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이 누구의 말마따나 고질의 역사서라는 것을 부정하고 싶은건 아니다. 실제 미술사 관련 저널에 실린 리뷰들만 봐도 책은 현대, 동시대 미술을 이해하기 위한 여러 유용한 관점들을 제공해주고 있다.
근데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져야 할 정도로 좋은 책인가라는 생각을 해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이 책을 추천하는 글, 댓글을 볼때마다 그 사람들이 이 책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이해하고 완독한적이 있는지 궁금해질 정도다.
왜냐하면 이 책은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기에는 지나치게 어려운 책이고 또 불친절한 책이기 때문이다.
어려우면 천천히 읽어나가면 될 것 아니냐?라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이 책은 그러한 수준을 한참을 뛰어넘었다고 생각한다.
보통 책이 어렵다고 했을 때 그 원인을 이론의 난이도, 원전의 난해한 문체, 번역 실패 등을 꼽을 수 있을텐데
이 책은 한 두개도 아니고 그 모든 문제를 동시에 갖고 있다는 점에서 만만치 않은 공력이 필요한 책이다.
이 책의 주요 저자들은 미술사에 후기구조주의, 비판이론, 정신분석학을 비롯한 다양한 이론들을 도입한 사람들로 소위 "1- 1.5세대 옥토버 저자"라 불리는 사람들이 주요 필진으로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다양한 저작들을 통해 20세기의 철학,이론들을 미술사 방법론에 편입시켰는데 1900년 이후의 미술사는 바로 그러한 저자들의 관점을 하나의 책으로 엮어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책이다. 문제는 본 책에서 이러한 이론을 지나치게 간략하게 설명한다는 점. 이들의 글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사실상 20세기 후반의 철학 경향과 이론이 어떤 방식으로 미술사에 전유되어 나타났는지 개괄적인 수준으로 알아야한다. 그런데 그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으니 당연히 독해하는데 있어서 난점이 발생하는 것.
이런 문제는 저자들 특유의 난해한 문체와 결합해 글을 고약한 무엇으로 만들어버렸다. 옥토버 저자들의 난해함은 이미 여러 글들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확장된 장에서의 조각, 할 포스터의 실재의 귀환 등등)에서부터 유명했으며 이는 그들의 학문적 배경이 전문적인 학술 저널에 기반에 있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잘 모르는 독자들은 시작부터 그들의 난해한 문체에 정신을 못차리고 길을 헤메게 된다는 것.
여기에 더해 이 책은 자체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독해에 어려움이 있다. 책은 1900년부터 현재까지를 연대별로 끊어 그 시기의 중요한 토픽들을 다루고 있다. 이렇게 보면 책 자체가 상당히 잘 짜여진 것 같지만 실제로 읽어보면 각 연도끼리 선형적으로 내용이 이어지지 않아 상당한 혼란을 초래하게된다. 예를 들어 만약 독자가 초현실주의에 대해서 관심이 생겨 이 책을 구매했다면 초현실주의에 대한 이해는 커녕 초현실주의에 대해 혼란만 가질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초현실주의는 책의 전반부에 걸쳐 이곳저곳 흩어져 있고 심지어는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챕터에도 초현실주의에 대한 중요논의가 들어간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를 감안하고 초현실주의 부분만 따로 떼서(다행히 이 책은 용어, 색인 정리가 꽤나 꼼꼼하고 각 사조별로 따로 글을 떼어볼 수 있도록 약호 정리도 잘 되어 있다) 발췌독을 하면 될 것이 아니냐?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할 경우 더더욱 독서에 지장이 생길 확률이 높다. 왜냐하면 이 책은 생각보다 개별 미술사조에 대해서 상세한 설명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은 단권화된 역사서를 지향하고 있지만 그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각 챕터 말미에 적혀 있는 더 읽을거리를 보고 와야 수월하게 이해되는 편이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답답함에 못이겨 더 읽을거리를 찾아 읽는 순간 이 책이 어떤 성격의 책인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게된다. 책에 나와있는 많은 논의들이 더 읽을거리에 나온 단행본, 논문들의 내용과 꽤나 유사하다는 점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즉, 이 책은 어찌보면 더 읽을거리에 나온 내용들을 한 권에 담아놓은 요약본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모든 개괄적인 역사책들이 기존의 연구를 요약, 정리 한 것 아니냐?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 책은 그 기존 연구를 요약, 정리하는 과정에서 독자가 당연히 알 것이라 생각하는 부분을 과감히 생략해버리는 바람에 비전공자 독자들이 접근하기 힘든 무엇이 되어버렸다. 더구나 더 읽을거리에 나온 대부분의 글들은 가벼운 단행본이 아닌 저널에 실린 글, 논문을 모아놓은 단행본이다. 이런 글들의 성격상 그것의 잠재 독자는 전문적 지식을 갖춘 전공자들을 대상으로 하는데 그런 글을 요약, 정리한다? 그 자체가 쉽지 않을뿐더러 그렇게 요약된 글이 지식이 없는 비전공자 독자들에게 얼마나 이해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실제 이런 문제는 글 자체의 난해함과 곁들여져 책의 난이도를 급상승시키고 있다.
이러한 난점들 때문에 이 책은 학부 과정에서는 쉬이 읽기 어려운 책이며 심지어 대학원 과정에서도 원전과 번역본 두 개를 깔아 놓고 스터디를 거친 뒤에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취미 독서를 하는 사람이 이 정도의 정성을 들여가며 책을 읽을 수는 없으니 사실상 두꺼운 벽돌 이상의 기능을 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 것.
요컨대 이 책은 현대미술을 이해하기 위해서 가지고 있어야할 책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을 무작정 집어들었다가는 주화입마에 빠질 가능성이 높은 책이다. 만약 독자가 배경 지식이 탄탄해 난해한 글을 읽는데 어려움이 없다면 이 단단한 벽돌을 깨부수고 현대미술의 드넓은 바다를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겠지만 기초체력조차 없는 사람에게 이 책은 아무리 두드러봐야 금조차도 가지 않는 강철과 같은 책이 될 가능성이 높다.
추천: 미술(이론) 전공자, 철학, 현대미술사에 대한 기초 지식이 있는 독자, 있어보이는 책장을 원하는 장서가, 어려운 책을 도전하고 싶은 사람, 스터디용 책을 찾는사람
비추천: 미술에 대한 개괄적 지식을 원하는 사람, 현대미술 입문서를 찾는 사람, 그림을 보기 위해 미술책을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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