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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미술/한국 근대 미술

한국 근대 미술가 열전 (8) 이종우, 최초의 프랑스 유학파

by 공식 2023. 7. 31.

자화상, 1923
나체의 사나이, 1926

 

인형이 있는 정물, 1927
어느 부인상, 1927
해금강풍경, 1941

 

설초 이종우(1899-1979)는 1920년대 구미 유학파들을 언급할 때 제일 처음으로 언급되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그의 인생 궤적은 1920년대 구미 유학파들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줍니다. 황해도 봉산의 만석꾼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17세에 일본으로 미술 유학을 떠났고 이후 파리로 유학을 가 미술을 배워온 후 식민지 조선 화단의 중심에서 활약합니다. 해방 이후에도 한국 미술계의 주요 작가로 인정받으며 관 주도의 미술 단체의 회장과 홍대 교수, 학장직을 역임했고 사망할 때까지 한국 화단에서 원로로 대우 받으며 한국 현대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그가 처음 미술을 배우게 된 것은 평양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 일본인 교사의 권유에 의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집안의 반대 때문인지 미술가로의 길은 쉽지 않았고 그에 따라 집안에는 법학을 공부한다는 핑계를 대고 1917년 동경미술학교로의 유학길에 오릅니다. 이곳에서 그는 서양화과의 4번째(고희동, 김관호, 김찬영) 조선인 유학생으로 들어와 5년간의 과정을 거쳐 졸업하며 이후 1923년 귀국해 고희동이 교사로 재직한 바 있는 중앙학교의 도화 교사로 부임합니다. 이 시기 그는 선전에도 출품해 입상하는 등 준수한 성적을 보이며 미술계에 두각을 드러내지만 식민지 조선 내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도불을 결심, 1924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1924년 파리행은 미술가들 중에서는 나혜석 이후로 두 번째이며 구미유학이라는 기준으로만 보았을 때 미술가들 중에서 첫 번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종우의 프랑스 유학은 그 자체로 근현대미술사에서 상당히 의미 있는 사건입니다. 프랑스는 한국 화단에서 오랫동안 선진 미술을 배울 수 있는 지역으로 인식되었고 그것은 해방 이후 50년대까지 이어졌습니다.(2차 세계 대전 이후 미술 담론의 주도권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갔다는 사실은 적어도 한국의 미술계 내에서는 논쟁의 영역이었던듯 합니다.) 이렇듯 프랑스가 예술의 선진국으로 인식된 배경에는 이종우와 같은 도불 유학파들의 영향이 상당했을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동아시아 전체의 관점에서도 특이한 것이었는데 가령 중국의 경우 일부 양화가들이 독일에서 미술을 배웠으며 일본의 경우에도 프랑스 이외의 나라에서 미술을 배운 경우가 상당히 있습니다. 오늘날 학자들은 이러한 차이가 일본의 초기 양화가들이 프랑스에서 유학을 했고 이후 동경 유학파 학생들도 스승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 유학을 한 것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후일 다루게될 독일 유학파 출신의 배운성이 왜 프랑스 행을 택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단초를 제공해주기도 합니다.(이에 대해선 뒤에 다룰 예정입니다) 도불 이후 그는 게랭 미술연구소와 슈하이에프 미술연구소에서 수학하며 신고전주의에 입각한 데생 중심의 미술 교육을 받습니다. 다만 이들 미술연구소에 대한 자세한 정보와 특징은 국내 논문에서 매우 소략하게 나오는바, 앞으로의 연구에서 추가적으로 밝혀내야 할 부분인 듯합니다.

