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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미술/피터 셍크, 하멜 이후 100년만의 네덜란드 손님

피터 셍크, 하멜 이후 100년만의 네덜란드 손님 - 11

by 공식 2021. 12. 4.

김광국은 오늘날 의관 출신의 수장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의 정체에 대해서는 갑론을박이 있었다. 연구 초기 많은 연구자들은 그를 양반 계층 내지 경화사족으로 오인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 와서는 그의 생애에 대해서 꽤 자세하게 알려졌지만 당시 한국 미술사학계에서 중인 수장가라는 존재는 그만큼 낯선 것이었다. 사실 이것은 비단 김광국의 정체를 넘어 조선과 근대미술이라는 복잡한 주제에 대한 하나의 입장을 정하는 문제로까지 연결된다. 다시 말해, 만약 김광국을 중인 수장가로 상정할 때 그 논의를 끝까지 밀고 갔을 경우 상품으로서의 미술작품의 의의, 더 나아가 도시문화와 시장, 개인취향의 발달과 근대적 주체 문제와 같은 쉽사리 건드리기 어려운 문제까지 맞닿아 있다. 이 문제 또한 최근의 한국미술사 논의에 있어서 뜨거운 감자 중 하나다. 하지만 본 글에서는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하지 않고 피터 셍크의 동판화가 유입된 두 번째 가능성을 논하는 부분에서 짧막하게만 언급하도록 하겠다.

 

그는 1749년 내의원에 들어간 이후 꾸준히 직위가 상승해 어의들의 최고 책임자 자리에 해당하는 수의(首醫)에 까지 올랐다. 이러한 직위로 인해 김광국 집안은 경제적으로 풍족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으며 이런 경제적 부는 그가 의관 출신으로 미술품을 수집할 수 있었던 원천이었다. 김광국의 생애에서 또 특기할만한 것은 그의 처가 집안과의 관계다. 그의 처가는 인동장씨 집안이었는데 대대로 무과를 했던 집안이었다. 그런데 인동장씨 집안은 무과 집안이기도 했지만 화원(畵員)을 배출한 집안이기도 했다. 처가의 이런 예술적인 이력은 김광국의 예술적인 감식안에도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그는 처가 집안의 인맥으로 당대 화원들과 교유해 감식안을 쌓아갔다. 일례로 그는 어해화의 일인자이자 인동장씨 집안 사람이었던 화원 장한종을 통해서 당대의 화원들과 교류하였다.

당대의 유명한 수장가였던 김광국이 서양화에 눈독을 들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사실 그는 서양 이외에도 여러 이국적인 작품들을 구입해둔 상태였다. 70점이 넘는 그의 수장 목록을 보면 조선 전기의 안견이나 중기의 신사임당의 그림에서부터 일본의 인물화 중국의 화조화까지 수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상컨대 그는 기존의 동양의 산수화와 다른 이 작품에 그는 이국적인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어쩌면 연행을 다녀온 아버지의 영향이 그의 취향에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또한 여타 다른 문인들과 마찬가지로 이 동판화에 대한 지식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그가 수집한  작품이 서양의 모습을 담고 있는 작품으로 생각했다는 것이 그것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그가 직접 서양을 가본적은 없었기에 이 그림이 무엇을 그린 것인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피터 셍크의 그림은 사실 유럽의 풍경을 그린 것은 아니다. 이 판화가는 당시 유행하는 오리엔탈 취향의 그림을 판화에 그려넣었고 그렇게 완성된 것이 바로 이 판화였던 것이다. 오늘날 이 판화는 <슐타니에 풍경>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풍경은 판화 왼쪽 하단의 인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아랍 세계의 풍경을 그린 것이다. 그림 아래에 있는 문장에는 이 그림에 대한 짧막한 정보가 수록되어 있는데 "슐타니에, 타우리스 산 허리에 위치한 아랍 혹은 애락에 있는 도시"라고 되어 있으며 추가적으로 "페르시아의 오래된 도시"라는 설명이 쓰여 있다. 하지만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수장가가 그림의 풍경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세계관을 가졌을 것 같지는 않다. 그의 관점에서 이 그림은 단지 희귀한 기법으로 그려진 유럽 풍경일 따름이었다.

 

이런 인식은 당대의 지식인들, 심지어 서학에 대해 개방적이었던 북학파 학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세계의 문은 이제 전지구적 단위로 열렸으나 그렇게 열린 문은 아직까지 낯설기만 했다. 당대에 청나라에서는 이미 네덜란드에서 날아온 동판화가 꽤 많이 유통되고 있었지만 그것이 명나라가 멸망한 후 100년이 지나서야 나타난 현상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중국의 서양 문물 수용 역사와 비교할 때 조선은 아직 어린아이의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다. 조선은 서양 문물 교류의 역사만을 보았을 때 청나라 초기 내지 명나라 말기와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정조 통치의 말기에 들어서 이런 서학 수용 태도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놀라움에서 익숙함으로 바뀌었지만 그런 인식의 전환이 일어났을 땐 이미 조선의 문은 굳건히 닫혀버린 상태였다.

