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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미술/피터 셍크, 하멜 이후 100년만의 네덜란드 손님

피터 셍크, 하멜 이후 100년만의 네덜란드 손님 - 2

by 공식 2021. 12. 4.
의문의 그림을 풀 첫 단추는 네덜란드에 있었다. 왜냐하면 동판화가 대량으로 생산된 대표적인 국가가 바로 네덜란드였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동판화가 대중적인 영역으로 자리 잡은 17세기는 이 나라의 최전성기에 해당했다. 한 때 스페인의 유럽 내 식민지에 불과했던 이 자그마한 연방 국가는 근대의 여명을 거치면서 어느덧 유럽을 호령하는 상업 강국으로 성장했다. 어느 역사학자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17세기의 경제사는 네덜란드에서 시작해서 네덜란드로 끝난다. 이 저지대 국가의 요한 도시였던 암스테르담은 모든 부의 집산지였고 상품이 모이고 흩어지는 길목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네덜란드는 부의 원천이었다. 민족국와 도시의 중간자적 형태를 취했던 이 국가는 영국과 프랑스라는 두 강호가 유럽을 넘어 전세계를 무대로 패권 경쟁을 벌이기 전까지 유럽의 경제를 좌지우지 하게 된다. 바로 이 시기. 네덜란드가 영토, 인구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유럽 세계에서 주역으로 활동했던 시기를 '황금시기'라고 표현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미술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상류층 후원자를 벗어나 시장이라는 영역으로 들어온 것도 바로 이즈음이었다. 미술은 15세기를 전후로 하여 단순히 주문을 통해서 작품을 생산하는 단계를 넘었다. 마치 상품을 생산하듯이 소비자의 수요를 미리 예측해서 대량 생산을 하는 체제로 돌아선 것이다. 그런 체제가 가능했던 것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당시의 표현 기술이 일반적인 예술 아카데미에서도 통용될 정도로 널리 보급되었다. 르네상스라는 것이 처음 꽃 피웠던 14~15세기만 하더라도 사실적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매우 고도의 테크닉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 발명된 대표적인 기술인 원근법만 하더라도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건축적, 수학적인 지식이 필요했다. 오늘날에 와서 원근법이라는 것이 매우 익숙한 시각 체계로 자리잡았지만 그것이 학습의 대상이었던 르네상스기의 화가들은 사실적 대상 구현 자체가 하나의 큰 난관이고 도전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원근법은 어느덧 익숙한 재현 체계로 자리잡았다. 비단 거장들뿐만이 아니라 동네에서 작은 소품을 만드는 거리의 화가들도 원근법 구현에 전혀 지장을 받지 않았다.
원근법의 예시. 원근법은 유럽 미술사에서 획기적인 전환을 마련한 발명이었다. 르네상스 이전 경험적으로나마 2차원의 공간에 3차원의 형상을 표현할줄 알았던 서구인들이 과학적인 방법을 매개로 하여 더 정교하고 합리적인 방법을 고안해 낸것이다.
 
