학교라는, 해방 이후 주요 미술가들을 양성하는 대표적 학교 두 곳의 교수직을 차지하며 제도적 측면에서는 관전인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서 추천작가, 심사위원을 반복하며 그들의 입지를 공고히 합니다. 따라서 1920년대의 첫 시작으로 구미 유학파들을 다룬다는 것은 단순히 그들이 최초라는 타이틀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이후 미술계에서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소위 주류 화가들이라는 점 또한 크게 작용한 것이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