 

1801년 정조의 붕어 이후 신유박해가 일어났고 조선에서 서학의 뿌리는 거의 절멸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적어도 18세기 후반의 문인들은 서양화를 소유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썼던 것 같다. 당대에 기록된 사서나 사대부들의 문집에 심심치 않게 서양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북학파 내지 서양에 우호적이었던 사람들에 한정된 현상은 아니었다. 김광국은 당대의 많은 문인들과도 교류하였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서양의 동판화를 보았을 것이라 추정되는데 이들 중에는 서학에 대해 보수적인 인물들 또한 많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글을 마치기 전 김광국이 서양화를 입수할 수 있었던 또 다른 경로를 살펴보자. 그가 활동하던 시기 이미 조선 내에는 작품을 사들이고 즐기는 수장가들이 상당수 있는 상태였다. 양반부터 시작하여 중인 계층에 이르기까지 부를 거머쥔 사람들 중에 몇몇은 자신의 부를 문화적인 취향을 충족시키는데 사용하였다. 김광국 또한 이런 자신의 취향을 충족시키기 위해 한양 혹은 평양의 어떤 상인에게 서양화를 구매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고 가정해보면 그가 그림을 입수 할 수 있었던 가장 보편적인 경로는 시장을 통해서였다.

이것은 비단 조선에게만 한정된 사안은 아니었다. 이미 명말기에 들어서 중국에서는 서화고동 시장이 투기에 가까울 정도로 발달해 있었다.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이런 미술 시장은 서양화가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빠르게 전파될 수 있었던 한 요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것은 중국뿐만이 아니라 에도시대의 일본에서도 나타나는 사안이었다. 명청시대를 거치면서 이른바 문인 취향이라는 것은 보편적인 취향으로 확산되고 그 영향력이 비단 양반과 같은 상류층이 아닌 중인 계층에게도 널리 퍼져가면서 공급과 수요의 곡선이 균형을 맞추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의 문화 양상에서 미술이라는 것은 주로 궁정의 요구나 종교 단체의 요구에 의해서 제작되었다. 그렇게 제작된 작품들은 대게 소장처, 주문자, 제작자의 관계가 명확하고 단선적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16세기 이래로 이러한 양상에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미술작품이 궁정과 종교시설을 넘어 개인의 수요를 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 이 양상은 단순히 사람과 사람이 만나 생기는 물물거래로 특징지어졌다. 이 경우 궁중과 화가의 관계가 단순히 특정 개인과 화가의 관계로 옮겨갔을 뿐이었다. 하지만 점차 화가들은 특정 개인이 아닌 불특정 개인을 위한 미술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목적은 당연히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한 것이었다. 미술 작품이 일종의 상품이되어 버린 것이다. 심지어 이 상품은 가치가 매우 주관적이기 때문에 투기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화가인 안견이나 자화상으로 유명한 윤두서 그리고 진경시기 대표적 화가 중 하나인 정선의 그림은 이러한 투기의 열풍 속에서 수 없이 많은 위작 논란에 휩싸였다. 김홍도의 그림 같은 경우 수요의 변화에 따라 값이 천정부지로 뛰기 일쑤였고 그때마다 수장가들 사이의 치열한 확보 경쟁이 붙어버린 것은 이러한 열기에 덤으로 끼어든 부차적인 요소로 보일 지경이었다.

 

김홍도, <포의풍류도>, 18세기, 개인소장. 골동품과 서화들을 이리저리 늘어놓은 김홍도의 자화상에서 18세기 수장가들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한양 일대에 거주하였던 사대부들과 부유한 중인 계층 수장가들은 자신의 사랑방에 지인들을 불러 모아 골동품을 보여주고 또 교환하기도 하였다.

 

수장가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작품을 확보했다. 이들은 사적으로 만나 개인 대 개인의 자격으로 작품을 거래하기도 했으나 중간지점에 해당하는 시장을 매개로 하여 거래하는 경우도 존재했다. 광통교 인근에 존재했던 지전, 향전, 약포에서 그림이 판매되었고 작품 거래를 중매하는 중매인들도 존재했었다. 이들의 거래 양상에서 특징적인 것은 이제 미술 작품이라는 것이 이전과 달리 제작 맥락에서 분리되어서 온전히 상품으로서 기능하였다는 점이다. 이렇게 제작 맥락과 분리된 작품은 으레 수장가들의 주요 매입 대상이 되었고 이것을 노린 화가들이 의도적으로 상품을 전제로 하는 회화들을 그려낸 경우도 존재했다. 단원 김홍도나 현재 심사정 같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화가들 또한 이런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데 김홍도의 경우 아예 미술 작품을 판매하는 장소에서 그림을 그려 팔았다는 김광국의 증언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였다.

 

조선 후기 미술계의 변화가 수장가들의 입맛에 맞는 컬렉션을 모으는데 더 없이 좋은 환경이었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런 경향과 맞물려 수장가들은 직접 화가들을 후원하여 작품을 만들도록 하고 그 후원에 부응하여 후원가 - 화가 , 도시민 - 미술 상품과 같은 근대적인 미술 체계가 싹트기 시작했다. 만약 김광국이 서양화를 한양이나 평양에서 입수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발달된 미술 시장을 통해 작품을 구매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상의 두 가지가 김광국이 동판화를 입수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유력한 루트들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치면 단지 사실을 밝혀낸 수준에 불과할 것이다. 사실 연구자들에게는 동판화가 남겨놓은 골치아픈 문제가 남아있었다. 조선과 근대미술이라는 문제가 바로 그것으로 이 문제가 사실상 피터 셍크를 둘러싼 논의에 있어서 가장 첨예한 대립이 일어나는 지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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