심지어 이 시기에 들어서면 가장 정석적인 원근법인 선 원근법이 아니라 대기 원근법, 단축법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것이 화가의 당연한 자질로 여겨졌다. 17세기를 대표하는 바로크 시대의 미술이 르네상스보다 원근법이 철저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요컨대 그들은 원근법을 구현할줄 몰랐던 것이 아니라 굳이 그 기술을 쓰지 않아도 사물의 원근감을 표현할 수 있는 수준에 까지 올라선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형식상의 발전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널리 통용된다고 쉬이 생각할수는 없다. 으레 그렇듯이 기술은 축적만큼이나 보급이 중요하다. 그것이 기술의 수명을 좌우하며 때에 따라서는 보급이 기술의 가치를 판단하는 유무가 되기도 한다. 판화는 그런 점에서 서양 미술의 변혁에 날개를 달아준 매체였다. 이미 15세기부터 판화 기술은 인쇄술과 맞물려 급속히 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판화 기술이라는것은 많은 경우 인쇄술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하는 경우가 많았다. 구텐베르크가 활자인쇄를 발명한 때를 전후하여 미술 분야에 있어서도 판화를 이용한 화집의 광범위한 보급이 일어난 것이다.
15 ~16세기를 살았던 알브레히트 뒤러는 그러한 혜택을 톡톡히 본 화가 중 하나였다. 흔히들 북유럽의 다 빈치라 불리는 이 화가가 북독일의 변방에서도 세계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판화의 보급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미술이라는 것을 상업적인 행위로 끌어 올린 화가 중 선두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미술 작품 판매는 오늘날의 용어를 빌려쓰면 공격적인 마케팅과도 같았다. 그는 교회, 상인, 궁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작품을 화집에 찍어서 보냈다. 구매자들은 화집에서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선택하고 화가는 주문를 받자마자 작업을 착수한다. 주문을 받으면 사전에 음각해놓은 판화가 존재하기 때문에 따로 창작 작업을 할 필요는 없다. 그가 할일은 도제를 시켜서 "몇 번 판화를 종이에 찍게"라고 말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알베르티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고객층을 더 확보하기 위해 막 성장하고 있던 도시 상인들에게 접근했다. 그와 동시에 각 도시에 있었던 출판업자들과 협약하여 자신의 그림이 삽화로 실리도록 했다. 당시 출판업은 급속한 성장을 구가하고 있는 산업 중 하나였다. 20세기 경제사가들의 분석에 의하면 1480년경에 인쇄기를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도시는 110군데가 넘었고 1500년대에 들어서는 유럽의 236개 도시에 인쇄 작업장이 존재했다. 그리고 이런 성장세는 17세기까지 지속되는 인쇄업의 성장에 첫 발을 내딛은 것에 불과했다.
뒤러의 전방위적인 노력은 저 멀리 플랑드르의 항구 도시 안트워프에까지 미쳤다. 안트워프는 뒤러가 살았던 시기에 와서는 이전에 비해 쇠락해가고 있었지만 그것은 단지 역사가의 관점에서만 그렇다. 만약 도시의 성쇠를 그래프로 표현할 수 있다면 당대 안트워프의 상황은 극점을 치고 막 내려간 수준의 상황이었다. 16,17세기에 자본의 중심이 될 도시들은 아직 전성기를 구가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이 야심만만한 독일 화가에게 이만한 도시는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대목은 왜 독일의 전도유망한 화가가 북서부의 저지대에까지 가서 '장사'를 해야 했냐는 점이다.
그가 주로 활동했던 뉘른베르크는 여타 다른 서유럽 국가들의 도시들과 비교했을 때 전혀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다. 가까이는 베네치아와 인접하여 르네상스 문화를 그 누구보다 빨리 받아들일 수 있었고 북쪽으로는 한자동맹의 도시들과 교역이 가능한 곳이었다. 그 중간자적 위치에서 뉘른베르크는 나름의 문화 사조를 꽃피워 나갔다. 흔히 르네상스를 시기구분 할 때 이태리 르네상스와 북유럽 르네상스를 구분하는데 그 중 북유럽 르네상스의 한 축을 담당했던 것이 바로 뉘른베르크였다. 단지 문화적인 영역 이외에도 사회적으로도 뉘른베르크는 중요한 도시에 속했다. 16세기를 덮쳐오는 종교개혁의 영향이 이곳에까지 미쳤던 것이다. 구교와 신교의 갈등 속에서 기독교 인문주의자들과 교회의 개혁가들은 끊임없이 논쟁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쓰였던 것은 다름 아닌 인쇄업자의 손을 거친 팜플렛이었다. 뒤러 또한 이러한 개혁의 영향 아래서 자유롭지 않았다. 그는 당대의 유명한 종교개혁가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서신들을 분석해 보았을 때 그는 종교개혁이라는 혼란을 흥미로운 사회적 현상으로 보았던 듯 하다. 루터의 경우 주장에 찬성하지는 않았지만 의미있는 문제 제기라고 생각했고 피크하이머의 주장에는 동조했으며 츠빙글리에 대해서도 호의적인 편이었다. 그가 살았던 환경들을 생각해 보았을 때 이 화가가 북해와 맞닿은 저지대 지방으로 향한 것은 뉘른베르크가 가지지 못했던 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 1471 ~ 1528). 금세공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어렷을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뉘른베르크 시위원회에서 공식미술가가 된 이후 부와 명성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뒤러는 당대 그 어떤 이탈리아 사람들보다 더 르네상스적인 화풍을 구사했던 사람이었다. 
 
뒤러가 주목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단순하게 생각했을 때 그가 서유럽의 도시들에게까지 판매 범위를 확장한 것은 비효율적으로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비효율을 뛰어넘는 커다란 이점이 있다면 그런 단점은 상쇄되고도 남을 것이다. 서유럽, 특히 저지대라 불리는 네덜란드 인근의 도시들은 성장하고 있는 부르주아 계급을 상징하는 도시들이었다. 15~16세기를 풍족하게 했던 전체적인 경기 상승의 국면에서 작은 소도시들은 내외 무역을 통해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축적된 부는 다시 재생산에 투자되기도 했지만 문화 분야에 투자되는 경우도 많았다. 피렌체의 메디치가의 경우 그런 후원의 성과가 기적적인 결과로 나타난 경우였다. 하지만 이런 두드러진 성과 이외에도 많은 부르주아들이 크던 작던 문화 분야에 대한 후원을 멈추지 않았다. 그 방식은 소극적으로는 작품을 사는 행위에서부터 적극적으로는 자신의 집에 예술가를 불러와 작업을 하도록 하는 것까지 다양했다.
 
플랑드르 저지대 지방은 일찍부터 이러한 후원이 발달한 곳 중 하나였다. 북유럽 르네상스가 이 지역에서 처음으로 만개한 것도 이러한 후원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플랑드르는 일찍부터 고유의 미술 전통이 존재하던 곳이었다. 이 지역은 다빈치, 라파엘로 같은 이탈리아의 거장들이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얀 반 에이크, 로베르 캉팽같은 화가들이 극사실에 기반한 화풍을 구축한 곳이었고 이를 소비하는 나름의 연결망도 구축되어 있는 상태였다. 뒤러가 활동하는 시기가 되면 중산층에게 미술작품을 구매하는 것은 아주 일반적인 취미 활동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비록 미술품이 사치품으로 분류되기는 했지만 각 집에 미술품 하나가 걸려 있는 것은 그 집안의 교양과 부의 척도로 기능하게 된다. 이 경향이 17세기까지 이어지면 나중에는 가난한 농민이라도 조그마한 작품 한 점은 가지고 있을 정도의 대중화가 이루어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