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국은 자신의 화집인 <석농화원>에 피터 셍크의 이 동판화를 사들인 이후 짧막한 감상문을 남겼다. 이 감상문은 비록 짧막하지만 이후 조선이 외국 문물을 대하는 태도를 생각해볼 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서양 화법은 당나라의 방식도 송나라의 방식도 아닌 별체(別體)로 나온 것이다. 작은 화폭에 능히 천 리의 경치를 담았고 그 새김 기법의 신비로움은 비할데가 없다. 한 장의 종이에 한 격식을 갖추었구나"
그가 이 그림을 구매한 것은 순전히 호기심에 의해서였을 것이다. 그것은 이 화평에서도 드러난다. 김광국이 보기에 이 그림은 산수화라면 당연히 따져야할 정신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 이 그림에서 '격식'을 판가름하는 기준은 다름아닌 사실적인 화풍의 여부였다. 그리고 이것은 당대의 문인들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 그림에 대한 화평은 아직까진 김광국의 평이 유일하다. 하지만 서양 그림을 평하는 동양 지식인들의 태도는 거의 예외없이 호기심 - 익숙함 - 동양 회화의 우월성 재확인 순으로 진행되었다. 예상컨대 피터 셍크의 동판화 또한 바로 이런 인식 흐름에 따라서 평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동양의 작은 나라에 던져진 새로운 물결은 이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의문의 그림을 추적하는 여행도 끝이 났다.
하지만 피터 셍크의 동판화를 위와 같은 인식 흐름 하에서 파악했다고 하더라도 서양화의 영향이 조선 미술계에 아무런 영향도 없었다고 보는 것은 곤란하다. 피터 셍크의 동판화가 들어온 시기 이미 많은 조선 지식인들은 서양화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또 그것을 나름대로 응용하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일례로 조선의 화가들이 원근법을 적용한 사안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고 그것이 작품으로도 확인되고 있다. 또한 이 경향은 화원화가들뿐만 아니라 문인화가들에게도 나타나는데 표암 강세황 같은 인물은 그러한 사례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고 있다. 시기는 다소 늦지만 형식적인 측면뿐만이 아니라 재료적인 측면에서도 서양의 영향이 드러난다. 특히 안료의 부분에 있어서는 몇몇 어진이 기존에 조선에서 사용되던 것이 아닌 서양에서 사용되는 합성화학안료로 칠해졌다는 의견이 제기된 바 있다. 이렇듯 화가 개인의 그림뿐만이 아니라 왕실의 초상화에서도 서양의 영향이 묻어나온다는 것은 서양의 기법, 재료 등이 이미 조선 내에 광범위하게 보급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주지해야 할 사실은 이러한 미술계의 양상을 전통적인 요소가 존재 -> 서양의 영향 -> 근대적 요소로 변화 라는 도식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일단 미술을 둘러싼 여러 사회, 문화적인 현상들은 등식과 부등호 따위로 치환될 수 없을 뿐더러 그래서도 안된다. 이것은 비단 미술사라는 한정된 영역의 문제가 아닌 현상을 파악할 때 주의해야할 사항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도식화가 필요하다면 조선 후기의 미술계의 변화는 전통적인 요소가 존재 -> 전통적인 요소가 모종의 이유로 변화 -> 그것이 '서구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근대적인 것으로 보임이라는 도식이 더 적확할 것이다. 이 도식은 특히 미술사에서 근대라는 시대를 파악하는데 있어 내재적 요소들 속에서 발전의 징후를 읽어낸다는 점이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조선 후기 미술계에서 품평을 통한 후원자 - 작가 관계를 유교 사회에서 양반들의 시서화 문화 혹은 계회 문화 등과 연관시켜 설명하는 것들이 대표적이다.
이런 논의가 의미가 있는 이유는 동아시아 미술사에서 근대라는 시대 구분을 할 때 큰 방점을 찍는 것이 다름 아닌 서양화의 도입여부였기 때문이다.(여기서의 근대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근대미술'을 의미한다) 물론 여기서의 도입이라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대체되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산수화로 대표되는 동양화가 쇠퇴하고 풍경화로 대표되는 서양화가 주류로 발돋움하며 궁정에서 길러지던 화원들이 서구의 아카데미처럼 미술 학원을 개설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서양화로의 대체 여부는 근대 미술의 한 측면을 보여줄뿐 시대를 구분하는 기점으로서 기능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지난날 미술사연구에서 근대적 요소는 이런 외부적인 유입을 기점으로 설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견해는 특히 19세기 조선 미술을 통채로 누락해버리고 진경시대와 18세기 미술 다음에 개화기, 일제강점기의 미술로 넘어가버리는 오류를 저질렀다. 근대 미술 시대구분론에서 미술계의 근대적 전환을 일제 총독부 하의 선전체제 이후로 파악한 1920년대설과 개항과 이후 고종 치하에 있었던 개혁들(갑오, 을미개혁)을 근대미술의 전환점으로 보는 개화기설은 이러한 관점을 수용한 역사 인식에 다름 아니었다.
