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6년, 조선의 22대왕 정조가 즉위했다. 왕은 즉위하자마자 여느 왕들이 그랬듯 청나라로 가는 사신단을 꾸렸다. 특별할 것도 없는 이 연행은 사실 인조 이후의 연경행 사신단이 그러했듯 의례적인 상찬과 그에 대한 답례 그리고 이 과정에서 부가적으로 벌어지는 막대한 이득의 상거래가 동반된 여행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를 전후로 하는 사신단은 이전의 사신단과 다른 무엇이 있었다. 우선 당시 사신단 주요 인물들의 면면을 보자. 1776년 당시 정사正使(사행단의 총책임자)는 박지원의 셋째 형이었던 박명원으로 서학과 관련이 깊은 인물이었다. 또 같은 달 사은부사로 연행길에 오른 홍문관부교리 서호수(1736 ∼ 1799) 같은 인물은 북학파의 대표적 인물로 서학에 우호적인 인물이었다. 또 같은 해는 아니지만 1779년 사행단의 정사는 영조의 사위이자 서학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던 황인점(1732 ~ 1802)이었다. 당장 사행단의 주요 직책을 맡은 인물들의 목록을 뽑아보면 18세기 후반, 다시 말해 정조 연간에 사행을 다녀온 많은 인물들이 실학 혹은 서학과 관련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당시 조선의 사대부 사회에서 그다지 새로운 조류는 아니었다. 당시의 조선은 적어도 19세기 중반 조선의 모습은 아니었다. 비록 정조가 성리학을 근간으로 하는 조선에서 유교 사상에 충실한 군주였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그는 서학과 같은 새로운 경향을 덮어놓고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런 정조의 태도는 좀 더 거시적인 차원에서 볼 때 사대부층의 신문물에 대한 입장을 반영하기도 한다. 조선이라는 사회에서 왕은 성리학적 기반에 근거한 유교 군자의 표본이 되어야 했고 이것은 다시 말해 유교를 따르는 사대부 사회의 모범이 되어 이들의 사회, 문화적 경향을 이끌어야 한다는 뜻도 되었기 때문이다. 가령 정조 시기 문체반정은 문화적인 측면에서만 보면 바로 그러한 조선 왕들의 위치를 잘 보여주는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조 초기 문인 사회는 서학에 대한 관심이 실질적인 문물의 교류로 싹트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서구의 미술품 또한 조선으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입 경로는 다양할 것이다. 학자들의 추정으로 적어도 세 가지 루트로 서양화가 들어왔을 것이라 추정하는데 의문의 동판화 또한 이것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우선 가장 설득력 있는 경로는 연경의 사행단을 통해 직접 들어온 사례이다. 이것은 당장 정조보다 더 이전의 왕들인 숙종, 경종, 영조 시대에도 확인되는 사항이다. 또한 정조가 집권하던 시기는 청나라 궁정에서 서양화풍이 주류 화풍으로 발돋움 하던 시기였다. 건륭제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말미암아 주세페 카스틸리오네, 마태오 리파 같은 사람들이 황실궁정화가로 임명되고 중국인 제자들이 이들로부터 서양의 화법을 익히던 시기였다. 따라서 이런 청나라 황실의 미술 경향이 연경 사행단에게까지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다른 경로는 사행단과 같이 동행한 상인들이 서양화를 직접 들여와 조선에 있는 문인들에게 간접적으로 서양화를 전해주는 루트다. 이러한 경로 또한 완전 배제할 수는 없다. 이 시기 사행단은 으레 사무역으로 대표되는 경제적인 교류가 동반되었기 때문에 이 과정 속에서 문인들의 이국 취향을 맞춰줄 서양의 그림들이 유입되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실제로 의문의 그림을 사들인 수장가 김광국 또한 그의 수집품의 일부를 한양의 어떤 상인에게 구매하기도 했다.
마지막은 다소 희박하지만 흥미로운 견해인데 바로 일본에서 조선으로 물건이 들어오는 경로다. 사실 조선과 일본의 교류는 문화적인 측면에서 도외시된 측면이 있다. 이미 조선 초기인 14세기 말에 회화의 교류가 확인되고 있음에도 이에 대한 변변한 단행본조차 없는 것이 현실이다. 비록 최근의 교류사 연구 성과는 조선과 일본의 미술 교류에 대한 여러가지 사실들을 재조명하는데 성공했으나 아직까지 많은 영역이 미지로 남아 있는것도 사실이다. 피터 셍크의 동판화가 네덜란드에서 온 그림이라는 점은 바로 이 세 번째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에도 막부는 서양 국가들 중 네덜란드와의 창구를 나가사키에 열어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개방은 이후의 개방과 비교할 때 매우 제한적이었고 또 외지인들의 입장에서 불편하기 짝이 없는 여러 제약을 수반한 것이었다.
그러나 전혀 다른 문명권과의 접촉 그 자체는 정도가 어찌되었든 일본 미술에도 일정정도의 변화를 가져왔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우선 기법적인 변화였다. 서양화를 모방하려 했던 중국인들이 그러했듯이 일본인들도 서양 그림의 원근법과 명암법을 모방해 독특한 화풍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양에서 자주 그려지는 유화는 그 특성상 먼거리를 운반해오기가 여간 쉽지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은 유화가 아닌 동판화를 통해 서양의 기법을 익혔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런 동판화는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인들을 통해 유입되었을 것이다. 물론 이 동판화가 어떤 경로로 조선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한 사항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한국미술사에서 이 부분은 좀 더 개척이 필요한 미지의 영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미술품이 조선에 들어왔던 것은 확실하다. 당시 사대부, 중인 수장가들의 수장품 목록에서 우키요에나 일본풍의 산수화가 확인되기 때문이다. 다만 세 번째의 경로는 정조시기에 그다지 이용되지 않았던 루트였다는 것이 이 경로에 대한 가능성을 희박하게 만든다. 조일 교류가 영조 40년인 1764년 이후 반세기 가깝게 중단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문의 그림은 일본루트를 제외한 두 개의 경로 중 하나의 경로를 따라서 조선인 수장가의 손에 들어왔을 것이다. 현재까지의 중론은 우선 청나라 사행단으로 따라간 수장가가 그곳에서 동판화를 구입했다는 것이다. 특히 이 동판화를 수장했던 수장가가 실제로 1776년과 1779년 두 번의 연경 사행길에 오른 경험이 있기에 이 경로가 가장 설득력 있는 서양화 유입 경로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본 글에서는 직접입수 경로 외에도 제 3자를 통해서 입수했을 가능성도 함께 검토해보고자 한다.
피터 솅크의 동판화를 구입했던 사람은 앞서 말했듯 수장가였던 김광국(金光國 1727 ~ 1797)이었다. 그는 본디 양반 가문 출신의 인물이었으나 6대조에 이르러 의관 시험에 합격함으로서 김광국을 포함한 직계 자손들이 중인 신분이 되었다. 조선시대 중인 계층의 가계도를 추적하는 것은 남아있는 자료가 적고 신빙성이 없어 힘든 작업이나 적어도 김광국의 가문이 19세기까지 의관직을 세습했던 가문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후 개항기에 이르러 서양 의학의 발달로 인해 전통적인 의관 가문들이 쇠퇴하게 되는데 김광국의 가문 또한 이 과정에서 몰락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그는 당대에 유명한 수장가였기에 그의 후손대에 이르러서도 많은 미술 작품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런 쇠퇴기를 전후해 많은 작품들이 흩어지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의문의 그림 또한 다른 수장가 내지 고미술품 중개상에게 넘어갔을 가능성이 높고 그렇게 역사 속에서 이 그림이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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