당대 유럽 미술 교육의 영향은 그가 파리 체류 시절 완성한 것으로 알려진 <어느 부인상>에 잘 나타납니다. <어느 부인상>은 파리 체류 3년째에 살롱 도톤느라 불리는 프랑스 내에서 열리는 미술 공모전에 출품하기 위해 그린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심하게 처리된 명암 효과와 양감이 뚜렷이 드러나는 신체 묘사는 그가 미술 연구소에서 배웠던 화풍이 1920년대 당시 파리의 아방가르드 화풍이 아닌 보다 보수적인 신고전주의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상에 대한 사실적 재현에 초점을 맞춘 이종우의 회화 경향은 귀국 이후 선전을 주름잡는 외광파 화풍과 결합해 구상적 재현에 몰두한 풍경, 인물화풍이 화단을 지배하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물론 그가 당대의 급진적인 회화 경향을 모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가 <인형이 있는 정물>입니다. 한국 근대 서양화단에서 정물화는 자신의 정체성(서양화가)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빈번히 그려졌으며 선전에서도 주요 출품 장르 중 하나였습니다. 대상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를 기반으로 하는 정물화는 사물에 대한 시각적 관찰을 화폭에 담아내는, 당시로서는 서양 회화의 특징이라고 알려졌던 형식적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장르였기에 서양화가들이 동양화가들과 다른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이 장르를 활용했다는 것이지요. 1927년 그려진 이 작품 또한 이러한 의식을 가지고 그려졌을 확률이 높습니다. 하지만 대상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을 넘어 이 작품에는 무언가 특별한 형식 실험의 흔적이 보입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후경에 존재하는 거울(혹은 액자?)입니다. 거울 속에는 분명 눈으로 보이는 신체의 일부가 그려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온전한 신체가 화폭 안에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체의 형상이라고 볼 수 없는 분절된 면들만이 화면에 나타났을 뿐입니다. 이것은 1920년대 당시 유럽 화단에 이미 널리 퍼져 있었던 입체주의가 이종우의 화풍에도 도입된 것이 아닌가 추측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마찬가지로 면으로 분할되어 표현되어 있는 갈색톤의 배경이 분석적 입체주의 시기 피카소와 브라크가 즐겨 사용했던 색조라는 점을 통해서도 뒷받침되는 사항입니다.

이처럼 이종우는 당대 유럽 화단의 급진적인 경향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적극적으로 화풍에 차용하는 모습은 이후의 작품들에서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1920년대 구미로 유학을 떠났던 화가들의 공통점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유학 과정에서 서구 아방가르드의 형식 실험들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일부 작품들에서 그것을 적용하려는 시도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오늘날 학자들의 견해는 그들이 당대의 급진적 화풍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렇기에 단지 외양적인 모방에 그쳤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예컨대 입체주의 화풍을 접했을 때 그들이 이해할 수 있었던 최선은 입체주의라는 것이 대상을 하나의 시점이 아닌 여러 시점을 통해서 바라본 것이며 이를 하나의 화폭에 모아서 표현했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입체주의의 이해에 있어 피카소와 브라크 등의 입체주의자들이 기호의 자의성(언어학자 소쉬르의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에 의문을 제기하고 시각 매체의 분야에서 형상과 배경의 임의성이라는 측면으로 번안해 풀어냈다는 것을 당대 화가들이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당시 구미유학파들의 미술 이해 수준이 부족하다거나 그러한 것을 이해할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지만 모더니즘의 형식적 실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던 전사(前史)와 당대 유럽의 사상적, 사회적 맥락 모두를 이해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막 19세기 후반의 외광파 화풍이 들어오기 시작한 식민지 조선의 서양화단에서 그러한 것을 이해하기에는 절대적인 시간 자체가 부족했습니다. 즉, 모더니즘 회화의 이해는 역량의 문제라기보다는 시기의 문제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식민지 조선에서 소위 모더니즘이라 불리는 화풍이 1930년대 중후반, 보다 부정적으로 보는 논자들의 경우 해방이후에 나타났다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이처럼 당대 유럽 미술과 비교했을 때 1920년대 구미유학파들이 배워온 화풍이라는 것이 아주 최신의 화풍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귀국 이후 화단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다는 것은 식민지 조선, 나아가서는 해방 이후 한국의 미술계에서 해외 유학 경험이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을 타이틀 하나만을 가지고 주도권을 행사해온 사람들로 폄하할 수는 없습니다. 이들이 후일 길러냈던 제자들이 후일 한국의 추상 미술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뿐 아니라 교육의 측면에 있어서도 이들이 세워놓은 체계라는 것이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이들이 해방이후 교편을 잡고 활동했던 서울대학교, 홍익대학교가 주요 미술 대학 중 하나로 명성을 떨치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사항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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