물론 19세기의 미술 양상이 양식적인 경향에 있어서 퇴락해 가는 것은 맞다. 그러나 18세기의 양상들을 살펴볼 때 19세기의 미술 양상은 그저 쇠락이라는 표현으로는 적절하지 않을 듯 싶다. 미술 작품을 둘러싼 여러 체계들, 가령 미술 시장이라던가 후원자의 증가는 분명 이전의 양상과 비교했을 때 특기할만한 것이었다. 김광국이 사망한 이후 조선의 미술 시장은 중인 계층을 중심으로 더 크게 성장했고 이런 성장을 발판 삼아서 기라성같은 작가들이 나오게된다. 당장 <취화선>이라는 영화로 유명해진 오원 장승업도 19세기 중인 수장층들의 적극적인 후원 하에서 탄생한 화가였다.
혹자는 피터 셍크의 작품이 조선이라는 연못에 던진 돌멩이가 단지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개화기 이후 타자에 의해 근대 미술로 이행되었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18세기, 서양 미술이 조금이나마 유입되던 시절 김광국을 비롯한 수장가들이 서양 미술 수용에 좀 더 적극적이었다면 적어도 미술 영역에 있어서는 일제강점기와 같은 상황이 되지 않았을거라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주장은 논의 자체의 정합성 여부를 떠나 기본적인 전제부터가 잘못되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동아시아 미술에 있어서 근대라는 것은 외부의 유입이라는 측면으로만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요소들이 병존해 있다. 당장 피터 셍크와 김광국이라는 수장가의 존재도 그 정체가 밝혀진것이 채 20년도 되지 않은 상황이다. 아직까지 조선 후기의 미술은 좀 더 알아보고 파고 들어야할 영역이 넘쳐난다. 그런 상황에서 굳이 근대 미술과 조선의 관계를 섣부르게 규정해버릴 필요는 없다. 설사 규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내부적인 상황과 외부적인 유입이 복합적으로 검토된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 논의를 더 끌고간다면 피터 셍크의 동판화는 논의 속에서 아주 작은 부분만 차지할지 모른다. 앞서 말했듯 조선 후기의 미술 상황은 이를 둘러싼 논쟁의 스펙트럼만큼이나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단 여기에서는 논의를 더 이상 확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 뜻하지 않게 조선에 찾아온 손님을 배웅해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피터 셍크는 하멜 이후 100년만에 찾아온 네덜란드 손님이었다. 비록 그는 하멜처럼 표류하지도 않았고 직접 찾아온 것도 아니었지만 당시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하멜만큼이나 생경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의 그림이 단순히 생경함만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당대에 그의 동판화가 어떻게 인식되었든 오늘날의 입장에서 그의 그림은 조선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많은 질문들을 던져주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피터 셍크는 우리에게 있어 참으로 고마운 손님이었던 것이다.
의문의 동판화가 네덜란드에서 시작해 조선의 한 수장가에게 들어오기까지 약 100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 과정에서 이 그림은 뜻하지 않게 16-18세기의 세계상을 모두 거쳐갔다. 하지만 수장가의 손에 들어간 이후 피터 셍크의 동판화는 조선의 어딘가에 잠들었고 시대가 바뀔 때까지 자취를 감추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최근 몇 십년간 미술사학에서 새로운 조류로 떠오른 미술사회사, 교류사는 이 그림을 다시 미술의 주무대로 끌어왔고 오랜 기간의 연구 끝에 많은 사실들이 밝혀졌다. 연구 과정에서 한국미술에 대한 다양한 양상들이 발견되었고 이것은 다시 미술사학계가 탄탄한 학문적 기반을 가지게 되는데 일조했다. 애써 과장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만큼 피터 셍크의 동판화는 한국의 학자들에게 많은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앞선 논의에서 보았듯 사실을 밝히는 일이 역사가가 해야하는 전부는 아닐 것이다. 아직 해석의 문제가 연구자들 앞에 남아있다. 사실을 밝히는 것이 미지의 공간을 빠져 나가는 문을 여는 작업이라면 해석은 그렇게 열어놓은 문 너머의 새로운 풍경을 바라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동판화가 보여준 새로운 풍경은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조선의 모습이었다. 이제 1969년의 이용희와 1610년의 마태오 리치, 18세기의 김광국이 열어준 문을 닫고 그 너머를 보자. 우리 앞에 펼쳐진 풍경은 어떤 모습인가? 그리고 그 풍경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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