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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기록

프리드리히 키틀러, <광학적 미디어>, 2011

by 공식 2021. 12. 4.

 

현재 인문학계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미디어고고학 얼개를 알 수 있는 책이자 영화, TV, 사진, 미술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게 해주는 책.

 

개인적으로 느꼈던 첫인상은 낯설다는 것.

 

저자인 프리드리히 키틀러가 훔볼트 대학에서 했던 학부 강연을 토대로 만들어진 책이지만 학부 강연 답지 않게 엄청나게 많은 배경 지식을 요구한다. 가령 책을 100퍼센트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셸 푸코의 담론 개념과 라캉의 실제계, 상상계 개념을 대충은 알고 있어야 하는데 본문에서는 이에 대한 이론적 설명의 거의 들어 있지 않아 선행 독서가 필요하다.

 

더구나 저자 본인이 미디어 이론가이기 이전에 독문학자였기 때문에 문학을 레퍼런스로 끌어오는 경우가 많다. 가령 토마스 핀천의 경우 거의 모든 장에서 등장할 정도로 자주 인용된다. 또한 2차세계대전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한 정보이론(가령 클로드 섀넌의 커뮤니케이션 이론)과 미디어 이론(가령 마샬 맥루한)을 알아야 하며 사진, TV, 영화에 대한 공학적 지식은 권장사항은 아니지만 알면 더욱 쉽게 읽을 수 있다. 위의 사항들을 무시할 경우 아래와 같은 문장을 접하면 숨이 턱 막힐 확률이 높다.

 

 

샘플링 주파수가 샘플링 대상의 주파수보다 최소 두 배 이상 크지 않으면 상호 간섭으로 앨리어싱 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이를테면 디지털 포맷으로 음향을 녹음하고 CD로 재상할 때는 섀넌의 샘플링 법칙에 어긋나지 않도록 정교한 필터들이 사용된다. 그렇지만 영화쪽에서는 스트로보스코프 효과가 문제요소가 아니라 필수요소이며, 이는 영화와 전자음향의 차이, 상상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의 차이를 낱낱이 보여준다.

p.232

 

브라운은 1897년에 슈트라스부르크 전력망의 일반 교류 전압이 걸린 전자석으로 진공관 내부의 전압을 굴절시켜 인광물질이 발린 일종의 스크린 쪽으로 향하게 했다. (무장한 능동적 눈의 최종 형태이자 가장 정밀한 형태라고 말할 수 있을) 이 통제된 전자빔은 스크린 상에 교류 전력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래픽적인 사인 곡선으로 그려냈다. 브라운이 오실로스코프를 발명한 것이다.

p. 293

 

 

하지만 이런 난해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책을 읽겠다고 다짐한다면 여러모로 흥미로운 저자의 분석에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역사를 사건의 인과로 보는 것이 아닌 단절로 바라보는데(이점에서 그는 푸코와 접한다) 이 때 단절은 특히 미디어들의 단절이다. 재밌는 것은 미디어를 보는 그의 시선이 과거 동일한 미디어를 연구했던 사람들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가령 선원근법의 탄생을 언급하는 부분에서 미술사학자들은 마사초의 작품 <성삼위일체>를 언급하며 그것이 어떻게 재현되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연이어 선원근법이 적용된 다른 작품들의 사례를 나열할 것이다. 하지만 동일한 지점에서 그가 주목하는 것은 선원근법이 이미지의 송신하는 새로운 체계를 탄생시켰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는 어떠한 미디어의 결과물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능했던 물리적인 조건에 대해서 탐구한다. 이런점은 자명한 것으로 여겨진 것 이면에 놓인 규율과 통제의 매커니즘을 밝혀낸 푸코의 이론을 미디어 분석의 방향으로 돌린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여기까지 보았을 때 키틀러는 독자적 이론을 전개한 사상가라기보다는 푸코의 이론을 미디어의 측면에서 번안한 해석가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독특함은 철저할 정도로 미디어 중심적인 사고로 역사를 완전히 새로이 썼다는데 있다. 고대, 중세, 르네상스, 근대, 현대라는 시대적 구분은 그의 책에서 예술적 미디어, 아날로그 미디어, 디지털 미디어의 시대로 변환되며 사건을 담는 도구였던 매체들은 인간의 시공간을 조작하고 나아가서는 주체의 존재양태까지 변화시키는 무엇으로 여겨진다. 다시 말해 푸코의 작업들에서 나타나는 규율, 통제와 같은 추상적인 담론들이 키틀러의 논의에서 카메라 옵스큐라, 매직랜턴, 사진 등과 같은 물리적인 존재로 탈바꿈했다. 더구나 그것을 분석하는데 있어 그는 푸코가 그러하였듯이 문서고에 쌓인 행정문서에 의지하지 않는다. 그의 관점에서 담론의 변화는 감광 물질의 변화, 이미지 송신기술의 발전, 진공관의 발전 등과 같이 미디어의 기술적 변화로 추동하는 것이다.

 

이 책은 1999년의 강의록을 토대로 했기에 오늘날의 미디어 환경과 비교할 때 다소 구식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키틀러는 "이미지 처리 알고리즘이 640x480화소와 256색상으로 뭐든 주어진 것을 주무르고 난도질한다"라고 썼던 시대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2011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그 이후 전자기기 분야의 폭발적인 발전을 분석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오늘날 키틀러는 끊임없이 재소환되고(가령 미술사분야에서 저명한 학술지인 옥토버는 2016년 그의 학문을 대대적으로 조명하는 특별호를 발행한 바 있다) 그 이론이 활용되고 있으며 심지어는 "키틀러 현상"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빈번히 인용되는데 그가 단순히 미디어의 역사를 서술하는데 그친것이 아니라 미디어를 분석할 틀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가 주창, 발전시킨 "데이터의 송신, 저장, 처리의 개념으로 바라보는 인류의 역사"는 비단 컴퓨터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무엇이 매체의 자리를 꿰찬다고 하더라도 유용한 분석 도구이며 그렇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읽어야하는 고전이 아닌 오늘날을 분석하는 도구로 여전히 유효하다.

 

 

인상 깊었던 문장

 

미디어가 존재하는 것은 인간이 미결정된 동물인 까닭이다. 그리고 이처럼 인간과 기술적 미디어의 관계가 변증법적 관계가 아니라 배제하고 적대하는 관계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기술사가 비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긴과 전혀 무관한 것임을 확인시켜준다. p.61.

 

사람들은 역사가 전진한다고 맹신하지만, 미디어의 역사는 선형적, 연속적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술의 역사는 단계적 역사이며, 토머스 핀천의 소설 <브이>에서 한 대목을 인용하자면 "역사는 계단식 함수다" p.184.

 

 

프리드리히 키틀러, 윤원화 역, <<광학적 미디어:1999년 베를린 강의 - 예술, 기술, 전쟁>>, 현실문화,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